심판(1999), 박찬욱
<심판>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이다. 러닝타임은 약 30분이며, 청소년은 관람이 불가능하다. 19금이라기에는 따로 선정적이거나 잔인한 장면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마 ‘시체’가 계속 등장하다 보니 소재적인 면에서 그러한 판정을 받지 않았을까 싶다. 박찬욱 감독의 주요 필모그래피로는 <아가씨>, <설국열차>, <친절한 금자씨>, <올드보이> 등이 있다. 영화를 잘 모르는 나도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감독이다. 특히 <설국열차>를 보았을 때의 그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감독의 경향을 분석할 수 있을 만큼 모든 작품을 다 감상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적인 흐름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마를 굉장히 독특하게 잡는 느낌, 그리고 인간을 꿰뚫고 있다는 느낌. 등장인물 간의 관계성이나 갈등을 통해 이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 이번 영화 <심판>에서 뿐만 아니라 <설국 열차> 등에서도 특수한 조건이나 상황을 바탕으로 진행되지만, 마지막에는 미묘한 인물 간의 갈등과 인간성에 대한 여운이 길게 남게 된다. <아가씨>에서 어떠한 사건보다도 히데코와 숙희의 관계가 주로 회자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심판>은 시체 안치소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일하는 한 남자가 등장한다. 장의사는 너무나 지루하다는 듯 하품을 한다. 여느 때처럼 시체가 들어오고, 그 여자의 부모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서 제 일을 시작한다. 시체는 얼굴이 심하게 훼손되어 신원을 확인하기 어려웠고, 사건을 담당하는 공무원과 기자도 함께 일을 하게 된다. 절차를 진행하던 중, 갑자기 장의사는 기자를 내보내고 말한다. 저 시체가 나의 딸인 것 같다고. 어린 시절 사진밖에 없어 누구의 딸인지 구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시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이렇게 사건이 시작되고, 급격하게 혼란스러워진다.
사실 장의사의 발언은 말이 되지 않는다. 진작 부모라고 판단되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시체의 얼굴을, 심지어 훼손되어 분간할 수 없는 얼굴을 보고 그런 말을 하다니. 그러나 그는 너무나도 절박하게 딸의 오른쪽 다리에는 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다리만 확인하면 되는 상황이지만 하필 오른쪽 다리는 절단되어 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논점이 흐려진다. 죽은 자의 안위를 기리며 고상하게 마무리되었어야 했을 이 시간은 오로지 산 사람들을 위해 진행된다. 시체를 하나의 증거물처럼 이리저리 들춘다. 심지어는 바로 옆에서 술을 마시기도 한다. 이미 시체는 물건처럼 전락했다. 아이의 진짜 부모임을 증명하기 위해 솔로몬에게 판결을 맡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가짜 어머니에게는 아이의 생사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결과만을, 그 이후에 얻을 것들(복수나 질투심의 해결)이 중요했다. 이제 이 사람들에게도 잃어버린 딸을 찾느냐가 문제가 아니게 된 것이다. 이 시체가 과연 누구의 딸인가. 서로 나의 것이라고 우기기 바쁘다. 주객전도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 갑자기 기자가 원래 부모의 자격으로 온 사람들의 진짜 딸과 함께 돌아왔다. 그 딸은 이 상황을 보고 기함하며, 죽은 이 사람을 안타깝게 여긴다. 이들은 사실 시체보다 보험금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옥신각신하는 사이, 갑작스레 지진이 일어난다. 여기에서 진짜가 누구인지 가릴 수 있는 단서가 나온다. 장의사는 시체에게 달려가고, 부모라고 하는 사람들은 쓰러진 진짜 자신의 딸에게 간다. 혼란 속 전구가 깨지는 사고로 인해 장의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감전되어 죽고 만다. 이러한 엔딩은 충격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납득했던 것 같다. 내가 사고를 당해 죽은 여자였다면, 저들에게 벌을 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그만큼 황당하고 억울한 상황이다.
먼저 <심판>을 감상하면서 굉장히 독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출이나 스토리를 제외하고 봐도 시체 안치소라는 설정은 흔하지 않다. 또한 하나의 시체를 두고 생기는 갈등은 인간의 욕망을 잘 드러내는데, 이러한 행동들을 보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보통 욕망을 드러내는 소재로는 돈이나 명예, 권력 등이 있다. 화려하거나 힘을 쟁취하려는 과정에서 추한 실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히려 정반대의 것, ‘시체’를 쟁취하는 상황을 통해서도 밑바닥과 속내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다. 물론 ‘보험금’이라는 전제가 걸려있긴 하지만 시체라는 마이너스적인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폐쇄적이고 조금 더 음험한, 비밀스러운 느낌을 줄 수 있었던 것 같다.
구성적인 면에 있어서 특별한 장치는 찾지 못했다. 어쩌면 이익을 위해 다투는 내용은 뻔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소재와 상황의 특수함이 이를 반감시켜주었다. 오히려 감독이 뻔한 전개를 의도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대놓고 부정적인 인간상을 꼬집기 위해서 말이다. 사람들의 욕망이 선명하게 제시되고, 내용이 전개될수록 추한 모습이 드러난다. 그리고 당연하게 벌을 받는다. 악을 징계하는 것을 애매하게 표현하거나 숨기지 않은 것이다.
열린 결말과 찝찝한 전개가 많은 요즘 영화에 익숙해진 나에게는 이러한 연출이 색다르게 다가왔다. 마지막에 장의사만 살아남은 것을 보아 은연중에 이 사람이 진짜 부모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과연 욕망이 없었냐는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부모라고 하는 사람들은 보험금을, 기자는 특종을, 공무원은 성과를 바라는 것이 투명했지만 장의사의 욕망은 무엇이었을까? 순수하게 딸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은 아니었을 것 같다. 등장인물들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이미 죽었으니 말이다. 장의사에게도 사실상 남은 것은 이 시체가 자신의 딸이었다는 것뿐. 너무나도 허망한 엔딩이 아닐 수가 없다.
비인간적인 사람들은 벌을 받는다. 이는 인간성을 잃어가는 사회에 대한 대리 처벌의 행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진정 원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그저 일률적인 것을 얻기 위해 우기기 바쁜 사람들과 이로부터 나오는 극단적인 행동들. 우리도 각자의 욕망을 검토해보아야 한다. “다들 왜 죽어있는 사람이 자기 딸이기 바라는 건가요? 살아있길 바라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나는 살아있는 것을 위해 정당하게 애를 쓰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죽어있는 것에 매달려 추한 몰골로 고집을 부리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