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xt Floor(2008), 드니 빌뇌브
<Next Floor(2008)>은 최근 개봉한 <듄>의 드니 빌뇌브 감독 작품이다. 그는 1988년 <지구에서의 8월 32일>로 데뷔하여 칸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고, <그을린 사랑>과 <프리즈너스>로 주목받았다. <듄(2021)>과 <그을린 사랑(2010)>을 관람했던 사람으로서, 본 단편영화와 비슷한 지점도 있고, 조금은 다른 느낌을 주는 부분도 있었다. ‘알고 보니 같은 감독이었다는 것’은 기억 속에 멀게 자리 잡은 영화들을 한 곳으로 불러와 서로 비교할 수 있게 한다. <듄>은 사실 세계관을 모른 채로 봤기 때문에, 이해하느라 여유로이 감상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다른 대규모 판타지 영화와는 다르게 비교적 정적이고 어둡다는 점은 알 것 같았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기계나 존재를 불러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웅장 해지는 것을 제외하면, <Next floor>와 기본적인 부분은 비슷하게 느껴졌다. 회색빛의 어둡고 차가운 영상미가 특징인 것 같았다. 또한 감독은 인간의 내면 표현, 즉 감정, 표정 등을 잘 잡아낸다고 생각한다. 이는 특히 <그을린 사랑>에서 잘 드러나는데, 그리스 비극인 ‘오이디푸스 신화’를 기반으로 끊어낼 수 없는 불행을 선명하게 표현했다. 세 편의 영화에서는 모두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고, 눈빛이나 표정을 통해 관객에게 대사 이상의 것을 전달해주곤 한다. 감독은 이 영화로 시체스 국제영화제 ‘오피셜 판타스틱-단편상’, 휘슬러 영화제 ‘국제 단편영화상’, 판타스포르토 국제영화제 ‘국제 판타지-단편영화상’ 등을 수상했다.
영화 소개는 ‘캐비어와 시중드는 사람들까지 준비된 호화로운 만찬에 열한 명의 부유한 손님이 참석해 마치 의식처럼 보이는 미식의 향연을 벌인다. 이 기이하고도 그로테스크한 세상에서,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며 끝이 안 보이는 이 풍요의 교향곡을 중단시키려 한다.’라고 되어있다. 이는 개괄적인 내용을 설명해주고 있으나, 다소 중립적, 낙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영화는 시작부터 어둡고 오싹한 분위기가 이어지며, 그로테스크하고 찜찜한 기분을 들게 만들기 때문이다. ‘끝이 안 보이는 이 풍요의 교향곡을 중단시키려고 한다’는 과연 이를 풍요라고 할 수 있는지를 질문하게 하고, ‘예측하지 못한 일들’은 과연 등장인물들의 행위와 전혀 무관한 제3의 일인지를 생각해볼 수 있게 한다.
어두운 공간 속에서 부자, 혹은 권력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식사를 즐기고 있다. 주위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음식을 나르고, 악기로 멋진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그러나 초반에 클로즈업되는 시종장의 알 수 없는 미소와 눈빛을 통해, 결코 단란하고 즐거운 자리가 아님을 보여준다. 음악이 연주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우리에게 남는 것은 차가운 식기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이다. 그들은 삶의 마지막 만찬을 즐기기라도 하듯 손을 바삐 움직인다. ‘허겁지겁’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게 말이다.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도 않는다. ‘먹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저 음식을 먹어치우기 바쁘다. 음식 또한 호화스러운 재료로 만들어졌으나, 여타 음식 영상들처럼 먹음직스럽게 생기지 않았다. 핏물을 연상시키는 액체들과, 출처를 짐작할 수 있는 적나라한 형태는 다소 그로테스크하다. 거대한 뼈를 통째로 사용하고, 사슴을 박제한 것만 같은 다소 자극적인 플레이팅은 부풀려지고 허황된 세태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찜찜한 표정을 하고 있는 한 여자를 제외하고는 먹는 것에 혈안이 되어있다. 그러다 직원들은 어떠한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 듯 일제히 뒤로 물러나고, 책상 주변의 바닥이 무너져 아래층으로 떨어지고 만다. 시종장은 당황한 기색 없이 “Next floor.”라고 말하며 직원들과 함께 지하로 향한다. 짧은 정적이 지나고, 흰 가루로 범벅이 된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음식을 입에 집어넣기 바쁘다. 연주도 다시 시작된다.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던 여자도 결국은 고기를 입에 넣으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다시 바닥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시종장과 직원들이 먼저 아래층으로 가서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은 한 층을 지나, 끝도 없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만다.
악마는 직접적으로 우리를 죄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지 않는다고 한다. 약간의 속삭임, 부추김만으로 인간을 나락으로 빠뜨린다. 나는 시종장이 마치 악마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들이 무슨 이유로 이곳에 모여 만찬을 즐기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음식을 제공하고 어떤 방해도 없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먹기를 선택한 것은 인간이지만 말이다. 장애물의 부재, 무조건적인 평화가 항상 긍정적인 결과를 낳지는 않는다. 이는 때로 악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과도한 자유는 ‘방종’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실의 안락함은 미래를 간과하게 만들며, 중독으로 이어지기 쉽다. 초반에 나오는 시종장의 오묘한 미소와, 마지막 장면의 강렬한 눈빛은 이를 확신하게 한다. 그의 눈은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 ‘그럴 줄 알았지. 다음은 너다.’라고 말하는 것 같다. 미련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과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듯, 응시한다. 실제로 식탐은 7대 죄악인 ‘교만, 탐욕, 시기, 분노, 음욕, 식탐, 나태’ 중 하나이다. <Next floor>은 이를 극적으로 잘 표현했다. 부유하고 화려한 것이 아닌 싸늘하고 폐쇄된 공간을 설정하고, “Next floor”외에는 대사가 없다는 점이 특히 그러하다. 적나라한 음식 씹는 소리와 날카로운 식기 부딪히는 소리도 한몫한다. 많은 요소들이 일제히 한 곳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도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본 사람이라면 분명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화려하고 먹음직스러운 축제 음식에 정신이 팔려 딸을 잊어버리고, 결국은 돼지로 변해버린 부모님을 말이다. 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과 딸을 잃어버렸고, <Next Floor>의 사람들은 현실감과 위기감을 잊어버렸다. ‘음식’이라는 점에서 함께 공유하는 부분이 있지만,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그 상황에서 구원해줄 존재가 있으나, 본 단편영화에서는 구해줄 이 없이 함께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차이점이 있다. 나는 중간에 먹기를 망설였던 여자에게 시선이 갔다. 끝까지 음식을 탐하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에게 구원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신의 몸 하나는 건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를 통해 느낀 점도 있다. 공동체 안에 있으면 개인의 가치관을 지키기 어려우며, 이를 쉽게 저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장점이자 치명적인 단점이다. 집단지성이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고, 군중심리에 따라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 단점이다. 그래도 서로를 말리지 않았으니, 나락(혹은 지옥)에서 특정한 누구를 탓할 수는 없겠다.
왜 ‘Next’ 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다음’은 보통 진보의 개념으로, 한 단계 위를 가리키는 이미지를 가진다. 그러나 본 영화에서 시종장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감에도, “Next floor”라고 말한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우주선은 위로, 지구 궤도 밖으로 상승한다. 평균 소득률도 오르고, 국내총생산(GDP)도 상승 곡선을 탄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한국 출산율은 떨어지기만 하고, 국민행복지수도 하향세다. 물론 자살률은 오르고,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긴 하다. <Next Floor>에서는 꼭 다음이나 발전 등이 상승세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바닥으로, 나락으로 끝도 없이 떨어지는 것이 ‘다음’,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고 암시하는 것 같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결국 인류는 어디로 가는가?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그렇게 한다고, 이를 따라가는 것이 맞는 일인가? 좋은 것만을 취하고, 상위 포식자로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탐하는 일이 옳은 일인가? 살이 찔수록 사람은 둔해진다. 닥쳐올 상황에 대처할 능력이 떨어지게 되며, 결국 꼼짝없이 당하게 되는 것이다. 악마가 바닥에 우리를 떨어지게 만드는 장치를 설치하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먹어치운 결과, 즉 살의 무게 때문에 스스로 무너진 것이다. 영화에서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혹은 죽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영원히 떨어지는 굴레 속에 갇혀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만은 선명하게 알려준다. 더 이상 흐린 눈을 해서는 안 된다. 모른 척하기에는 우린 이미 너무나도 ‘다음 층’에 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