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였다. 출산 후 유방암 치료와 육아를 병행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유방암 치료만 전념하기로 했다. 당연지사 치료를 포기할 일은 없으니 육아는 잠시 마음 안에서 접었다. 육아 비중을 마음 안에서 줄였다고 하여 작정하고 엄마이길 포기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치료 중에도 아이와 관련해 시시각각 생기는 문제를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다. 나를 대신해 육아를 누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고민이 첫 번째였다.
골머리를 앓지 않고 한큐에 해결할 수도 있었다. 그건 바로 부모님에게 맡기는 일. 그 누구보다 육아 경험치가 높은 부모님에게 맡기면 크게 신경을 안 써도 됐다. 부모님이 맡아줄 수 있는 감사한 형편도 되었다. 그러나 내 아이를 부모님에게 맡기고 싶지 않았다. 어떤 방식이든 부모 사랑 하에 내가 존재했음에도 그 사랑의 방식이 옳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아 정보가 넘쳐흐르는 세상, 옛 육아 방식으로 기르고 싶지 않았다.
지금이야 ’ 어리석은 생각이었다.‘하고 반성하지만 그땐 그 생각이 오직 정답이었다. 육아가 그리 힘든 것인 줄은 꿈에도 모르고 오만했다.
아픈와중에도 육아는 부모 둘 중 한 사람이라도 도맡아 했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결국 그 욕심을 챙겼다. 상의 하에 남편이 육아휴직을 쓰기로 했다. 아빠도 함께 육아하는 시대라 요즘은 남자들도 육아 휴직을 많이 사용한다고 한다. ‘~라고 한다.‘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부부에겐 남의 일인 것처럼 와닿지 않았다. 남자 육아 휴직 사용이 누군가에겐 자유로운 상황이 될 수 있겠지만 남편 회사는 그런 분위기가 조성된 회사는 아직 못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니 꿋꿋하게 육아 휴직을 승인받고 법적인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남편 혼자 백일 육아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백일의 기적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다. 백일 전까지 부모는 쪽잠만이 유일한 잠이다. 잠을 자고 싶을 때 자지 못한 채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삶의 질을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항암으로 극심한 불면증을 겪어 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때문에 남편에게 전해 듣는 고충 중에서 자고 싶다는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남편은 입원 중인 나를 위해 틈틈이 영상 통화를 하며 아이를 비춰주곤 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은 침울하게 말했다.
‘여보. 나 산후우울증 올 것 같아.’
산후 즉 아이 낳는 고통만 모를 뿐이지, 여자들이 육아를 하다가 왜 우울증 걸리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말하는 그이였다. 애는 내가 낳고 산후우울증은 남편에게로 왔다.
남편은 우울했던 그날의 상황을 묘사하며 이어서 말했다.
‘여보. 날이 화창한 어느 날이었거든? 소복이(아이 태명)를 겨우겨우 재우고 식탁 의자에 털썩 앉았어. 피곤해도 커피 한잔의 여유는 놓칠 수 없지. 원두 갈아서 커피 한잔을 내려 마셨어. 잠시 멍 좀 때리다가 시선을 거실로 옮긴 그 순간 따사로운 햇살이 창문 사이로 쫘악 들이치는 거야. 날씨는 기가 막히게 좋은데... 하아... 내 눈에는 아기 빨래 거치대에 널려있는 손수건과 아이 옷이 스포트라이트처럼 집중되어 보이더니 갑자기 너무 서글퍼지는 거야.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어.‘
남편이 그 말을 꺼냈을 때는 아이가 태어난 지 2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는 공감이 진공 된 사람처럼 상황 묘사가 디테일해서 그저 웃기다면서 깔깔대기 바빴다. 이래서 남자들도 전부 육아해야 한다고 덧대며 웃고 넘겼다. 만약 남편이 이게 웃기냐며 다소 앙칼진 한마디를 쏘았다면 눈치를 채고 웃지 않았겠지만 남편은 그때의 상황을 코미디 한 어조로 말하기도 했다. 항암 중에 웃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으니 남편의 그 말은 한줄기 빛 같았다.
1차 항암이 끝나 퇴원을 하고 집으로 갔을 때 회색 잿빛 피곤으로 물든 칙칙한 남편 얼굴을 보는 순간 진심 미안했다. 고되었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당신도 너무 고생한다고, 함께여서 고맙다.'는 말을 먼저 건네어줄걸.
한편 3개월 항암 스케줄을 따라가는 그 사이 남편은 육아 마스터가 되어갔다. 반면에 항암 후 퇴원하고 나면 나는 육아 바보가 되어 아이와 마주했다. 영상 통화로 본 아이를 직접 보는 날은 아이를 내 품에 쏙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서서 아이를 안고 둥가둥가 해주는 행위를 단 1분만 해도 두 손 두 발 들었다. 나 못하겠다고 남편에게 토스했다. 가뜩이나 좋지 않은 컨디션에 아이를 잠깐이라도 보면 컨디션은 확확 떨어졌다. 그런 몸 상태로 아이를 잠깐 보는 일조차 내게 쉽지 않았다. 아이를 전달받은 남편은 능숙하게 분유를 먹이고, 백색 소음을 내며 아이를 자신의 가슴과 최대한 가까이 두어 살포시 눕혀 재웠다. 손수건과 젖병을 매일매일 삶아 세척하는 일도 후다닥 했다. 아이가 깨어있을 땐 초첨책을 보여주며 뒤집기도 연습해 성공시켰다.
항암 회차를 거듭하면 망가지는 나의 몸 패턴이 보이듯 남편의 육아도 패턴이 보이는 듯했다. 패턴이 보였다고 쉬운 일은 아니지만, 남자도 육아를 꽤 잘한다!
누구에게나 처음이 서투를 뿐이다. 내가 육아를 맡지 않아 육아를 몰랐듯, 무엇이든 하지 않아 모르는 세계일 뿐이다. 육아는 여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뿌리가 남아있다. 젊은 여성들이 결혼을 하면 맞벌이를 해도 가사, 육아 부담을 훨씬 더 많이 지는 탓에 비혼을 결심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기준 맞벌이 부부의 경우 여성은 가사 노동을 하루 평균 3시간 7분 한 반면, 남성은 54분만 했다고 하니, 여전히 육아란 여자가 해야한다는 비중이 높은 게 현실이다. 또 여자 스스로 육아는 나의 것이라 생각하는 경향도 높을 수 밖에 없다. 나또한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이 글을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려나. 그럼에도 여성이나 남성에게기대하는 이미지를 완전히 제거하기 어려운 건 사실 아닌가. 그러나 어쩌면 남성들은 육아의 달인일지도 모른다. 비록 불(不) 산후우울증이 동반될 수 있는 부작용은 제외하고.
육아나 살림을 같이 나누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게 말만 쉽다. 실상 결혼을 해서 육아나 살림을 공평하게 분배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단 한 가지는 둘 중 한 사람이 육아를 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라면 꼭 여성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하고 싶었다. 남자보다 체력 좋은 여성이 있고, 여성보다 집안일에 흥미 있는 남성이 있다. 육아를 성별로 구분 짓는 것이 아니라 성향이나 체력 뭐 이런 차이에서 비롯되어야 하지 않을까. 서로를 이해하고 끝내 상의하여 둘 중 한 명이 하면 될 일이지 않을까. 같이 하면 분명 좋고!
남편은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해있지 않고 본인이 육아휴직을 쓸 일이 없었다면, 그래서 나 혼자 육아 중이었다면, 그래서 내가 맨날 힘들다 말했어도, 결국 퇴근하고 보는 육아정도로는 그 고됨을 전부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고. 본인이 몸소 해보니 일하는 게 더 낫단다.
참고
https://www.chosun.com/national/national_general/2022/05/13/MVFXJ4E5KZGXFOPMEZTAU5NAW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