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희 Aug 13. 2023

비록 모두의 끝이 죽음이더라도

종교와 인류의 연관성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곳에 앉아서, 아무런 생각 없이 십자가를 보았을 때.


 한 달 간의 유럽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지 3주 째. 10개 가량의 도시, 7개국의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수의 성당들을 보았다. 무신론자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리도 성당을 많이 관광하러 다녔던 이유는 글과 내 작품에 대한 영감을 혹시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물론 영감의 ㅇ자도 얻지 못했지만.


또 종교에 관해서, 그리고 역사에 관해서도 잘 모르는 나임에도 유럽=예술의 나라이고 예술은 곧 종교와 아주 긴밀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해서 정확히 세지는 않았지만, 나는 지난 한 달 간 꽤 많은 성당들을 보러 다녔다. 그리고 사실 나는 한국에 살면서 단 한 번도 성당을 가본 적이 없었다. 또한 신의 존재, 혹은 종교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나는 종교와 예술 그리고 삶의 연관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내가 둘러본 성당들은 대부분 화려하고 아름다웠으며, 또 아름다웠다. '관광지' 성당이라고 치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냐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으나 그야말로 정말 모든 성당들이 아름다웠다. 그 시절에 도대체 어떻게 이것을 오로지 사람의 손으로만 만들었을까 하는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고 발로 걸으니 말로 다 할 수 없을만큼 벅찼다. 언젠가 혼자 또 가서 말 없이 오랫동안 즐기고 싶을 만큼.


 <종교, 삶, 예술> 이 세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성의 개념들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 인류가 왜 그리도 종교와 '신'에 간절했는지 알 수 있다. 과학과 의술이 제대로 발전되지 못했던 그 시절 인류는 늘 죽음과 병이라는 존재와 싸워야 했고 또 두려워야만 했다. 그 질문은 곧 이러한 궁금증을 낳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죽으면 어떻게 될까?" 그 다음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죽음 뒤에 아무것도 없다는 허무함에 쉽게 동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모두는 결국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일 뿐이고 그 끝엔 결국 아무것도 없는 '무' 그 자체로, 각자의 육신과 정신은 가루처럼 사라지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죽음이 두려운 인류는 죽음 뒤의 세계를 떠올려야 했다. 비록 우리 모두가 모순적이게도 죽음을 향해 살아가는 존재이긴 하지만, 그 끝엔 분명 그러한 허무함을 단번에 해결해줄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믿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한 것들은 곧 인류에게 삶을 살아갈 동기 혹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죽음이 눈앞에 닥쳐오더라도 사후를 꿈꿀 수 있게 되었고, 이미 떠난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수도 있을 것이란 희망, 즉 '죽음 뒤의 희망'을 행복하게 꿈꿀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러한 두려움으로 종교가 탄생했고 종교는 당연하게도 인간의 삶에 아주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그 시대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웅장하고 화려하게 성당을 지었던 것일까?




제일 좋았던 벨기에 브뤼셀 성당



 여행 막바지 쯤 되니 아름다운 성당들을 볼 때 단순히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왜"라는 질문을 절로 하게 되었다. 왜 이렇게까지 다들, 모든 나라가 일심동체 된 것처럼 성당을 화려하게 지은 것일까? 물론 미형적인 요소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내가 한 달 간 눈으로 직접 본 성당들은 단순히 미형적인 요소 하나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했고 아름다웠다. 물론 그 당시 종교의 타락, 종교인들의 사치 등등 역사적인 이유들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런 것들 말고 분명 또 다른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란 과감한 추측이 들었다. 역사적인 관점을 빼고 두었을 때, 그 시절 사람들이 이토록 지나치게 화려하게 성당을 꾸민 데에는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어쩌면, 간절함이었을까?


 성당에 들어가면 그 순간부터 무언가 다른 것이 느껴진다. 내가 밖에 있었던 저 곳은 내가 여태까지 살던 지구, 그러니까 '현실 세계'로 느껴지고 성당에 들어선 순간 아예 다른 차원에 들어온 것처럼 '신성한 무명의 세계'로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들어간 순간 바깥의 소음은 모두 사라지고 고요하며 저 앞엔 웅장하고 화려한 내부와는 달리 자그마한 십자가의 예수가 보인다. 스테인글라스의 광채는 오색찬란하게 빛나고 성당의 천장은 고개를 한창 올려야 보이며, 심지어는 그 속에도 성경 속 구절을 그대로 갖다 놓은 듯한 그림들이 있고, 고개를 내리면 예수 앞에서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새삼스레 신기했다. 모두 다른 인종, 다른 환경, 다른 언어, 다른 피부색인데도 한 존재 앞에 자그마한 피조물이 되어 각자의 간절함을 기도하는 것이. 그리고 이 풍경은 100년 전, 500년 전에도 똑같았을 것이다. 사후세계를 창조한 신 앞에 선 우리 모두가 같은 피조물이 되어 각자의 아픔을 절절히 읍소하는 것이 문득 신기했고 또 경탄스러웠다. 이토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공간 속에서 인간들은 모순되게도 각자의 슬픔과 고통을 실토하며 더 나은 미래를 이루어달라 간청한다. 전쟁이 나거나 전염병이 돌았을 때엔 더 많은 화려한 성당들이 탄생됐을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 울며 자신들의 고통을 털었으리라 생각하니 어딘가 모순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인간은 늘 죽어가는 존재이다. 우리는 어제보다 더 늙고 하루하루 더 죽음에 가까워진다. 신을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은 각자의 선택이지만 인류는 자신들의 삶에 이러한 희망을 불어넣음으로서 각자의 쉼터를 만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수많은 예술 작품들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인류의 문명적 발전에 기하학적인 도움을 주었다. 나는 무신론자임에도 난생처음 성당에 가서 나도 모르게 나만의 고통을 생각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스쳐 지나갈 수많은 외국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나에겐 조금은 낯선 십자가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지난날 나를 괴롭혔던 고통을 떠올렸다.


그리고 거대한 공간 속에서 시간이 멈춘 듯 십자가에 박혀 조용히 잠들어 있는 '신'을 보니 왜인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위로를 해주는 기분이었다고 해야 할까? 종교를 믿고 그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은 덜어냈던 고대 인류의 DNA가 내게도 있어서인지, 아니면 그저 내가 조금 더 감성적이어서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날 성당에서 꽤 큰 위로를 받았다.


그것이 종교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비록 우리 모두가 이 삶의 엔딩이 죽음이라는 허무한 사실을 알아도 조금은 덜 고통스러운 삶을 위해, 또 먼저 갔던 누군가를 다시 보기 위해, 그야말로 우리의 사랑을 그 어떤 존재에게라도 간절히 간청하기 위해.

매거진의 이전글 그 사람의 몸을 먹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