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혹은 일기
오늘, 아주 오랜만에 엄마 아빠와 외출을 했다.
사촌오빠의 결혼식이 있던 하루, 보통은 엄마 아빠 두 분이 함께 다니시며 '데이트'를 하시는 편인데 오늘은 꽤 오랜만에 가족 외출을 했다. 그것도 내가 생각하기에 꽤 많이 의미 있는 예식장이란 곳으로. 중학생 고등학생 땐 담임선생님의 결혼식에 축하 춤(?)을 하느라고 그때 인생 처음으로 누군가의 결혼식을 구경했었다. 그런데 올해 초엔 사촌언니의 결혼식이 있어 '가족'의 결혼식은 그날 살면서 처음 봤었는데, 어렸을 때 잠깐 경험했던 결혼식의 느낌과는 확연히 달라 신기했었다. 우리 가족의 결혼식은 담임선생님의 결혼식과는 내게 와닿는 느낌이 아주, 너무 달랐다. 그땐 어려서 그랬나? 싶다가도, 이상하게 그땐 그냥 "선생님 오늘 너무 예쁘시다."라는 마음이 다였다면 지금은 그냥 입장하는 양가 부모님과 신랑 신부의 모습만 봐도 눈물이 나는 신기한 경험을 하고 있다. 그것이 특히 어릴 때부터 보았던 사촌언니오빠의 결혼식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 집은 외식을 잘 하지 않는 편이다. 물론 집에서 함께 와인이나 밥을 먹으며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나름 화목한 가족이긴 하지만 다같이 외출을 하는 것이 많은 편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오늘의 경험이 꽤 많이 소중했다. 올해 초 사촌언니의 식장에 갔을 때도 부모님과 오랜만의 외출에 많은 수다를 떨긴 했는데, 왜인지 오늘의 외출이 더 재밌고 소중한 추억으로 남은 것 같다. "아빠는 다시 태어나도 엄마랑 결혼할 거야?"라고 물어봤을 때 동공지진이 일어나며 "왜 그런 걸 물어봐..."하던 아빠의 대답도, "아빤 경험했으니 이번엔 키 큰 남자 한 번 만나볼 건데?"라고 하하 웃으며 말하던 엄마의 대꾸도, 모든 것이 너무나 행복했다.
요즘 아무렇지 않게 부모님과 대화를 하다가도 이런 생각이 든다. 소소하게 엄마 아빠와 수다를 떨거나 다투거나 잔소리를 듣거나 하는 이 모든 순간들은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겠지만, 20년 쯤 뒤엔 아마 너무나 그리워할 하나의 보석 같은 그림으로 여겨질 것이라는 것. 내가 나이가 들어가는 건지, 철이 들어가는 건지, 매일매일 벌어지는 그러한 작고 큰 부모님과의 일들이 특히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오늘은 그런 생각이 유독 더 강렬하게 든 날이었다. 무뚝뚝한 아빠는 애정표현이 가득 넘쳐 아직도 소녀 같은 발랄한 엄마와는 달리 칭찬에도 조금 인색하신 편인데, 오늘 아주 오랜만에 나로 인해 아주 활짝 웃으셨다. 아빠는 말은 하지 않으시지만 식장에 오시면 기분이 많이 환기되시는 것 같다. 오늘도 참 많이 웃으셨고, 내게 좋은 말도 해주셨고, 적극적으로 표현은 하지 않더라도 혼자 아빠 미소 웃참(?)을 하시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셨으니까.
별것 아닌 일상 하나하나가 먼 미래엔 분명 사무치게 그리워할 추억이란 사실을 깨달은 뒤부터, 아빠를 닮아 무뚝뚝한 나는 조금이나마 부모님께 많은 표현을 하려 노력하고 있다. 부모님께 MBTI 테스트를 권유해보기도 하고, 아빠의 본부장 승진이 멋있다고 하기도 하고, 전에는 절대 하지 못했던 감사하단 말까지 하고 있다. 며칠 전엔 엄마의 부탁으로 안방 화장실에서 새치 염색을 해드렸었는데 그때 말로는 그냥 미용실 가서 하지- 했지만, 이제 생각하니 그 순간이 너무나 귀중했다. 간이의자에 앉아 여기도 바르라며 머리카락을 들어주는 엄마와 귀찮다면서도 염색약이 부족할 만큼 꼼꼼히 하얀 새치를 물들였던 나. 그때 말했어야 했는데 차마 무뚝뚝한 성격 탓에 하지 못한 게 있다. 엄마 참 열심히 살았다.
이번 2학기 중간고사 과제는 희곡을 쓰는 것이었다. 그것도 두 과목이나. 그리고 어쩌다 보니 두 과목 모두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됐는데, 그중 한 인물은 교사직을 정년퇴직한 치매 노인이었다. (오늘 글의 배경 사진도 내가 만든 극중 인물의 설명이다.) 그리고 이 인물 설정을 할 때 어쩔 수 없이 엄마 생각이 많이 났다. 우리 엄마는 실제로 20년 넘게 교사를 하고 계시고, 혹여나 나중에 치매에 걸리시는 건 아닐까 염려될 만큼 심하게 뭔가를 깜빡깜빡 잊으시는 편이니까.
내가 설정한 인물은 꽤 불쌍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너무나 현실적이다. 이 인물은 치매 증세가 시작된 뒤부터 자식들에게 유난히 귀찮게 굴기 시작하고 자식들은 그런 제 모친을 무의식적으로 멀리하며 귀찮아 한다. 간병인도 붙여주고 좋은 병원, 좋은 약도 잘 지원해주지만 막상 치매에 걸린 엄마가 전화를 할 때면 묘하게 피한다. 그런데 그 자식들의 성격을 쓸 때 "나라면?"이라는 생각이 특히 강하게 들었다. 누구는 너무나 매정한 자식들이라고 하겠지만, 나는 차마 내가 만든 그 나쁜 아들딸을 비난할 수 없었다. 만약 내 엄마가 치매에 걸린다면 나는 엄마에 대한 걱정도 당연히 하겠지만, 또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리고 나쁘게도, 내 안부에 대한 걱정을 할 것 같았으니.
"엄마의 암 소식을 처음으로 이모에게 전해 들으며 나는 그때 분명히 나의 이기심을 보았다. 암 걸린 엄마 걱정은 나중이고 나는 이제 어떻게 사나… 내 걱정 뿐이었다."
"그러니까, 나 박완은. 그러니까 우리 세상 모든 자식들은 눈물을 흘릴 자격도 없다."
"우리 다, 너무나 염치 없으므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드>에서 주인공은 제 엄마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듣고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럼 내 인생은?" 그리고 자신이 감히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화장실에서 거울을 보며 스스로 제 뺨을 때린다. 참으로 멍청한 장면이지만, 그래서 너무나 내 모습 같은 장면이었다. 만약 우리 엄마가 이 극중 인물처럼 치매에 걸린다면. 시도때도 없이 보고 싶다며 전화를 하고 나 보고 어디있냐며 칭얼댄다면. 20년 전 5살이었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엄마도 5살의 00이가 되어 내게 뭔가를 조른다면. 그 조른다는 게, "보고 싶으니 얼른 와줘"라면. 과연 100% 진심을 다해,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엄마의 모든 부탁을 들어주며 오로지 엄마의 인생만을 걱정할 수 있을까.
그러나 참으로 잔인하게도, 가슴에 손을 얹어 생각했을 때 어쩌면 나 또한 이 노인의 자식들처럼 무의식적으로 그런 엄마를 피하거나 귀찮아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해서, 나는 지금 내가 만든 인물 덕에 이 시간을 빌어 한 번 깊게 사유해보게 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엄마가 5살 아이가 된다면 나는 모든 것들을 사랑이라는 감정 하나로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도 그때가 되면 <디어 마이 프렌드>의 박완처럼 스스로 내 뺨을 때릴지 모른다. 울 자격도, 힘들어할 자격도 없는데 엄마에게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가 싶어서. 엄마는 운이 나빠서, 혹은 운이 좋아서 다시 어려진 것 뿐인데. 엄마는 그대로 늘 나의 엄마일 뿐인데 말이다.
왜 사람은 꼭 순간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고 후회할까?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매일매일 일어나는 일이기에 아무렇지 않은 내 삶의 별것 아닌 한 장면으로 넘기는 것일 테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일상은 지금 당장 내 곁에 있는 누군가에겐 너무나 갖고 싶은 부러운 보석 같은 무엇일 수도 있고, 멀리 가지 않아 10년 뒤의 내가 부러워할 순간일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미래의 내가.
엄마의 새치를 검게 물들이던 날 엄마가 한 말이 떠오른다. 자기는 새치가 빨리 그리고 많이 자라는 편이라 꼭 주기적으로 계속 염색을 해줘야 한다고. 그래야 조금이라도 젊어보인다고. 그때 그러려니하고 넘어가는 척을 했던 것이 문득 후회가 된다. 그때 하지 못한 말을 여기에나마 적어본다. 하얀 머리를 검게 물들이지 않아도 엄마는 결국 늘 나의 '엄마'로 남아있을 테니까, 남들 눈엔 젊어 보이지 않아도 엄마의 새치 속 드러난 그 모든 젊음과 삶의 귀중한 순간을 나는 아주 잘 아니까,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그날 미용실에 가지 않고 굳이 내게 새치 염색을 부탁해주셔서 참 고맙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언젠가, 20년 뒤의 내가 사무치게 그리워할 선물 같은 순간을 선사해준 엄마가 참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