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희 May 03. 2024

내 자취방 이곳저곳의 신神

치킨에 피어난 곰팡이





 요즈음 자취를 하며 하나 깨달은 점이 있다. 

 첫 번째, 나는 생각보다 깔끔한 사람이었다는 것, 두 번째, 나는 생각보다 더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것, 세 번째, 나는 생각보다 비위가 약하다는 것. 요즘 특히 극대화되어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세 번째 사항이다. 20살 때 첫 번째 자취를 했었는데, 그때는 효율적인 것이고 뭐고를 다 떠나 음식물이 썩은 것을 보기가 싫어 무작정 음식물 쓰레기를 냉동실에 보관했었다. 잘만 보관하면 냉동실에 세균이 번지지도 않고 무엇보다 냄새가 나거나 썩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음식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번 자취는 달랐다. 무엇보다 음식물을 꽉꽉 채워 효율적으로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싶었고, 돈도 아끼고 싶었다. 해서 나는 이번에 진공 음식물 쓰레기통을 사서 늘 실온에 두며 음식물 쓰레기 봉투를 잘 활용해보리라 결심했다. 


 자취 한 달 차. 다행히 어리숙하게 진공을 하여 대량의 초파리떼가 탄생되었다거나 집안에 썩은내가 나는 사건들은 없었다. 그런데 한 가지 느낀 건, 내가 곰팡이를 극도로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정확히는 음식물에 피어난 곰팡이 말이다. 언제 한 번 학교 동기가 집에 놀러와 함께 치킨을 시켜 먹은 적이 있었다. 남은 치킨은 냉장고에 보관하다가 먹는 것을 까먹어 곧장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그날 저녁 통을 열어보니 노란 후라이드 치킨 위로 하얀 곰팡이가 피어나 있었다. 진공을 제대로 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고작 곰팡이일 뿐인데 그 장면은 내 머릿속에 아주 깊은 충격을 주었다. 그때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난 왜 이리도 음식에 피어난 곰팡이를 싫어하는 걸까? 아니, 난 단순히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가 맛있게 먹었던,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감히 곰팡이라는 것이 피어난 것이 왜인지 그 맛까지 느껴지는 것 같아 굉장히 비위가 상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저 내 집이라는 나의 공간에 또 다른 무언가가 공존한다는, 그 생명의 존재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같다. 이번 집은 이사를 오자마자 쌀 나방이 보였는데 내 예상으로는 전 세대주가 쌀 관리를 잘 못했거나, 아니면 옵션인 화장대나 옷장 아래에 나방들이 자리를 잡은 것 같았다. 집에만 오면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미어캣처럼 두리번거리며 집의 천장, 벽지를 살펴보고 아무것도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대부분의 인간들은 제 영역에 대한 본능의 진화적 산물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신의 집에 벌레든 사람이든 곰팡이든 침입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나에게 나방은 이것처럼 '내 영역의 침입범'으로 느껴져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곰팡이는 그와 별개의 두려움으로 느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가만 방심하면 콘크리트 벽이든 사람이 지배한 공간이든 뭐든 간에 어느 곳에서나 무섭게도 자연이 정복할 수 있다는, 작은 인간으로서 곰팡이의 그 막대한 생명력에 작아져 느끼는 두려움인 것 같은 느낌이다. 벌레는 살아있는 그 자체, 나와 같은 '생명체'이지만 곰팡이는 그와는 다른 개념이지 않은가. 그것은 식물에도 포함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는 식물조차 큰 것은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만약 내 집안에 곰팡이가 아니라 커다란 식물이 어느날 자라난다면, 그조차 나는 매우 두려워했을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현상이다. 내 집안에 무언가가 침범하여 느끼는 본능적인 경계심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이 마구잡이로 뻗쳐나갈 수 있는 대자연에 대한 두려움이라니. 잘 생각해보니 어쩌면 이것은 나에 대한 항변일 수도 있겠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아니라, 콘크리트가 아니라, 자신들의 것으로 가득했어야 할 공간을 내가 침입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말이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이 이상한 감정은 대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나의 오만함인 것 같다. 곰팡이와 식물, 곤충들은 지구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하물며 하룻밤에 100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호텔 어디에서도 초파리 한 마리쯤은 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은 간절할 수밖에 없겠다.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들이 살 수 있는 곳들은 줄어가고, 인간은 넘쳐나니 제 생명력들을 무지막지하게 키울 수밖에. 고로 자신들이 살 수 있는 곳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줄기를 뻗쳐나가야만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두려움일까? 만약 이 공간에 사람이 계속해서 살지 않는다면, 곰팡이와 식물과 곤충들은 기다렸다는 듯 이곳을 정복할 테니. 나는 그런 것들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한때 호화로움의 상징이었던 타이타닉호가 침몰해 저 바다 밑으로 떨어져 온갖 해양 생물들의 터전이 되는 그런 것들 말이다. 이런 것을 보면 나는 아직 '겸손한 인간'이 되기는 먼 듯하다. 나 또한 결국 타이타닉호가 되어 미생물들의 터전이 되어줄 것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모르는 척하며 그저 두려워하는데 그것을 대자연의 시선으로 보자면 얼마나 우스워 보이겠는가. 


 나는 신을 믿지도, 믿지 않지도 않는다. 나이를 먹을 수록 신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음식물 쓰레기통에 가끔 피어나는 곰팡이가 그런 나의 생각을 환기시키는 것 같다. 맞다. 고작 곰팡이 따위가. 요즘은 조금만 방심하면 내 음식물 쓰레기통 이곳저곳을 향해 항변의 소리를 내질러대는 곰팡이를 보자면, 신은 그야말로 이 막대한 생명력 그 자체가 아닐까 싶다. 치킨에 피어난 흰 곰팡이, 내 집에 쳐들어온 곤충, 보도블록 사이를 비집고도 피어나는 잡초들 그 모든 것들 말이다. 그렇게 작은 식물, 곰팡이, 미생물들의 삶일지라도 어떻게 해서라도 살고자 하는 그들의 생명력 그 자체를 신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음식물에 피어난 곰팡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하나 부디 내가, 아니 나라는 인간이, 본래는 이것의 터전이었던 공간에 산다는 것을 늘 알고 있었으면 한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이 신의 선물이라면 그들의 푸르고 냄새나는 생명력 또한 신의 손길 아닐까. 작은 곰팡이라는 막대한 생명력 앞에서 내가 조금은 더 겸손한 인간이 되어가길 간절히 바라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백합 다섯 마리를 죽이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