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희 Oct 30. 2024

26살에서야 아빠에게 쓰는 첫 편지




첨부한 사진은 왜인지 아빠를 닮은 꽃

아빠는 무뚝뚝하고 까만 피부에 주름도 자글자글하지만 이상하게 무채색보다는 노란색이 어울린다.

내가 아빠를 사랑하는 건 분명한 것 같다.








 - 아빠에게!



 내가 이다지도 무던한 무쇠를 닮은 이유는 아빠를 닮아서예요.

 마지막으로 썼던 편지가 까마득해서 말로 이것들을 다 말하자니 난처해서 글로나마 편지를 씁니다. 웃는 얼굴도, 습관도, 취향도, 체형도, 선호하지 않는 것까지 아빠와 동일한 나는 왜인지 커갈수록 엄마보다는 아빠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릴 땐 아빠의 많은 부분들을 이해하지 못해서 간절히도 발랄한 성격의 엄마를 닮고 싶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부모님 중 한 분을 선택해 그 분의 무언가를 우선 바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욕심임을 깨닫고 있어요. 아빠가 왜 그리도 마루를 입양하는 것에 반대했는지, 왜 종종 내 문을 열고 나를 슥 바라봤는지, 왜 음악과 영화를 사랑하는지도 깨닫고 있어요.

 어릴 땐 참 싫었던 아빠의 몇몇 순간들이 커갈수록 이해가 됐고, 그게 곧 내 모습으로 되었고, 그런 나를 보고 가끔씩 놀라요. 잔정이 없어서 딸에게도 냉철히 아닌 것 아니라고 말하는 아빠가 정말 미웠는데 사회생활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정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이 돼 있었어요. 세상의 뾰족한 모서리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내 안에 새겨진 dna가 어쩔 수 없이 나를 아빠의 형태로 만들어지도록 유도하는 건지는 알 수가 없네요.


 무던한 무쇠 같은 아빠,

 사랑한다는 말을 술에 잔뜩 취해서도 하지 못하는 아빠,

 잔정 하나 없는 아빠,

 여전히 엄마와 데이트를 하고 여행을 가는 아빠,

 어릴 때 내 칭얼거림 받아준 적 없던 아빠,


 그런데 5살 때 내가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다 잠들면 공주님 안기로 들어서 내 방 침대로 데려다주고 목젖까지 이불을 덮어준 기억은 몇 번이고 납니다. 가끔은 깨있는 상태인데도 자는 척하면서 아빠한테 안겨서 침대에 눕혀졌어요. 아빠가 나를 안고 침대에 눕혀주는 게 아기 취급 받는 것 같아서 좋았거든요. 공주님 안기는 5살 때부터 10살인가, 내 키가 어느 정도 커지기 전까지 이어졌던 것 같아요. 할머니가 되어서도 나는 종종 그때 생각을 하면서 목젖까지 이불을 덮겠죠. 무쇠 같은 아빠가 입 밖으로 뱉지 못하는 한 움큼의 감정들을 이불로나마 내 몸에 덮으면서.


 사랑한다는 말은 나도 아직 어렵고, 여전히 아빠가 미워요. 나는 가끔 엄마아빠한테 아직도 애인 것처럼 ‘나 힘들었어 안아줘!’ 라고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요. 내 마지막 어리광의 기억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전학을 가서 친구들이 아무도 나랑 놀아주지 않을 때였는데, 가끔 그때 더 칭얼거릴 걸 후회하기도 해요. 왜인지 나는 지금 남자친구를 사귀어도 애교나 어리광 쉽게 부리지 못하고 ‘계속 이해하고 참다가 차이는’ 사람이 됐어요. 원인은 당연히 나한테 있겠지만 사실 나는 아직도 아빠에게 이런 것들을 원망해요. 내가 조금 더 칭얼거릴 수 있도록 해주지. 엄마보다 나를 한 번 더 생각해주지. 내가 어리광이라는 것에 익숙해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주지.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 대신 이해한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아빠의 무쇠 같은 성격을 똑같이 닮아서, 왜 아빠가 늘 술 마실 때만 내게 말을 거셨는지 이제 서서히 알게 되고 있거든요. 아빠를 미워하지만 나는 누가 봐도 아빠 딸이에요. 그래서, 이해합니다. 아버지를 이해해요. 나도 자식을 낳으면 그럴 것 같으니까. 다만 아빠는 최선을 다 했어요. 그게 답니다. 이제 서서히 아빠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 아빠를 향한 이 미움도 조금 작아지겠죠? 그러다 사라지겠죠? 그러다 보면 갑자기 불현 듯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지겠죠? 노력해볼게요. 그때까지 나도 열심히 아빠를 이해할게요. 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마워.






2024년도 10월 밤에!

언젠가 이 편지를 아빠 선물에 구깃구깃 숨겨 부칠 수 있기를!







                    

매거진의 이전글 치사해, 하지만 훌륭해 : <조커2, 폴리아되>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