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30 아름다운 목요일 피아니스트의 노트 - 문지영
프로그램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1797 - 1828)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독일 춤곡, D.790
Zwölf Ländler für das Pianoforte, D.790/Op.171 (1823)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즉흥곡, D.899
Vier Impromptus für das Pianoforte, D.899/Op.90 (1827)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왈츠, D.145
Zwölf Walzer für das Pianoforte, D.145/Op.18 (1821)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즉흥곡, D.935
Vier Impromptus für das Pianoforte, D.935/Op.142 (1827)
인터미션 후 2부의 첫 곡으로는 12개의 왈츠, D.145가 연주되었다. 16개의 랜틀러와 9개의 에코세즈(Ecossaise; 스코틀랜드 민속춤 및 춤곡)와 함께 슈베르트의 생전에 Op.18으로 출판되었다.
첫 곡인 12개의 랜틀러에 비해 이 곡들은 당대에도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었는지, 작곡가이자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던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 - 1886)는 이 곡들 중 일부를 인용해 <빈의 저녁들, S.427>이라는 제목으로 독주회용 편곡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슈베르트의 여러 가곡을 피아노 독주를 위해 편곡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공연의 첫 프로그램이었던 랜틀러(Ländler) 세트와 비슷한 맥락으로 선곡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1편에서 언급했듯 왈츠와 랜틀러는 그 근본이 서로 같은데 단 한 가지 차이점이 바로 템포이다.
특히 슈베르트가 이 곡을 작곡한 당시는 왈츠와 랜틀러가 공존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슈베르트가 굳이 랜틀러와 왈츠를 구분해서 작곡하고 출판했다는 점에서 미루어 봤을 때 이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음에는 분명하고, 그것이 바로 템포였다는 것이다.
Grove Music Dictionary에 따르면:
In fact the Ländler is a homely waltz, and only differs from the waltz in being danced more slowly.
이처럼 오직 템포에 있어서만 그 차이를 두고, 리듬이나 여타 다른 음악적인 특징들에서는 뚜렷한 구분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한 무대에 랜틀러와 왈츠를 동시에 올린다고 했을 때, 템포를 통해 이들을 구분하는 것이 거의 필수적이었다는 지적이 불가피하다.
랜틀러만 연주하거나, 왈츠만 연주하면 이런 특징이 비교적 덜 중요하겠지만 둘을 같은 무대에 올린다면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한 세트 안에서 분위기에 따라 곡마다 약간의 템포 변화를 주는 것이야 문제는 없겠지만, 전체적으로 비교적 느린 템포의 랜틀러와 비교했을 때 왈츠는 확실히 빠른 템포로 연주되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맥락을 살려주는 것이 이제는 당연한 것이 아닌 시대가 되었다.
대부분의 현대 연주자들은 이런 역사적인 맥락을 모두 알고 연주하기 힘들고, 특히 랜틀러와 왈츠의 차이 같은 것은 교수자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으니 놀라울 것이 없다. 오히려 이런 것을 알고 연주에 반영하는 연주자들에게 박수를 쳐 주어야 할 지경이다.
그렇다고 이 왈츠 세트를 문지영 씨가 연주했던 것보다 빠르게 연주하기도 여러 난점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마지막 곡의 셋잇단음표 화음 연타를 왈츠의 빠른 템포 내에서 인 템포(in tempo)로 구현하기에 슈베르트 시대의 그라프(Graf) 포르테피아노보다 훨씬 건반이 무거운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명료하게 연주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많은 대가들도 이 곡을 연주하면 음이 씹히거나 이 부분에서 갑자기 느려지는 그런 일이 종종 있다. 이 곡을 현대 피아노로 연주하는 이상 엄청난 연타 테크닉을 지닌 연주자가 아니라면 극복하기 힘든 것이므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연주자는 자신이 연주할 수 있는 최선의 템포를 찾아 연주해야 하고, 이렇게 여러 곡이 묶인 경우나 곡이 길 경우에는 극단적으로 한 곡이나 한 부분의 템포에 나머지 곡을 맞춰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 부분의 테크닉이 매우 까다롭거나 하는 이유로 템포의 한계가 정해지면, 전체적인 벨런스의 측면에서 다른 부분들의 템포가 어느 정도 결정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에 타협하는 것이 사실 바람직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현실적인 면에서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다.
나도 왈츠의 템포에 대해서는 별다른 불만이 없고, 다만 랜틀러를 좀 더 여유 있는 템포로 가져갔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추가로 왈츠인데 너무 딱딱하게 연주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흔히 빈 왈츠 하면 떠올리는 리듬이 있는데 이 리듬의 특징이 두 번째 박을 살짝 첫 박 쪽으로 붙여서 살짝 빠르게 연주한다는 것이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한 번 들어보는 것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자타공인 전 세계에서 빈 왈츠를 가장 잘 연주하는 빈 필하모니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연주를 들어보자.
사실 댄서들 말을 들어보면 이런 변칙적인 리듬보다는 정박에 딱딱 맞게 3박자 주는 것이 박자 맞추어 춤을 추기에도 더 쉽다지만, 그럼 음악도, 춤도 아무런 재미가 없고 무엇보다 이 빈 왈츠 특유의 고풍스럽고 우아하면서 가벼운 느낌이 살지 않는다.
이 리듬이 빈 왈츠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게 없으면 빈 왈츠로 들리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방금 소개한 요한 슈트라우스 일가가 활동하던 시기나 그 이후에 작곡된 곡들은 확실히 빈 왈츠라고 인식하는 반면, 그 이전인 슈베르트나 베버 등의 왈츠는 명확하게 빈 왈츠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나 엄연히 이들도 빈 왈츠이고, 슈트라우스 왈츠의 원류이다.
오스트리아와 독일이 서로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문화권에 놓여 있긴 하지만, 분명히 남부 독일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북부 독일은 말의 억양도 다르고 사람들의 성정도 조금 차이가 있다.
이번 왈츠 연주는, 한 마디로 너무 독일적이었다. 빈의 정취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빈 왈츠를 너무 어둡고 무표정하게 연주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왈츠 연주할 때는 조금 풀어줘도 될 법했는데 공연 전체의 메시지를 고수하고자 빈 왈츠를 희생시킨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오히려 이 곡에서 조금이라도 밝고 가벼운 분위기로 갔다면 마지막 프로그램인 D.935의 비극적인 마무리가 더 부각되었을 수도 있고, 사실 문지영 씨가 묘사하려고 했던 슈베르트의 감정이 꼭 고통스러운 방향으로만 묘사되어야만 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가 남긴 마지막 3개의 피아노 소나타들, 특히 D.960의 4악장 같은 것들을 들어보면 죽음에 대해 차이콥스키나 말러와 달리 마지막까지 눈물을 짜내며 마냥 슬프게만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가 평생 존경했던 베토벤이 남긴 마지막 완성작인 Op.130의 새 6악장에서 보여줬던 것처럼 유쾌하고 해학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이는 작곡가의 심정을 표현하는 것도 그의 복잡한 심경을 좀 더 깊이 있게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 중 하나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슈베르트 본인이 아닌 주변인, 타인의 입장에서는 공감하기 힘든 감정이겠지만, 그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일견 이해가 될지도 모르겠다.
이 곡 또한 12곡으로 구성된 모음곡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조성 구조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이전에 랜틀러의 조성 구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했었는데, 그 곡은 조성 구조가 도통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그랬다.
그러나 이 곡의 경우에는 슈베르트의 의도가 아주 투명하게 잘 보인다. 슈베르트 생전에 작품번호 18번으로 출판되었는데 랜틀러는 사후 출판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에서 기인한 것인가 생각했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고 이 곡의 구조가 좀 더 고전적인 틀 안에서 분석되기에 용이하기도 하고, 작곡가가 조성의 큰 흐름을 이 곡에서 더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 보였기 때문에 더 쉽게 찾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곡의 경우 조성의 흐름을 분석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한 곡에서 시작할 때의 조성과 마칠 때의 조성이 다른 경우가 있어 이런 부분을 잘 고려해서 분석해야 한다. 예컨대 5번의 경우 마단조로 시작한 곡이 전혀 다른 조성인 사장조로 끝난다.
단조에서 같은 으뜸음을 가지는 장조로 마치는 것은 예전 르네상스 시대부터 사용되던 피카르디 종지(Picardy cadence)로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 이렇게 완전 다른 조성으로 전이해서 종지하는 것은 분명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이 12곡이 각각 작곡될 때부터 이러한 세트를 염두에 두고 작곡되었거나, 최소한 어떠한 조성적 구조를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음을 시사하는 증거 중 하나이다.
사실 이게 전부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었겠지만 이렇게 곡 중간에 전조한 조성이 다음 곡의 조성과의 체계적인 관계 하에 놓여있다는 점이 관찰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각 곡의 조성을 위에서 언급한 조성 변화까지 고려하여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번: 마장조(E major)
2번: 나장조(B major)
---------------------------------------------
3번: 가단조(a minor) - 가장조(A major)
4번: 올림다단조(c sharp minor)
5번: 마단조(e minor) - 사장조(G major)
6번: 나단조(b minor) - 나장조(B major)
7번: 내림마장조(E flat major)
8번: 내림마단조(e flat minor) - 내림사장조(G flat major)
9번: 올림바단조(f sharp minor)
---------------------------------------------
10번: 나단조(b minor)
11번: 나장조(B major)
12번: 마장조(E major)
이제 이렇게 세 그룹으로 나눠 놓은 이유를 말해보겠다.
먼저 2번의 경우 1번, 나아가 전체 곡의 중심 조성인 마장조의 도미넌트(Dominant)인 나장조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서 11번과 12번을 보면 다시 나장조에서 마장조로 돌아오면서 하나의 사이클을 만들고 끝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으뜸음을 공유하는 나단조의 10번도 하나로 묶게 되었다.
쉽게 말해 집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갔다가 그 문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중간 부분인데, 3번부터 9번까지의 조성들은 같은으뜸음조 간의 장단조 전환을 제외하면, 모든 조성 변화가 3도 위로 변화하는 방향으로 일어나는 매우 규칙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3번의 a부터 일렬로 쭉 써보면 다음과 같다: (대문자는 장조, 소문자는 단조. 한 곡 내에서의 조성 변화는 괄호로 묶어 표현)
(a - A) - c# - (e - G) - (b - B) - Eb - (eb - Gb) - f#
장3도 위로 가는지, 단3도 위로 가는지는 규칙적이지 않은데 어찌 됐건 이러한 패턴을 가졌다는 것은 아래의 나열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장단조 전환을 제외하고 으뜸음만 표기한 것이다.
A - C# - E - G - B - Eb - Gb(F#)
그럼 왜 F sharp, 또는 G flat에서 이 연쇄적인 진행을 멈추었는가? 그것은 마지막 조성인 f sharp minor를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번 더 3도 위 조성으로 전이하게 되면, 이 3도 사이클의 첫 시작이었던 A로 돌아오게 된다. 물론 장3도 위로 갈 수도 있지만 이때 도달하게 되는 조성인 A sharp 또는 B flat은 원 조성에서 너무 멀어지기 때문에 다시 원 조성으로 돌아오는 데 또 많은 과정을 요구하므로 피한 것 같다.
결국 F#가 하나의 작은 사이클을 마무리하기에 최적의 위치였던 것이다.
여기서 A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그 자체로 하나의 완전한 사이클이 돼버리므로 이는 전체 구조를 약화시킨다. 다시 중심 조성인 마장조로 돌아가고자 하는 에너지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포인트에서 3도 사이클을 마무리하지 않고 살짝 열어둔 채 전체 곡의 사이클로 이어 마무리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설명이 된다. 원 조성인 1번의 토닉(Tonic)에서 출발해 2번의 도미넌트로 문을 열어주고 3번부터 9번까지의 서브도미넌트(Subdominant; 도미넌트를 수식), 또는 Secondary Dominant 사이클을 지난 후 그것이 10번과 11번의 도미넌트로 이어져 마지막 곡 12번에서 토닉으로 돌아오는, 완전한 사이클을 이루게 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다른 진행들은 모두 기능적으로 해석이 가능한데, 2번의 나장조에서 3번의 가단조로의 전이는 기능적으로도 도미넌트에서 서브도미넌트 계열의 조성으로 전이되는 굉장한 변격 진행(Plagal Progression)이 된다. 서브도미넌트는 도미넌트로 가려는 성질이 강한데 그 반대의 진행이 보이는 것이다.
다른 어떤 식으로 해석해보려 해도 억지스러운 해석이 될 뿐이니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슈베르트가 이러한 변격 진행을 의도 내지는 인지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2번과 3번 사이에는 굉장한 셈여림과 텍스처(texture)의 대비가 이루어지는데, 2번은 전체적인 셈여림이 피아노(piano)로 일관된 반면 3번은 포르티시모(fortissimo)의 옥타브 더블링으로 시작하면서 청자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화성 진행과 다른 여러 음악적 요소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뉘앙스이기 때문에 그저 성실하게 연주에 반영해주면 된다는 뜻이다.
추가로 한 가지 재밌는 것은, 굳이 곡 중간에 조성을 바꾸지 않아도 곡의 개수는 조성의 개수인 9개와 동일하게 유지된다는 것이다.
굳이 조성을 바꾸지 않아도 완성되는 사이클을 슈베르트가 몇몇 곡에서 의도적으로 한 곡 안에서 다른 조성으로 전조한 채 마무리한 것이다.
이는 이 전체 세트에서 슈베르트가 개별 곡 하나하나보다 전체 흐름을 중시했다는 것을 말한다.
다른 조성으로 전조한 채 곡을 마무리하면 그 자체의 완결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종지감이 강하지 않아 머무르지 않고 계속 진행하고자 하는 성질을 가지게 되고, 이는 개별 곡의 특성을 살리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전체 사이클의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위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이러한 구조를 어떻게 살려서 연주해야 하는가?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나는 두 번의 구조적 경계를 약간의 휴지로써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뒤쪽 경계인 9번과 10번의 사이는 음악적 경계가 셈여림이나 텍스쳐 등으로 뚜렷하게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다만 원래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정격 진행(Authentic Progression)이라서 굳이 경계를 표현해주어야 하냐는 물음이 생길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서브도미넌트의 사이클이 있음을 분명히 드러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하는 것이 좋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앞서 언급했던 2번과 3번의 경계 또한, 중간에 휴지를 두게 될 경우 깜짝 놀라게 하는 그 잠깐의 음악적 효과는 줄어들 수 있어도 음악의 전체 구조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그것을 드러내 주는 것이 상위의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전부 다 이어서 연주하는 해석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연주자 개인의 선택이다. 다만 이 두 경계 외에 다른 포인트에서 상대적으로 긴 휴지를 주거나 의도가 보이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자기 마음대로 그냥 한 템포 쉬고 싶을 때 쉬고, 이런 것은 분명히 잘못된 방향이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연주였지만, 앞서 언급했듯 첫 무대였던 랜틀러와의 구분이 여러모로 아쉬운 무대였다.
만일 이 둘을 동질적인 세트로 인식해서 일부러 비슷한 느낌으로 연주한 것이라면 일정 부분 이해가 되면서도, 여전히 왈츠는 랜틀러같이, 랜틀러는 왈츠같이 연주된 것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물론 이어서 연주된 즉흥곡 연주를 들으면서 이러한 의문은 모두 잊혔지만 말이다.
본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으로 즉흥곡 D.935가 연주되었다.
전에 작곡된 D.899와 비교했을 때 작곡 시기가 불과 몇 달밖에 차이 나지 않기 때문에 기법상으로 큰 변화는 없지만 좀 더 원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프로그램북에도 적혀 있었는데 슈만이 이 곡을 소나타와 유사한 구조를 지녔음을 지적한 바 있다. 마치 소나타의 1, 2, 3, 4악장과 같다는 것이다.
이전에 연주된 D.899와 달리 마지막 곡인 4번에서 1번의 조성인 바단조로 돌아오는 것도 소나타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좀 더 뚜렷하게 순환하는 구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좀 더 고전적인데, 그렇다고 이 곡들의 구성이 전형적인 소나타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먼저 일반적인 소나타의 구조에 대입해보았을 때 첫 곡은 소나타 형식이 와야 하고, 조성 구조 상 2주제부에 해당하는 B파트가 다시 재현될 때 원 조성인 바단조의 같은으뜸음조인 바장조로 오는 소나타 형식의 조성 관계를 나타내기 때문에 전개부(발전부)가 생략된 소나타 형식으로 분석이 가능하다.
그렇지만 전개부가 생략된 소나타 형식이 슈베르트의 곡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형식이 아니라서 이에 대한 반론도 많은 편이다. 그렇게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2부 형식이라고 보아도 문제는 없다.
그리고 2번과 3번은 각각 트리오가 딸린 3박자의 미뉴에트 또는 춤곡 악장과 느리고 서정적인 완서 악장으로 볼 수 있다.
4번도 굳이 따지자면 A - B - A'에 코다가 붙은 3부 형식으로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 소나타에서는 일반적으로 소나타 형식이나 론도로 곡을 마무리하는 편이므로 소나타의 공식에 대입해서 볼 경우에는 일반적이지 않은 선택이다.
혹자는 이 곡을 론도로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시도하기도 하지만 반복구(refrain)가 여러 번 반복되지도 않는 형식을 론도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성이 떨어진다.
이런 여러 문제들로 인해 일반적인 소나타의 틀 안에서 이 곡을 끼워 맞추려고 시도하는 것은 다소 의미 없어 보이고, 소나타의 구조에서 영감을 받아 이 곡의 구조를 설계했다는 정도로 마무리지으면 되겠다.
1번은 바단조의 곡으로, A - B - C - A' - B' - C' - 코다의 2부 형식, 또는 전개부가 생략된 소나타 형식 정도로 분석할 수 있다.
슈베르트는 이 비슷한 형식을 사실 D.899의 1번에서도 사용했는데, 이번에는 C파트가 추가되어 그보다 좀 더 확장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바단조라는 조성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슈베르트는 같은 조성으로 그 유명한 <네 손을 위한 피아노 환상곡, D.940>을 남겼으며 그 이전에는 베토벤이 그의 가장 유명한 피아노 소나타 중 하나인 <피아노 소나타 23번, Op.57>을 바단조로 썼고, 슈베르트의 후대에는 쇼팽의 <발라드 4번, Op.52>이 이 조성의 피아노 곡으로 가장 먼저 떠오른다.
베토벤의 소나타, 쇼팽의 발라드와 이 곡은 어떤 측면에서 공통적인 전개를 가지는데, 단조 곡들에서 으레 기대하게 되는 희망적인 마무리는 찾을 수 없고, 폭발적이고 자기 파멸적인 거대한 에너지, 강력한 운명의 힘이 모든 것을 비극적인 결말로 이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가 베토벤의 영향을 받았을 것도 같고, 쇼팽도 슈베르트와 베토벤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강력한 에너지가 지배하고 있는 바단조의 1번, 4번과 달리 2번과 3번은 사뭇 다른 분위기를 가진다. 1악장과 4악장 간의 강력한 링크가 있기 때문에 전체적인 그림보다 어쩌면 대립하는 두 그룹의 대비에 더욱 신경을 쏟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1번은 4악장에서 터지는 에너지를 모두 분출하지 않고 아끼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이 응축된 내적 에너지를 잘 절제해서 표현하되 터뜨릴 때는 터뜨려 주는 것이 바람직한 해석 방향일 듯하다.
첫 주제는 끝없이 하강하는 모티브의 연속으로, 무엇보다 그 일관적인 방향성이 중요해서 악보에 표시되어 있듯 하나의 프레이즈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
토닉인 F로 베이스가 묶여 토닉 페달 포인트(Tonic pedal point)를 형성하고 있는 화성적 맥락도 이러한 뉘앙스를 도와주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점점 축적되는 에너지가 마지막의 스포르잔도 코드에서 터지는 흐름이 무엇보다 뚜렷하게 들려야 한다.
연주자의 표현은 훌륭했다. 곡의 첫머리인만큼 과하지도 않으면서 방향성은 확실하게 표현해주었다. 템포 설정도 너무 빠르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은, Allegro moderato 그 자체였다.
이 주제가 살짝 변형되어 한 번 반복되고, 이어 소나타의 1주제와 2주제 사이를 잇는 경과부와 같은 부분이 나온다. 더욱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은 이 경과구의 모티브가 다름 아닌 2주제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든이나 베토벤 등의 고전 소나타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는 맥락인데, 이 곡을 전작인 D.899보다 더욱 고전적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 부분에서 프레이징에 관한 문제가 많은데, 오른손의 선율이 16분음표의 아르페지오로 쪼개져 있지만 사실 이들은 하나의 화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화성적인 맥락에 따라 프레이즈를 잘 구분해 주어야 한다.
악보에 표기된 긴 슬러는 큰 단위의 호흡을 의미하는 것에 가깝고, 실제로 이들을 한 프레이즈로 레가토하는 것은 내재된 맥락을 읽지 못했다는 것과 다름없다.
먼저 22마디를 보면 코드가 아래에 표시해둔 것처럼 묶이게 되는데 이를 한 프레이즈로 연결하거나 반 마디씩 묶기보다는 화성 맥락을 고려하여 아래와 같이 프레이징하는 것이 옳다.
또한 그다음 26~27마디에서는 내성과 외성을 명확히 구분해서 연주해야 한다.
잘 보면 알토 성부와 테너 성부가 서로 같은 라인을 연주하도록 더블링 되어 있는데 많은 연주자들이 소프라노와 음역이 겹친다는 이유로 아래 슬러 표기된 Ab - Db 부분을 이어서 연주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는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주의하지 않으면 이렇게 들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유념해서 연주해야 한다.
아르페지오로 펼쳐놓은 음들을 축약하여 기보해 놓은 아래 악보를 보면 더욱 명확하게 성부 진행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아래 패시지들은 오른손 아르페지오 선율과 코드는 같은데 왼손의 반주 음형이 바뀌는 경우이다.
유의할 것은 단순히 반주 음형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나올 때는 당김음(싱코페이션; syncopation)으로 인해 약박에 강세가 실리게 되는데, 이럴 경우 프레이징이 표시해둔 것처럼 왼손을 따라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슈베르트가 앞에서 동일한 부분에 대해 아래와 같이 연주하라고 지시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연주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화성적으로 각 프레이즈의 첫 두 음이 비화성음이 되어 해당 화음에 포함된 화성음으로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 해결이 바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다음 박에서, 그러니까 4번째, 5번째 음으로 각각 해결되기 때문에 이것이 해결되는 뉘앙스를 살려주기 위해서는 이 음들이 반드시 한 프레이즈로 연결이 되어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 자연스럽게 첫 두 음에 화성적 긴장이 생기게 되어 악보에 표기된 것처럼 악센트가 발생하는 것이다.
아래 화성만 간추린 악보를 통해 보면 더욱 잘 보일 것이다.
문지영 씨 같은 경우 악보 그대로 정직하게 읽는 스타일이기에 프레이징을 틀리는 일은 거의 없었다. 모든 부분들에서 오류 없이 명쾌한 해석을 보여주었다.
여담으로 위에 첨부한 31마디의 부점 리듬을 그냥 얼버무리며 정확하게 연주하지 않는 경우가 대가들의 연주에서도 종종 들리는데, 문지영 씨는 굉장히 칼 같은 리듬으로 연주해서 아주 만족스러웠다.
사실 리듬은 가장 지적하기가 쉬운 편이기 때문에 오히려 젊은 학생들이 레슨을 받으면서 지속적으로 지적을 받는 부분인 탓에 더 정확하게 연주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곤 한다.
베토벤 소나타 얘기가 나왔으니 여담으로 하는 말인데 이 23번 소나타의 1악장 주제 리듬도 상당히 까다로워서 정확하게 연주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사실 이런 부분은 실제 리듬의 정확성보다도 그 뉘앙스를 살리는 것이 더 중요한 법이고, 이 뉘앙스마저도 리듬이 중요한 춤곡 같은 곡이 아니라면 본질과는 거리가 있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까다로운 리듬을 기가 막히게 잘 살려주면 연주의 완성도도 올라가고 들을 때도 만족감이 생긴다.
물론 이것은 당연히 기본적인 부분들이 다 갖춰졌을 때의 이야기이고, 다른 훨씬 중요한 요소들이 많다. 문지영 씨의 경우도 기본적인 사항들을 훌륭하게 잘 해내면서 이런 리듬을 탁월하게 잘 연주하니 한층 더 좋은 연주가 된 것이다.
이제 내림가장조의 2주제부 또는 B파트가 시작된다. 내림가장조는 원 조성인 바단조와 조표가 플랫 4개로 같은 나란한조 관계에 놓여있는데, 이 진행은 곡 전체의 구조에서도, 그리고 마지막 곡인 4번에서도 관찰되는 진행이므로 유의해 두자. 자세한 설명은 해당 부분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주제는 각자 다른 텍스처로 세 차례 반복되는데, 이 마지막 반복에서 주제는 왼손에서 나오고 오른손에서는 처음 제시될 때 왼손의 윗 성부, 즉 테너 성부에서 나오던 일종의 대선율을 아르페지오 형태로 활용하고 있다.
나는 이 텍스처가 독주 피아노곡 못지않게 유명한 그의 네 손을 위한 피아노 곡들의 텍스처에서 차용한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왼손과 오른손의 음역이 서로 붙어 있지만 진행되면서 오른손 음역이 굉장히 높아져서 중간 음역대에서 머무르는 주제 선율과 분리된 독자적인 레이어를 형성하는 것이, 마치 나란히 앉은 연주자 두 명이 연탄곡을 연주할 때 나오는 뉘앙스와 비슷하게 느껴진다.
왼손에서 나오는 주제가 돋보이도록 한 발 물러서서 배경을 형성하면서도 독자적인 라인은 형성하는 것이 생각보다 까다롭다.
오롯이 청자의 집중은 왼손에게 향해야 하는데, 음역대상 더 귀에 잘 꽂히는 고음역의 오른손이 계속 전면으로 나오려고 하는 것이나, 반대로 왼손에만 신경을 쓴 나머지 나머지 오른손 선율이 그저 아르페지오 반주로 전락해버리는 것 모두를 경계해야 한다. 두 사람이 연주하는 것이었다면 상대적으로 쉬웠겠지만 독주곡이라 그렇다.
이 부분에서 문지영 씨의 표현이 마음에 들어서 기억에 남는다. 내가 방금 말한 것을 정확하게 잘 구현해내었고, 양손 멜로디의 표현 또한 모두 부족함 없이 풍부했다.
2주제부가 마무리되고 C파트로 넘어가는데, 소나타 형식으로 분석하려면 이 부분은 전개부(Development)보다는 제시부(Exposition)의 마무리인 코데타(codetta)의 일종으로 보아야 한다.
형식적으로는 제시부의 마무리에 불과한 코데타치고는 전체 길이에 비례하여 상당히 긴 편이지만, 조성적으로 잠시 내림가단조로 전환되었다가 다시 B파트의 조성인 내림가장조로 돌아와 마무리되기도 하고, 재현부(Recapitulation)에서 다시 반복이 될 때도 그대로 B파트, 즉 2주제부 뒤에 붙어서 나오기 때문에 전개부라고 분석하는 것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
여담으로 이렇게 규모가 확장된 형태의 코데타는 베토벤이 후기 소나타 형식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의 <피아노 소나타 29번, Op.106>을 보면 2주제 부분과 코데타가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으면서 둘의 길이가 거의 비등하게 나타나는데, 추가적인 설명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설 듯하여 그만두겠다.
중요한 것은 처음으로 이 곡에서 장단조 전환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B파트의 내림가장조에서 C파트로 넘어가면서 같은으뜸음조인 내림가단조로의 전조가 발생하는데, 형식의 변화점에서 발생하는 장단조 전환이기 때문에 어떤 정서적인 변화보다는 구조적인 역할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그저 감정의 변화만을 표현하기 위함이었다면 장조에서 단조로 변화하는 그 느낌 자체만으로도 사실 충분하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해석의 시도를 통해 이를 드러내지 않아도 무방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부분의 경우 형식의 전환이 일어나는 포인트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고, 여러 방법이 있을 수 있지만 리타르단도를 하든, 셈여림의 대비를 주든, 음색을 뒤집든 어떤 방법을 취해서 이를 드러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셈여림의 경우 디크레셴도를 통해 자연스럽게 피아니시모(pp)로 도달할 것을 작곡가가 지시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고수하고자 하는 이상 특별한 방법은 없어 보이긴 하다.
안드라스 쉬프(András Schiff)의 경우에는 이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3음을 강조해주는데 리타르단도 등의 템포 변화를 다소 진부하게 느끼는 연주자가 사용할 만한 좋은 선택지 중 하나인 것 같다.
장화음에서 단화음으로 전환될 때 유일하게 변화하는 음인 3음, 이 경우에는 A flat 코드의 3음인 C에서 C flat으로의 전이를 강조해줌으로써 장조에서 단조로의 전환을 꽤나 직관적인 방법으로 보여준 것이다.
다만 이는 장조에서 단조로의 전조는 드러낼 수 있지만 형식이 변화하는 지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결국 숨을 쉬어주든 리타르단도를 하든 프레이즈를 명확하게 끊어주는 작업이 분명히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연주자들은 이러한 작업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하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지영 씨는 셈여림은 악보에 표기된 지시에 충실하여 자연스럽게 다음 파트로 이어가는 해석을 보였고, 첫 음에서 살짝 테누토를 해줌과 동시에 B파트에서 가벼웠던 음색을 가라앉히는 시도를 하였다.
음색의 전환이라는 것이 워낙 전면에 드러나기가 힘들고 형식 분기점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약하지만, 그나마 테누토를 통해 이를 완화하고자 한 듯하다.
이렇게 형식이 나뉘는 포인트들, 게다가 이 부분처럼 음악적으로 명확하게 단절되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지는 경우에는 연주자의 적극적인 개입이 나는 불가피하다고 본다.
이 곡을 미리 분석해보아 잘 이해하고 있거나 아예 악보를 펴놓고 듣지 않는 이상 듣는 사람은 그 지점에서 다른 파트로 넘어간다는 사실을 연주자가 알려주지 않았을 때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전무하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음악은 들으라고 만든 것이지 분석하라고 만든 게 아니다.
어떻게 들리는지, 어떻게 들려야 하는지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고 그렇기 때문에 연주자가 아무리 곡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있어도 그 내용이 듣는 사람에게 전달되지 않으면 그 연주는 실패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곡 안에 내재된 형식을 이해함은 물론 충분히 드러내지 않는 것도 연주자가 자신의 의무를 다 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열렬한 추종자로서 그의 영향으로 형식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를 깊이 있게 진행한 사람이 아닌가?
자신의 곡을 연주하는데 연주를 통해 본인이 설계한 아름다운 구조를 드러내는 것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다고 본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그의 이상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구시대적인 관습이라고 무작정 작위적으로 여기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연주 관습과 전통이 생겨났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 후 그것을 상황과 시대에 맞게 흡수해 받아들이는 것이 올바른 연주자의 자세일 것이다.
C파트는 앞에서 말했던 포핸즈 뉘앙스가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중간 성부에서 아르페지오 반주를 하는 동안 소프라노와 베이스가 노래를 주고받는 모양이다.
이 파트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 파트의 클라이막스가 되는 88~90마디 구간이다. 이 부분에서의 화음이 바로 독일6화음이다. 도미넌트 46화음으로 해결되는 것까지 아주 전형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이 화음이 얼마나 슈베르트 후기 음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는 이미 여러 번 언급했으니 넘어가도록 하겠다.
전에도 말했지만 슈베르트는 이 화음을 구조적인 내러티브를 형성할 때 사용하기도 하고, 음악적 하이라이트가 되는 부분에서 긴장을 쌓아가거나 혹은 쌓인 긴장을 터뜨리는 시점에서 사용하는데 이 부분에서 사용된 것은 후자에 해당하게 된다.
여기서 이 격앙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게, 소프라노의 선율보다도 내가 봤을 때는 베이스의 E음 강타이다. 단호하고 묵직한 울림으로 모든 음들을 압도해야 하므로 이 음을 약하게 연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슈베르트도 포르잔도(fz)라고 표기해 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지영 씨도 이 음을 살려주려고 노력했으나, 너무 절제했다는 생각이 든다. 피아니시모로 일관된 이 C파트에서 유일하게 큰 긴장을 만들어내는 부분인데, 좀 더 나와줬어도 상관없었을 듯하다.
또 한 가지, 이 직전에 내림다장조에서 내림다단조로 전이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도 가벼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제는 느낄 것이다. 3음인 E flat 음에서 E 더블 플랫으로 전이되는 라인을 강조해서 살려주든, 테누토를 통해 변화된 포인트를 강조하든, 셈여림 대비를 주든 뭐든 반드시 해야 한다.
이 달콤한 듀엣이 끝나고 다시 처음의 A파트로 돌아가는데, 이때 이 경과구에서 나는 쓸데없이 강조해줄 라인도 없는 오른손의 아르페지오를 더 크게 연주하기보다는 왼손 베이스를 강조해주어 3도 아래로 다시 내려가는 맥락을 살려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문지영 씨도 왼손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이 맥락을 고려했다는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좀 더 전면에 드러낼 필요가 있었다고 보인다.
뒷부분은 비슷하게 반복되므로 특별히 더 언급할 것은 없어 보인다.
전체적으로 좋은 연주였다. 문지영 씨가 이 곡에 대해 갖고 있는 깊은 애정이 잘 느껴지는 연주였다. 아마 전체 곡들 중 가장 잘 연주되지 않았나 싶다.
앞전의 왈츠에서 느껴졌던 약간의 루즈함은 완전히 뇌리에서 사라졌고, 이 곡의 연주가 마칠 때 즈음에는 이 곡에 대한 강한 인상만 남아있었다. 긴 호흡의 곡도 자신의 페이스대로 잘 이끌어간다는 생각이 이 곡을 통해 굳혀졌다.
몇몇 부분을 놓친 것, 또는 본인의 판단 하에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넘어간 부분들에 대해 특별히 아쉬움이 남거나 하지 않을 정도로 전체적인 흐름이 워낙 좋았다. 좀 더 사려 깊은 분석이 동반된다면 완벽한 연주자가 될 것이다.
2번은 D.899와 같이 원 조성인 바단조의 단3도 위 나란한조(Parallel Key)인 내림가장조의 곡이다. 구조는 3부 형식으로, 중간에 트리오를 둔 A - B - A'에 4마디의 짧은 코다로 마무리하는 구조이다. A파트와 B파트도 각각 작은 세도막으로 나눠지는, a - b - a'의 구성을 띄고 있다.
소나타의 구조에 대입해서 보면 이 악장을 미뉴에트와 같은 춤곡으로 간주할 수 있다. 혹자는 이 곡의 리듬을 18세기 이전 유행하던 춤곡인 사라방드(Sarabande)와 연결 짓기도 한다.
잠깐 언급했지만 1번과 2번의 바단조 - 내림가장조 조성 관계는 1번에서 1주제와 2주제, 또는 A파트와 B파트 간의 조성 관계와 정확히 일치한다. 작은 구조와 전체 구조를 일치시켜 곡 전체에 통일성을 주고자 한 시도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연주할 때 1번과 2번 사이에 텀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 1번에서 A파트에서 B파트로 전조할 때의 과정이 F 코드를 내림가장조의 서브도미넌트 기능으로 사용하여 전조한 것인데 정확히 같은 효과를 1번과 2번 사이에서 기대할 수 있다.
2번의 첫 음인 E flat 음은 내림가장조의 도미넌트이기 때문에 2번을 바로 이어서 연주하게 되면 1번의 마지막 코드인 f minor 코드가 2번의 E flat 음에 붙으면서 서브도미넌트 기능을 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같은 조성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2번의 1악장과 비교를 하곤 한다.
물론 그 곡처럼 변주곡 형식은 아니지만, 4성부 코랄 풍의 주제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 주제 선율의 contour가 유사한 측면도 있긴 하다. 결정적으로 베이스 라인의 첫 몇 음들이 아예 동일하기 때문에 거의 확실하게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것 같다.
다른 곡들에 비해 길이가 짧은 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는 것이 매력이다.
기승전결도 확실하고, 형식적으로도 원래 길게 펼쳐 놓기를 즐기는 슈베르트답지 않게 아주 압축적인 구성을 보여준다.
이 곡에서 중심이 되는 화음은 A 코드인데, 이게 원 조성인 내림가장조에서는 나폴리6화음(Neapolitan 6th), 또는 Secondary Dominant의 일종인 독일6화음의 서브도미넌트로 기능한다. 그리고 원 조성의 서브도미넌트 관계에 놓인 B파트의 내림라장조에서는 독일6화음, 즉 Secondary Dominant로 기능한다.
이것을 보면 슈베르트가 의도적으로 B파트의 조성을 원 조성의 서브도미넌트 조성으로 설정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분히 고전적인 맥락에서 나온 것인데, 고전 작곡가들이 원 조성과 가까운 관계에 있는 조성과 화음을 위주로 사용한 것은 관계가 먼 화음들을 사용할 줄 몰라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기능적으로 겹치는 관계 자체에서 오는 조성적 모호성을 음악의 흥미 요소로써 적극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단지 진행이 흥미롭고 소리가 좋은 것을 추구하는 얕은 사고에서 벗어나 구조 형식적인 기능을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조성에서 서브도미넌트였던 화음을 도미넌트 삼아서 다른 조성으로 전조한다든지 이렇게 공통 화음이 많은 조성을 계속 오가게 되면 어디서부터 이 조성으로 전조가 이루어진 것인지 명확하게 나눌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5도권(cycle of 5th) 같은 것들도 그런 맥락에서 사용하는 것인데, 이 도미넌트의 연속 진행이라는 것이 목적지를 모르는 채로 끊임없이 진행이 가능한 동등하고 가장 가까운 화음들의 연속이기 때문에 이를 사용하여 조성감을 모호하게 만들고 원래 조성에서 부드럽게, 언제 전조된 줄도 모르게 먼 조성으로 전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박절, 조성, 형식 등의 맺고 끊음을 모호하게 만들고 따로 분리하게 되면 음악적으로 악센트의 분리가 발생하게 되고 듣는 사람의 흥미가 떨어지지 않고 계속 들을 수 있는 보다 세련된 음악이 된다.
고전 음악에서 악센트 분리는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 단 몇 줄로 끝날 문제는 아니라서 나중에 따로 글로 다룰 기회가 있으면 써보도록 하겠다.
아무튼 슈베르트 또한 그들처럼 하나의 화음이 이중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이용하여 이런 식으로 조성을 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A파트와 B파트 둘 모두에서 이 A 코드가 클라이막스에서 사용된다는 점을 통해 더욱 확실해진다.
먼저 A파트에서 주제가 먼저 제시되고 화음 연타를 통해 긴장을 쌓는다. 이때 원 조성으로 나온 다음에 시퀀스로 같은 패시지가 이번엔 내림라장조로 반복되는데, 이미 여기서 내림라장조인 B파트로의 전이를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터뜨리는 지점에서의 화음이 B 더블 플랫(=A) 베이스의 g flat minor 코드인데, 이 코드가 같은 베이스의 도미넌트 7화음으로 빠지면서 같은 과정을 통해 독일6화음인 F 플랫(=E) 코드로 연결된다.
이 도달점인 B 더블 플랫 화음에서 절대, 절대로 힘이 빠져서는 안 된다. A파트의 하이라이트가 되는 부분인 만큼 그 어떤 화음보다 중요하고, 견고하고 단호한 소리를 내야 한다. 슈베르트도 잘 사용하지 않는 포르자티시모(ffz)라는 강조 지시를 통해 이 화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대놓고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B파트에서는 원래 내림라장조로 나왔던 셋잇단음표 주제가 두 번째 b파트에서 단조로 전환되며 포르테로 연주되고, 방향 전환하여 빌드업을 한 후 마침내 7마디에 걸쳐 펼쳐진 A 코드가 포르티시모로 연주되며 클라이막스를 형성한다.
에너지를 모두 분출하고 피아노로 줄어든 A 코드가 바로 도미넌트로 빠지지는 않지만 대리화음인 f sharp 코드가 서브도미넌트로 기능하여 도미넌트로 연결되면서 앞에서 말했던 Secondary Dominant, 또는 서브도미넌트로 A 코드가 기능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문지영 씨는 이 부분들을 아주 훌륭하게 잘 연주해줬다. 절대적인 음량도, 다른 부분들과의 위계도, 클라이막스까지 도달하는 과정도 모두 완벽해서 만족스러웠다.
몇 가지 점들을 더 짚어내자면, A파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원래 진행에서 방향을 전환하여 감화음을 통해 A파트를 종지하는데 이 전환하는 부분을 그저 지나치지 않고 한 번 짚어주는 것이 좋을 듯하다.
또한 B파트에서 나오는 셋잇단음표 아르페지오를 어떻게 연주하느냐가 문제인데, 일부 연주자들은 무신경하게 이들을 그저 화음 덩어리인 양 연주하지만 이들 사이에도 분명히 멜로디 라인은 존재한다.
먼저 트리오의 세네 번째 마디에서는 윗 성부의 라인을 살려줘야 하는데, 이 노트들이 모두 비박절에 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라인은 사실 A파트의 첫 부분 모티브에서 따온 것이다. 첫 부분에서 Ab - Ab - Bb - Ab - G 라인을 이 부분에서 Ab - Ab - (A) - Bb - Ab - Gb로 활용하고 있다. 비교해보자.
그리고 다음 프레이즈에서 한 옥타브 위에서 같은 패시지를 반복한 후 작은 a파트를 마무리하는데, 이때 이 부분에서는 강세가 실리는 첫 음들을 충실하게 살려주면 된다. 강세가 실리는 노트가 변화하기 때문에 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
문지영 씨는 뒷부분의 경우 첫 음들이 만드는 라인을 잘 살려주었지만, 첫 부분에서의 라인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살리고자 했다면 충분히 살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3번은 사랑스러운 멜로디가 인상적인 내림나장조의 변주곡이다. 테마의 구조는 A - B - A'이고 총 5개의 변주와 짧은 코다로 구성되어 있다.
이 변주곡의 테마는 앞서 동 작곡가의 극음악인 <로자문데, D.797>의 3막 간주곡과 <현악 4중주 13번, D.804>의 2악장에서 이미 사용된 주제를 살짝 변형하여 사용한 것이다. 이 두 곡의 경우 주제 부분이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지만 즉흥곡 3번은 주제의 모티브를 차용했을 뿐 이후의 전개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세 곡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현악 4중주가 완성도가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느껴져 가장 좋아하는 편이다. 이 곡도 현악 4중주만큼의 높은 밀도와 독창성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충분히 괜찮은 곡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주제도 그렇지만 전체적인 곡의 분위기와 살짝 동떨어진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은데, 장조 부분에서도 어두움이 기저에 깔린 듯한 나머지 곡들에 비해 밝고 가벼운 느낌이 전반적으로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 부분의 단조 변주가 있긴 하지만 살짝의 긴장을 줬다는 느낌 정도만 든다.
변주 스타일 자체는 베토벤의 <디아벨리 변주곡, Op.120> 같은 전위적인 후기 스타일보다는 동 작곡가의 중기 내지는 중후기의 스타일을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이 변주 스타일은 낭만 전반에서 많은 작곡가들에 의해 발전되어 갔는데, 대표적으로 슈만과 쇼팽의 초기 변주곡 작품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브람스가 성격 변주의 새 지평을 열며 큰 변화를 가져오기 전까지 낭만 변주곡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인다.
아이러니하게도 슈만은 이 작품을 평가절하했는데, 물론 슈베르트의 다른 변주곡 작품에 비해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뉘앙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력적인 곡이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곡임에는 틀림없다.
이 베토벤의 중기 변주 스타일의 특징을 나열하자면 또 하나의 긴 글이 되기 때문에 간략하게 요약해보겠다.
기존 고전 변주곡에서는 동일 으뜸음 안에서의 장단조 변화만 주로 사용되었다면 베토벤은 다른 조성으로의 변화를 적극 활용하였다. 특히 그는 변주곡을 하나의 곡이 계속 반복되는 순환적인 작품이 아니라 론도 형식 또는 소나타 형식에 맞게 어떤 내러티브를 가지도록 작곡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내러티브를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조성의 변화를 주었다. 예컨대 론도 형식으로 작곡했다면 반복구가 오기 전에 다른 조성으로 전조하여 긴장을 준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형식을 드러내곤 했다.
또한 그는 리듬을 이전 작곡가들에 비해 좀 더 체계를 가지고 작곡했다는 경향이 있다.
물론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BWV 988>나 헨델, 모차르트 등의 변주곡 작품들도 어느 정도는 리듬 체계를 고려해서 작곡했으나, 그는 이를 좀 더 엄격하게 다루어 테마에서 변주가 점점 진행될수록 리듬이 더욱 잘게 쪼개지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 템포가 일정하게 유지됨에도 짧아진 리듬 때문에 점점 빨라지는 것처럼 들리게 만들어 어떤 리듬적 텐션을 형성하게 되고, 이것이 그가 의도한 형식과 맞물려 더욱 그의 내러티브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요즘은 극단적으로 모든 변주에 대해 일정한 템포로 연주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는 별로 없지만, 그러한 시도 또한 이런 리듬 체계를 잘 드러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템포를 일정하게 유지하지 않고 계속 변화시킬 경우 리듬의 변화에 의한 효과가 반감될 것이기 때문.
이러한 변주 기법이 정점에 이른 것이 다름 아닌 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단일 피아노 작품 중 하나인 <피아노 소나타 32번, Op.111>이다.
이 곡에서 그는 템포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변주의 구분점에서 템포를 그대로 유지할 것을 지시하는 L'istesso Tempo를 써두고 있다) 한 변주가 진행될 때마다 리듬을 절반으로 쪼개어 4변주까지 그런 흐름을 만든 후 5변주에서는 아예 리듬을 해체함으로써 엄청난 극적 대비를 만들어내고 있다.
여담으로 3변주의 리듬이 재즈의 부기우기(boogie-woogie) 리듬과 비슷하다며 이 곡의 현대성에 대해 많이들 감탄하곤 한다.
물론 그것은 분명히 이 곡이 가지는 숭고한 음악적 가치와는 별 관련이 없는 내용이고, 그러한 리듬이 형성된 이유 또한 위에 서술했듯이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시도에 의한 결과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듯해 언급해 보았다.
슈베르트도 이 곡에서 베토벤만큼이나 극적으로 이러한 리듬 분절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는 고려한 듯하다.
또한 조성 변화도 사용하였는데, 3변주에서 내림나단조, 원 조성인 내림나장조에서 단조로 전환한 후, 4변주에서 장3도 아래인 내림사장조로 전조한 후 다시 5변주에서 원 조성으로 돌아간 후 짧은 코다와 함께 마무리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이때, 내림사장조의 토닉인 G flat major 화음이 5변주로 전이되는 과정에서 원 조성의 도미넌트로 이어지면서 정확하게 독일6화음의 용법으로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변주에서는 이 화음을 클라이막스에서 긴장을 주는 용도로 주로 사용했다면 이 곡에서는 구조적인 맥락으로 큰 조성 흐름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G flat - F 진행은 사실 테마나 다른 변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맥락인데, 이전 변주인 3변주에서만 전반에 드러난다. 원래 테마에 없던 모티브를 적극적으로 삽입한 것은 전적으로 4변주에 대한 암시를 위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테마에서도, 다소 억지로 연결 지으려고 하면 가능한 부분이 하나 있긴 한데, 마지막 부분의 G 베이스 C major 7화음에서 도미넌트로 전이되는 부분이다. 베이스 라인도 비슷하고 기능도 Secondary Dominant에서 도미넌트로의 진행이므로 같지만 이것을 작곡가가 의도한 것이라고 강하게 얘기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만일 이 생각에 동의한다면 이 진행은 변주마다 나오기 때문에 베이스를 적절히 강조해 주면 될 것이다.
아래는 3변주에서 나타나는 G flat - F 진행들이다.
마지막 종지 직전에 해당 진행을 반복하며 강조한 것이 인상적인데, 이러한 진행을 염두에 두고 연주했다면 여운으로 남아 바로 등장하는 4변주의 첫 두 마디의 화성 진행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변주에서 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진행이 5도권 진행이다.
슈베르트는 이 5도권 진행을 사실 그렇게 자주 사용하는 편이 아니다. 그러나 이 곡에서는 테마에서부터 토닉으로 이어지는 D - G - C - F - B flat 진행을 사용하고 있고, 심지어 주제 선율에서도 이와 동일한 진행을 활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이 5도권 진행은 상당히 흔한 진행이라 너무 자주 사용하게 되면 지루하게 들리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흐나 모차르트처럼 이를 정말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작곡가의 화성적 상상력과 구축력을 드러내기 쉽지 않다.
어디에 삽입되어도 진행이 부드럽고 소리가 좋기 때문에 그 큰 범용성 때문에 오히려 일류 작곡가들은 자신만의 화성 진행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을 꺼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슈만이 이 곡을 낮게 평가했을 수도 있다.
나 또한 이 곡에서 슈베르트가 음악적으로 많은 시도를 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느낌은 그다지 받지 못했기 때문에 일견 슈만의 생각에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편이지만, 나머지 곡들에 비해 부족한 것이지 절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곡이라고까지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같은 주제에 다른 화음을 붙인 리하모니제이션(reharmonization) 또한 이 곡의 주요한 전개 방식이다.
변주에서 화음을 대체하는 것은 흔한 변주 기법이지만, 이 곡에서는 테마 안에서도 리하모니제이션이 나타난다.
<로자문데>에서 나왔던 메인 모티브는 처음에 A파트에서 제시될 때는 B flat major의 토닉으로 제시되는데, 이것이 B파트에서 반복될 때는 D major, 장3도 위의 대리화음으로 대체되고 있다.
작곡가는 이러한 화성 변화를 텍스처와 그에 따른 셈여림 변화를 통해 드러내고 있다. 왼손의 베이스가 옥타브로 더블링 되었고, 오른손에도 화음을 채워주고 있다.
나는 이러한 텍스처 변화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주기만 해도 셈여림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과하게 이 두 번째 부분에서 크게 연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그저 울림을 풍부하게 하고 살짝 무겁게 해 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문지영 씨는 이러한 맥락을 잘 읽어내어 내가 방금 언급한 그대로 잘 표현해주었다.
변주곡을 연주할 때는 테마와 비교하여 다르게 변형된 점을 구별하여 만약 그것이 음악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라면 적극적으로 살려주는 것이 옳다.
반대로 테마에서 뼈대가 되는 중요한 진행, 예를 들어 주요한 베이스 진행이나 주제 선율이 남아있는 경우에도 적절히 살려주는 것이 좋다.
전자와 후자 중에 뭐가 더 중요한 지 묻는다면 당연히 전자겠지만, 곡을 관통하고 있는 주요한 진행이라면, 예를 들어 방금 언급한 5도권 진행의 경우 다른 중요한 요소가 없다면 살려주어도 좋을 것이다.
먼저 1변주에서는 리듬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일 텐데, 메인 모티브의 연타를 부점 리듬으로 활용하고 있다. 표기되어 있듯 끊어지지 않고 레가토하여 프레이즈를 길게 끌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주요한 화성 뼈대는 테마와 동일하게 유지되고 있는데, 단 한 부분에서 유의미한 변화가 있다. 원 테마에서는 같은 주제가 한 옥타브 위에서 반복되는 부분인데, 테마에서는 화성의 변화는 없는 반면 1변주에서는 화성의 변화를 주고 있다.
이때 선택한 화음이 B파트에서도 사용한 D major 화음인데, 사실 이렇게 되면 뒤의 B파트에서 나타나는 리하모니제이션의 효과가 확실히 반감되긴 한다. 아마 슈베르트는 아래와 같은 매력적인 반음계 진행을 위해 이러한 변화를 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테너 성부를 살려주는 것이 화성 변화를 드러내는 데 가장 적합한 방법일 것 같다.
2변주에서는 연타 뉘앙스 대신 주제의 뒷부분에 나오는 돈꾸밈음 모티브를 대신 전반에 활용하고 있다.
B파트 끝부분에 다시 A'파트로 넘어가는 삽입구에서 오른손의 아르페지오 라인을 왼손이 받아서 연주하는 패시지가 나오는데, 이 부분에서는 스타카토를 비롯한 아티큘레이션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주고받는 뉘앙스를 명확하게 드러내 줄 필요가 있다.
문지영 씨는 이 부분에서 페달을 사용하여 아쉽지만 이 뉘앙스가 제대로 살지 않았던 것 같다.
3변주에서는 이 돈꾸밈음 모티브를 왼손의 내성부에서 활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G flat - F 진행은 이미 위에서 충분히 언급했으니 넘어가도록 하고, 한 가지 더 짚어내자면 화성 진행을 변화시켜 베이스에서 반음계 진행을 큰 프레이즈로 만들어내고 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
나도 처음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것인데 쉬프의 최근 실황 연주 영상에서 이를 살려서 연주하는 것을 듣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중간의 G flat 음은 약하게 처리하는 것까지 완벽했다. 이렇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주는 연주들이 참 좋다.
4변주의 경우 음악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은 다소 적으나, 오른손과 왼손이 주제 선율을 주고받는 뉘앙스를 잘 표현하면 좋을 것이다. 특히 저음부에서 연주되는 왼손의 멜로디가 뭉개지지 않고 명료하게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다.
5변주는 왼손의 반주는 3변주와 비슷하게 싱코페이션 리듬으로 처리되었고, 뼈대를 유지한 채 넓은 음역을 가로지르는 스케일과 아르페지오로 변주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때 이 빠른 스케일들이 기계적으로 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모든 음을 동일하게 처리하고 그저 레가토에만 집중하기보다는 테마에서 가져온 선율 뼈대를 살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래는 첫 네 마디의 예시인데 나머지 부분들에서도 비슷한 뼈대를 찾아 중심을 잡아주면 그저 스케일과 아르페지오의 향연으로만 이 변주가 들리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화려한 브릴란테(brillante)풍의 변주가 완전히 종지하지 않은 채 멎은 후 첫 테마를 상기하는 짧은 코다가 아주 느리게, più Lento로 등장하며 곡을 마무리한다.
마치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서 아리아를 다시 한번 반복하고 끝나는 것처럼, 다시금 테마로 돌아와 종지하며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일종의 클리셰라면 클리셰지만, 그래도 이만큼 강력하고 효과적인 변주의 마무리가 또 없다.
슈베르트는 바흐처럼 테마를 그대로 한 번 반복하지는 않고, 첫 부분을 살짝 변형하여 짧게 인용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이때 그는 원래 토닉과 그의 전위였던 화음을 G major 7화음으로 바꾸어 5도권 진행을 종지에서 다시금 강조하고, 뒷부분을 세 번 반복하며 이제 곡이 완전히 마무리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 직전에, 앞에서 언급했던 G flat - F 진행을 다시금 떠오르게 하기도 한다. 종지 전에 마치 글의 마무리에서 전체 내용을 요약하듯, 곡에서 중요하게 사용했던 모티브와 요소들을 짧게 인용하며 마무리하는 것이다.
문지영 씨는 이 마음이 따뜻해지는 마무리를 아주 잘 표현해주었다. 긴 여정을 마치고 다시 돌아온 방랑자를 두 팔 벌려 맞이하는 따뜻함이다.
여담이지만 이렇게 코랄풍으로 테마를 살짝 인용하며 마무리하는 것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5번, Op.28>의 2악장을 떠올리게 한다.
이 곡의 경우 느린 3부 형식이지만, 베토벤답게 A파트를 반복할 때마다 조금씩 변주하여 전개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이들 사이에는 변주곡과 같은 효과를 형성하게 된다.
리듬을 쪼개어 변주한 직후 바로 느린 테마로 돌아오면서 발생하는 리듬의 단절에 의한 극적인 효과도 비슷하게 나타난다.
슈베르트가 이 곡의 전개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상당히 유사한 방식임에는 틀림없다.
본 프로그램의 마지막 곡인 4번은 빠른 템포의 곡으로, '익살스럽게' 또는 '해학적으로'라는 뜻의 '스케르찬도(scherzando)'라는 지시어가 알레그로(Allegro) 템포 뒤에 붙어있다. A - B - A' - 코다의 3부 형식으로, B파트의 비중이 A파트 못지않게 매우 크고 코다 또한 상당히 길다.
특유의 가볍고 익살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소나타의 마무리로 자주 오는 론도(Rondo)에 비견하고는 한다. 이 곡이 4곡으로 구성된, 소나타의 구성을 본뜬 이 세트의 마지막 곡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생각이 될 법하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론도와 거리가 멀지만, 분위기상 론도와 유사하기 때문에 이 또한 소나타 형식의 서사를 차용하여 독자적인 형식을 만든 슈베르트의 의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곡의 경우 가장 핵심이 되는 리듬이 있는데, 바로 헤미올라(hemiola)이다.
이탈리아어로 2:3의 비율을 의미하는 헤미올라는 음악에서 주로 2:3의 비율로 박자를 쪼개어 두 종류의 리듬이 혼재하는 폴리리듬(polyrhythm)의 일종을 의미한다.
이렇게 리듬을 나누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 곡에서 사용된 방식이 가장 일반적인 방식 중 하나이다. 3/4 또는 3/8 등 3박자 계열 박자에서 두 마디를 하나로 묶어 그것을 셋으로 나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원래 기준박 두 개만큼의 음가가 한 박처럼 작용하게 되어 원래 세 박 단위로 진행되는 마디 단위와 2:3의 비율을 형성하게 된다.
이 곡의 케이스를 예로 들어 나타낸 아래 그림을 보면 2:3이라는 비율이 이해가 될 것이다. 오른손의 경우 한 마디, 즉 기준 박인 8분음표 3개의 음가가 하나의 단위로 작용하는 반면, 왼손 반주의 경우 8분음표 2개 음가만큼이 한 단위로 묶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헤미올라를 곡 전반에 활용하는 곡이 있고, 또는 종지 직전이나 첫 부분과 같이 특정 중요한 부분에만 한정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곡의 경우 전자에 해당할 것이다.
헤미올라가 주는 리듬적 복잡성과 텐션이 꽤나 크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음악에 큰 흥미를 유발하여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작곡가들이 사용하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리듬을 악보에 표기하기 시작한 중세 시대부터 이미 이러한 헤미올라 리듬이 나타난다. 오히려 르네상스 시대까지만 해도 광범위하게 사용되다가 바로크, 고전 시대에 들어서며 점차 일시적인 변칙을 통해 리듬적 긴장을 주는 특수 효과로써 제한적인 용법으로 사용된 것이다.
유명한 예시로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 사단조, K.550>의 3악장 미뉴에트와 브람스 곡에서 나타나는 수많은 사례들이 있을 것이다. 특히 브람스는 3박자, 6박자 계열 음악에서 이 리듬을 사용하지 않은 예시를 찾기가 더 힘들 정도이다.
모차르트의 예시에서는 슈베르트의 경우와 반대로 상성부의 메인 멜로디가 헤미올라 리듬으로 나타난다. 집중해서 들어보자.
민속 음악 중에도 이 헤미올라 리듬이 나타나는 음악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이 리듬을 두고 보헤미아의 민속 춤곡인 푸리안트(Furiant)와 연관 짓기도 한다. 이 춤곡의 리듬 또한 3박자에서 두 마디를 한 단위로 하여 셋으로 리듬을 쪼개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가장 유명한 보헤미아의 작곡가 중 한 명인 드보르자크(Antonín Dvořák, 1841-1904)의 <슬라브 무곡, Op.46>의 8번이다. 속으로 3박자를 세면서 들으면 헤미올라 리듬을 캐치할 수 있을 것이다. 듣다 보면 이 곡의 메인 모티브와 유사한 선율도 등장한다.
이 헤미올라 리듬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될만한 부분도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헤미올라 리듬이 우리에게 흥미롭게 들리는 이유는, 엇갈리는 리듬의 강세가 주는 긴장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변칙이 되는 것은 2:3에서 3이지만, 2의 비율을 만드는 리듬이 명확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3의 비율이 3으로써 들린다.
그런 의미에서 엇갈리는 강세 중 어떤 것을 더 전면에 드러내야 하는가는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 둘의 관계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곡에서는 2가 되는 것이, 위에서도 봤지만 오른손의 멜로디이고, 3의 비율을 만드는 것은 왼손의 반주이다. 그 누구도 반주를 멜로디보다 강하게 연주하는 것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분명히 주도권은 오른손에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곡의 경우는 헤미올라 리듬을 전면에 드러내기보다는 왼손에서 형성되는 베이스의 자연스러운 리듬과 강세의 뉘앙스를 무시하지 않고 고려해서 연주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반면에 이렇게 대놓고 더블링을 하여 강세를 줘야 하는 아래와 같은 부분도 있다. 이런 부분들에는 그저 헤미올라 그 자체를 드러내어 뒤쪽에서 원래대로 돌아온 리듬과 비교하여 대조를 주는 것이 좋다.
템포 설정의 경우 급하지도 않고 답답하지도 않은 딱 적절하게 설정된 것 같다.
너무 느릴 경우 이 곡의 해학적인 특성과 리듬이 잘 살지 않게 되어 음악이 재미가 없어지는데, 그렇다고 무작정 빨라져서 여러 요소들을 놓치는 것도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푸리안트와의 유사성에서 미루어봤을 때 일반적으로 연주되는 이 곡의 템포보다는 빠르게 연주되어야 하지만, 작곡가가 이 곡을 그 양식에 맞추어 연주하라고 규정한 게 아닌 이상 반드시 그 템포에 맞출 필요는 없어 보인다.
A파트는 또다시 a - b - a'의 작은 세도막으로 나눌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계속해서 변화하는 악센트를 맛깔나게 잘 살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이러한 느낌을 잘 살리기 위해 루바토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너무 과하게 사용하게 되면 안 그래도 민속적인 느낌이 나는 음악을 삼류 저질 음악처럼 들리게 만들기 때문에 적정선을 잘 찾아야 한다.
A파트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트릴 패시지 또한 흔히 '집시 음악'이라고 불리는 보헤미안 민속 음악의 전형적인 특징 중 하나이다.
이때 트릴 부분에서 발생하는 텐션이 굉장히 큰데, 이 부분에서 사용된 화음이 고전 시대에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자극적인 화음 중 하나였던, 토닉 베이스 위에 올라간 도미넌트 감7화음이다.
정말 날것 그대로 거칠게 강한 텐션을 드러내야 하는 부분인데 이 부분에서의 연주가 너무 얌전했던 것 같다.
집시 풍의 음악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연주했더라면 도움이 많이 되었을 텐데 문지영 씨는 그보다는 슈베르트라는 작곡가 개인에게 더욱 집중했던 것 같다.
이어지는 B파트는 내림가장조와 내림가단조를 오가며 계속 전조하다가 내림가장조로 마무리되는데, 그 형식이 매우 자유로워 굳이 여러 부분으로 나누는 의미가 없어 보인다.
박절에 구애받지 않는 스케일의 오르내림과 특징적인 리듬의 왼손 반주가 있는 첫 주제와, 이에 대비되는 두 번째 모티브가 이 곡의 주요 전개 요소이다.
이때 이 첫 번째 주제의 왼손 반주에도 헤미올라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는데, 많은 연주자들이 이를 간과하고 그저 3박자처럼 간주하여 연주하는 경향이 있다. 분명히 마지막 박에 강세를 실어서 A파트에서 눈에 띄었던 헤미올라 리듬의 연장선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주제는 앞에서 언급했듯 계속해서 내림가장조와 내림가단조 사이에서 전조하는데, 이 파트를 그저 무미건조하게 연주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장단조 전환을 능동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엄격하게 음색을 분리하는 것이 가장 어렵고 고차원적인 방법일 것이고, 그 외에 이런 변화들 사이에 한 번씩 호흡해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번에는 이 부분에서 음색의 변화는 느끼지 못했고, 이런 변화 포인트들에서 표현이 전체적으로 다소 충분하지 못했던 것 같다.
두 번째 모티브는 이미 첫 파트의 끝 부분에서 제시된 후 뒤에서 활용되는 형태이다.
이 주제가 계속 발전하다가 도미넌트 페달 포인트(Dominant pedal point)가 깔리고 클라이막스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여기서 약간 가속을 해서 마무리하여 뒷부분의 피아니시모 패시지와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것이 더 좋게 느껴지는데, 문지영 씨는 이런 부분에서 침착함을 잘 유지하여 절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악보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기에 연주자의 선택을 존중한다.
약간의 휴지 이후에 아주 작게, 셈여림의 대비를 이루며 같은 모티브를 사용하여 전개하는데, 이 부분에도 페달 포인트가 길게 깔려 있다.
다름 아닌 증6화음 계열 화음의 베이스 음인 F flat, 또는 표기상으로 E 음에 해당하는 음이다. 이 정확하게 같은 화음이 1번에서도 등장하고, 2번에서도 등장한다.
앞에서와 다르게 이번에는 정반대의 셈여림이 부여되었는데, 1번과 2번에서는 이 증6화음에서 클라이막스를 형성하고 하강하여 도미넌트로 빠지는 모양새였다면 이 곡에서는 반대로 도미넌트에서 클라이막스가 형성되고 그와의 대비로 증6화음이 아주 작은 셈여림으로 온 후 다시 포르테의 도미넌트로 이어지는 모양이다.
곡 전체를 관통하는 화음임은 이제 모두가 알 것이니 그 중요함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부분이기에 만약 앞에서 아첼레란도(accelerando)를 하여 템포를 당겼다면 이 증6화음 페달 부분에서 템포를 갑자기 살짝 늦추어(meno mosso) 화음의 대비를 셈여림과 동시에 템포 대비를 통해 증폭시키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 역시도 악보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이러한 뉘앙스가 내재되어 있음을 부정하기가 힘들다.
앞에서 말했듯 이 긴 페달은 다시금 도미넌트로 빠지게 되고, 마지막 화음이 독일6화음으로 작용하여 도미넌트로 이어진다.
이후 이 도미넌트가 토닉으로 종지한 후 새로운 파트가 시작되는데, 첫 부분의 스케일을 살짝 변형한 것을 양손에서 동일하게 연주하고 있다.
사실 화성 진행에 있어서도 첫 부분의 장단조 전환을 차용하고 있고, 스케일의 정점에 이른 직후에 새로운 화음으로 바뀌는데 이 화음이 앞에서 말했던 그 증6화음이다.
이번에는 앞서 1번과 2번에서 사용된 용법과 비슷하게 증6화음에서 포인트를 준 것이다.
워낙 중요한 화음 진행인 만큼 이 시작되는 포인트에서 테누토 내지 악센트를 하여 화음의 변화를 분명하게 드러내 줘야 하는데, 악보에도 분명히 포르티시모로 이 부분이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을 알려줘서 그런지 연주자도 이 부분을 잘 살려주었다.
이어서 이 스케일은 단숨에 하강하여 A major 화음의 클라이막스를 형성하는데, 앞의 2번의 트리오에서의 경우처럼 풍부한 울림으로 훌륭하게 표현해주었다.
이 두 부분들이 서로 통하는 부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이 부분에서 2번의 트리오 파트에서 같은 화음으로 클라이막스를 형성했던 것을 상기시켜주기에 충분했기에 아주 만족스러웠다.
A major로 빠졌던 화음은 다시 그 도미넌트인 E major 화음으로 복귀하고, 곧바로 원 조성의 도미넌트로 다시금 이어지면서 이 E major 화음이 독일6화음으로 기능하게 된다. 이때, 다시 원 조성인 내림가장조로 돌아가는 분기점이 되는 E major - E flat 도미넌트 화음 간의 진행 사이에 셈여림의 변화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악보에는 특별한 셈여림 표기가 없어서 많은 연주자들이 놓치는데, 이 진행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전조되는 시점에서 수비토 피아노(subito piano)를 통해 화음과 조성의 변화를 명확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4마디 뒤부터 시작되는 크레셴도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좋은 선택이다.
문지영 씨는 이 부분에서 또한 특별한 셈여림 변화 없이 전개했고 그 뒤의 크레셴도 또한 부족함 없이 표현해 주었지만 너무 어렵고 비효율적인 길을 선택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동안 도미넌트 화음이 지속되다가 다시 E 베이스의 화음이 오는데, 이번에는 E major 화음이 아닌 C major의 전위 화음이 온다. E major 화음의 대리화음으로 사용되었다고 이해하는 것보다 더 명확한 설명은 없을 것이다.
이때 처음에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이 E 베이스의 C major 화음이 Secondary Dominant로 기능하여 곧바로 도미넌트로 이어지는데, 세 번째 반복할 때는 G 베이스의 C major 도미넌트가 오는 변칙을 준다.
이게 변칙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연주하는 것과 아닌 경우는 큰 차이가 있다. 악보에도 셈여림의 대비가 포르테에서 피아노로 발생하지만 있는 그대로 피아노로 연주하는 것보다는 앞전의 피아노들과는 확연히 대비를 주어, 거의 피아니시모에 준하는 여린 셈여림으로 표현해주어야 그 느낌이 산다고 생각한다.
앞의 피아노들과의 차등이 없다면 이 화음의 특수성이 드러나지 않게 되고, 변칙으로써의 효과도 반감될 것이다.
이 부분에서 연주자가 음색을 뒤집어 가볍게 처리한 표현이 좋아서 기억에 남는다. 내가 상상했던 바로 그 사운드였다.
지금까지의 B파트 전체의 화성 진행을 요약하여 큰 화성적 뼈대가 되는 진행을 찾아낼 수 있다. 다음과 같다:
A flat major(토닉) - a flat minor(토닉 마이너) - F flat(E) 증6화음(Secondary Dominant) - E flat (도미넌트)
이 진행을 기반으로 약간씩 가감하여 계속해서 곡을 전개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 진행은 앞의 내용들을 잘 숙지했다면 알아차렸겠지만, 앞서 1번과 2번에도 큰 뼈대로써 작용했던 진행이다. 슈베르트의 순환 형식에 대한 연구의 산물 중 하나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사실 A파트에도 지배적인 진행은 아닌지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이 증6화음, 즉 독일6화음이 되는 D flat major 화음이 활용되기도 하고, 같은 화음이 나중에 코다에서 큰 뼈대로써 작용하는데, 이는 뒤에서 설명하겠다.
그 후 앞에서 양손에서 연주되던 스케일이 연주되며 마침내 조성이 내림가장조로 안정되는가 싶었지만, 곧바로 A'파트를 향한 경과구가 시작된다.
서로 도미넌트 감7화음을 공유하고 있는 3도권 관계의 내림가장조와 바장조의 특성을 이용하여 전조하게 되는데, 전조가 이루어진 후 메인 주제가 나오지만 곧바로 원형 그대로 복귀하지 않고 약간 변형하여 일종의 도입부를 만든다.
이러한 것도 모두 형식과 조성, 주제 변화점을 분리하기 위한 시도로,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하이든 등의 대가들이 즐겨 사용한 기법이며 브람스는 이를 아주 체계적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False Recapitulation"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주로 소나타 형식에서 사용되는 용어지만 반복되는 구조가 있는 한 론도나 3부 형식에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다. 한국어로는 학계에서 통용되는 번역어가 없지만 자의적으로 하자면 "위장재현" 정도가 되겠다.
쉽게 말해 진짜 재현부가 오기 전에 나오는 가짜 재현이라고 보면 된다. 슈베르트 또한 비슷한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 소나타 20번 가장조, D.959>의 종 악장 론도의 반복구가 재현될 때 다른 조성인 F sharp major로 위장재현한 후 자연스럽게 원 조성인 A major의 재현부로 전이하는 기법을 사용하였다.
방금 언급한 소나타의 경우처럼 다른 조성으로 아예 통째로 전조하여 재현하는 척하다가 일부만 재현하고 뒷부분을 변형하여 진짜 재현부로 잇는 방법과, 해당 조성 내에서 같은 선율에 다른 화음을 붙이는 리하모니제이션을 통해 토닉으로 자연스럽게 회귀하는 방법도 있다. 이 곡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로 볼 수 있다.
이 위장재현도 음악적으로 아주 흥미로운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후에 새로운 글로 다룰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겠다.
이렇게 위장재현되어 주제가 반복, 활용된 후 진짜 재현이 오기 전 브릿지에서 테너 성부의 움직임이 아주 매력적인데, 이 부분에서 연주자의 표현이 아주 좋았다. 셈여림 뉘앙스와 루바토 모두 재현부로의 전이 직전 적절한 긴장과 기대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거듭 말하지만 이런 사소한 디테일들이 모여서 더 완성도 높은 연주를 만드는 것이다.
일부 연주자들은 소프라노 성부에만 집중하여 테너 성부의 표현에 충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슈베르트가 애써 만든 반음계 내성 진행을 무시하고 그저 같은 도미넌트 음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소프라노에 치중하는 것은 큰 실수다.
이제 A'파트가 앞과 비슷하게 반복된 후 코다를 향하는 긴 경과구를 만드는데, 이 부분부터 코다의 시작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조성이나 중심이 되는 음이 유지되지 않고 계속해서 변화하기 때문이다.
A파트의 헤미올라 리듬을 활용하여 긴 화성적 리듬을 만들고 있는데, 이 부분의 첫 화음이 D flat major, 원 조성인 바단조 기준으로 독일화음 관계에 놓이는 화음이다.
물론 이 화음이 곧바로 도미넌트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이 화음이 바단조의 Secondary Dominant로 작용하여 도미넌트로, 또 코다로 이어졌음을 큰 뼈대를 통해 보면 보이므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코다는 같은 조성의 브람스 <피아노 5중주 바단조, Op.34> 1악장의 코다를 떠올리게 만든다. 화성 진행은 차이가 있지만 특유의 그 격정적인 분위기가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변격 진행인 4도 하행의 연속 진행이 형성되면서 상당히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마지막의 스케일 하강에서는 쇼팽의 <발라드 4번, Op.52>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Op.57>의 코다가 떠오르기도 한다는 얘기도 했었던 것 같다.
이 마지막 부분의 스케일은 사실 B파트의 주제를 활용한 것인데, 화음을 찍어주면서 끝나면 종지감이 강하지만 이 곡의 경우는 스케일만으로 종지하기 때문에 종지감을 형성하기가 쉽지 않다.
마디 수도 4배수 단위가 아닌, 그것도 홀수인 7마디로 형성되는데, 음을 빼지 않고 최고음인 F에서 최저음인 F까지 음을 빼지 않고 스케일을 만들면서 생기는 결과지만 이 역시도 종지 맥락을 만드는데 연주자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연주로써 확실히 마지막 F음을 통해 마침표를 찍어주지 않으면 들었을 때 끝난 건지 안 끝난 건지 확실하게 느낌이 오지 않는다는 큰 문제가 생긴다. 이 곡이 단순히 한 곡의 마무리일 뿐만 아니라 4곡의 세트의 전체 마무리이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아쉽게도 저음 부분이 너무 울려서 그런진 몰라도 나는 마지막 F음을 확실하게 전달받지 못했다. 소리가 멈춘 후에야 비로소 곡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도적으로 저음부 스케일 구간에서는 울림을 줄여서 마지막 음을 향하는 지향성, 그리고 그 목적지를 명확하게 표현해주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마무리가 되었을 것인데, 아쉬울 따름이다.
본 프로그램이 끝나고 연주자는 앵콜으로 4개의 곡을 연주하였는데, 어떤 곡을 연주할까 한껏 기대하던 와중에 연주자가 첫 곡을 연주하였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프로그램인 즉흥곡 4번을 들으면서 이 곡이 동 작곡가의 <악흥의 순간> 3번과 참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는데, 마침 이 곡을 첫 앵콜 곡으로 연주한 것이 아닌가?
두 곡의 조성이 바단조로 같다는 것 이외에, 꾸밈음이 주요 모티브로 사용되고 특유의 익살스러운 분위기가 곡 전반에서 느껴진다는 점, 왼손 반주의 음형이 유사하다는 점 등 이 두 곡은 정말 쌍둥이 같은 곡이었다.
연주자 또한 나의 이런 생각에 공감이라도 한 듯 해당 곡을, 즉흥곡 4번에 바로 이어서 이 곡을 연주하였다.
이어서 슈베르트 음악의 핵심인 가곡 세 곡이 연이어 연주되고 마침내 모든 공연이 마무리되었다.
순서대로 <물래 잣는 그레첸(Gretchen am Spinnrade), D.118>, <물 위에서 노래함(Auf dem Wasser zu Singen), D.774>, <백조의 노래(Schwangesang), D.957> 중 4번 세레나데(Ständchen)가 연주되었다.
나머지는 모두 리스트의 편곡 버전으로 연주되었고 마지막 곡의 경우 무대 뒤에서 등장한 남성 분과의 포핸즈로 연주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연주자의 남자친구이신 피아니스트 막시밀리안 트레보였다고.
앵콜 무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음악적인 평가는 하지 않을 예정이다. 추가 무대일 뿐이고,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 생각한다.
다만 선곡에 대해서만 언급하자면 솔직히 마지막까지 슈베르트로 일관될 줄은 몰랐는데 그때 다시금 무대 전에 본 연주자의 자필문이 떠올랐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슈베르트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작곡가와 그의 곡에 대한 경의와, 그가 겪었을 고통에 전하는 위로. 그녀는 이로써 비로소 할 일을 마쳤다.
그리고 가곡의 편곡을 본 프로그램에 포함하지 않은 것도 곱씹어보니 메인 프로그램에 원곡이 아닌 편곡된 작품을 넣는 것 또한 스스로 용납하지 못한 것 같다.
그렇기에 연주자 개인이 애정하는 곡들이지만 본 프로그램에는 넣지 않고 앵콜로, 무대의 마무리로 세 가곡들을 선택한 듯하다.
그녀의 이런 아주 꽉 막히고 타협이란 일절 없는 꼰대 같은(?) 면모가 참 마음에 드는 하루였다.
연주회가 끝나고 집을 향할 때는 이미 비가 그쳐 있었다. 그러나 비가 온 후의 습한 공기 탓에 마냥 상쾌하지 않았다.
많은 것을 느끼고 큰 감동을 받았지만, 마음 한 켠에는 훌륭한 연주를 보고 난 후의 후련함보다는 찝찝한 감정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분명히 나는 그것이 슈베르트의 고통에 공감하고자 노력했던 연주자의 의도였으리라 생각한다.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만이 예술은 아니기에. 훌륭한 예술가라면 불편한 감정 또한 표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해소 없는 고통은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지만, 고통 그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야기는 또 달라지는 것이다.
많은 부분에 대해 지적을 하고 부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의견도 부득이 표했지만 사실 이렇게 소상히 쓸 가치도 없는 연주들이 너무 많기에, 나로서는 좋은 연주에 대해 남길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을 보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굳이 이렇게 길게 쓴 것도 이 슈베르트의 즉흥곡들이 워낙 유명하고 작품성이 뛰어난 곡들이라 얘기할 것도 많고, 많은 이들에게 이 곡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고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알릴 필요성을 느꼈다.
이렇게 공연이 끝난 지 한 달 반이 넘게 지나서야 이 글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쓰다 보니 이런 명곡들에 대한 글을 쓰는데, 연주자의 노력과 정성을 봐서라도 단 한 줄이라도 허투루, 잘못된 내용을 담아서는 안 되겠다는 책임감이 생겨 하나라도 더 많은 자료를 찾아보고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쌓여 이렇게 퇴고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다음부터는 될 수 있으면 공연 전에 쓸 수 있는 곡에 관련된 내용들은 미리 써두고 공연이 끝난 후에는 연주에 관한 내용들만 서술하는 방식으로 글을 분리해볼 생각이다.
혹자는 고작 공연 후기에 왜 이렇게 쓸데없는 내용을 많이 쓰냐는 얘기를 할 수도 있겠다. 내가 좋으면 좋다고 얘기하고, 싫으면 싫다고 얘기하면 그만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그러나 그런 식으로 예술을 대해 온 결과가 지금의 포스트모더니즘 예술이다.
작곡도 그렇지만 연주 또한, 순간의 영감과 감정, 심상 등으로 전체 곡을 끌고 가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며, 진실로 예술에서 한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끊임없는 이성의 사유와 반성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 자체로 완전한 자연법칙 하에서 음악은 비로소 절대성을 추구할 수 있으며, 그 자연의 법칙에서 유래되는 "Nature of Music"을 평생을 바쳐 진실로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만이 뛰어난 음악가가 되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연주자들에게 '어디까지 연주자가 표현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음악이 지속되는 한 멈추지 않을 화두일 것이다.
나도 이에 대해서 내 나름대로 최선의 결론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유일한 정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모든 답이 맞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근 몇십 년간의 끔찍한 풍조 중 하나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허울뿐인 미명 하에 이성의 잣대 없이 그저 다르기만 하면 좋게 평가하는 우매한 인간들이 예술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본인들이 작곡한 곡을 제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야 관심 밖이지만 작곡가의 의도를 무시하고 곡해하는 것에서 모자라 음악 그 자체의 본성과 그것이 내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이들이 다수가 되어버린, 이런 참혹한 현실을 만든 그들을 비판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런 부류들 중 다수가 각 작곡가를 대표하는 이른바 스페셜리스트로 널리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뜯어보면 연주들이 죄다 볼품없는 수준인데도 말이다.
이렇게 비관적인 상황에 놓여 있는데 그들을 따르는 젊은 연주자들에게서 어떻게 좋은 음악이 나올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행히도 여전히 훌륭한 교육자들과 연주자들이 소수 남아있지만, 끊임없이 연구에 매진하는 참된 음악인들은 세상의 빛을 보기가 어려운 법이다.
인기에 편승해 충분한 사고를 거치지 않은 수준 낮은 연주를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 내는 이들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스스로의 예술을 기성 예술과 다르다고 착각하는 집단적 망상증이 언제쯤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선대 작곡가들이 이룬 예술을 망치는 반달리즘을 근절하기 위해 나는 조금의 노력이라도 보태는 것을 앞으로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에 후기 하나를 씀에도 객관성과 합리성에 기반하여 평가하려고 노력했기에 나의 글을 통해 단 한 명의 음악인이라도 눈을 뜨게 하고 이성의 빛을 볼 수 있게만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할 것이다.
비음악인에게도 음악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익한 글이 될 수 있도록 최대한 풀어서 설명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자 한다. 물론 단번에 이해하기 쉬운 내용도 아니고 기반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한 내용들이기에, 부가적으로 필요한 기본적인 이론들 또한 감상자들을 위해서 기존의 이론서들과 다른 패러다임으로 설명해볼 예정이다.
말하자면 음악인들에게는 "어떻게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고, 감상자들에게는 "어떻게 음악을 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도 동시에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곡들의 연주 규범을 제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문지영 씨의 슈베르트에 대한 각별함과 그 마음을 담은 연주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하며 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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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odbeck, D. L. (1984). BRAHMS AS EDITOR AND COMPOSER: HIS TWO EDITIONS OF LANDLER BY SCHUBERT AND HIS FIRST TWO CYCLES OF WALTZES, OPERA 39 AND 52 (DANCE; AUSTRIA). Dissertations available from ProQuest. AAI8422889.
https://repository.upenn.edu/dissertations/AAI8422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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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Ländler. (2020, December 29). In Wikisource . Retrieved 07:55, August 17, 2022, from https://en.wikisource.org/w/index.php?title=A_Dictionary_of_Music_and_Musicians/L%C3%A4ndler&oldid=10764380
HAM, I. (2005). FRANZ SCHUBERT'S IMPROMPTUS D.899 AND D.935: AN HISTORICAL AND STYLISTIC STUDY [Doctoral dissertation, University of Cincinnati]. OhioLINK Electronic Theses and Dissertations Center. http://rave.ohiolink.edu/etdc/view?acc_num=ucin111498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