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30 아름다운 목요일 피아니스트의 노트 - 문지영
프로그램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1797 - 1828)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독일 춤곡, D.790
Zwölf Ländler für das Pianoforte, D.790/Op.171 (1823)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즉흥곡, D.899
Vier Impromptus für das Pianoforte, D.899/Op.90 (1827)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왈츠, D.145
Zwölf Walzer für das Pianoforte, D.145/Op.18 (1821)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즉흥곡, D.935
Vier Impromptus für das Pianoforte, D.935/Op.142 (1827)
다음으로 두 번째 프로그램인 즉흥곡 D.899가 연주되었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작품 중 가장 잘 알려진 세트 중 하나로 특히 3번이 그 아름다운 멜로디와 서정성으로 유명하다.
최초의 즉흥곡은 슈베르트의 친구였던 보헤미안 작곡가 얀 바츨라프 보리셰크(Jan Václav Voříšek, 1791-1825)가 1822년에 출판한 즉흥곡 Op.7으로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보리셰크는 3년 후인 1825년에 34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그로부터 3년 후인 1828년에 슈베르트는 두 세트의 즉흥곡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보리셰크의 즉흥곡은 스타일 자체가 좀 더 베토벤의 초기 스타일과 닮았고, 베토벤의 바가텔 Op.33을 연상시키는 반면 슈베르트의 즉흥곡은 내용과 규모 측면에서 훨씬 더 방대하고 심오하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악흥의 순간>이 6곡이라는 구성과 3부 형식의 적당히 짧은 길이 등 많은 점에서 닮았고, 이름은 같지만 슈베르트의 즉흥곡은 서사적인 측면이 강하다.
슈베르트는 말년에 소나타 형식에서 많은 발전을 보여 스스로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하기도 했는데, 이 후기 스타일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현악 5중주 D.956과 교향곡 C장조 D.944 등이 있다.
그러나 슈베르트 음악의 정수이자 그가 일생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가장 많이 발전시킨 분야는 다름 아닌 가곡일 것이다.
이 가곡들은 대부분 A - B - A'의 3부 형식으로 작곡되었는데 애초에 3부 형식을 혹자는 가곡 형식(Song form)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본격적으로 가곡이 발달하기 이전 오페라의 아리아에서도 이 3부 형식이 지배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이 즉흥곡들도 대부분 3부 형식으로 작곡되었는데 작곡가가 평생 동안 연마해온 3부 형식에 대한 연구의 결과가 온전히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1번을 혹자는 변주곡이라고 얘기하기도 하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 편이다.
두 가지의 주제가 집요하게 반복되며 전개되지만, 변주곡의 형태를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A - B - A' - B' - A"의 론도 형식에 가깝다. 그리고 두 번째 주제를 소나타의 2주제로 본다면 론도 - 소나타 형식으로 볼 여지도 있다고 본다.
아무튼 이 곡을 연주할 때 중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주제들을 모두 다르게 표현하여 지루하지 않게 곡을 끌고 가는 것이다.
정말 단 두 가지 주제만 가지고 곡을 전개시키기 때문에 미묘한 변화들을 잘 캐치하여 적극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자세히 다뤄 보고자 한다.
이 시기 슈베르트 음악의 특징은 같은 으뜸음을 가진 장조와 단조 사이의 전환을 매우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장단조 전환은 화성 이론적으로 분석이 불가능한 진행으로 오로지 감정의 표현에만 집중하여 지극히 낭만적인 맥락에서 사용하는 진행이다.
물론 모차르트나 베토벤 같은 고전파 작곡가들도 즐겨 사용한 진행이지만, 슈베르트는 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감정의 변화를 더욱 강하고 극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예컨대 다른 작곡가들은 일반적으로 장조에서 단조나 그 반대로 전환할 때 도미넌트 화음 등 다른 화음을 끼워 넣어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괴리를 완화한다면, 슈베르트는 중간 과정 없이 바로 전환하여 마치 조울증에 걸린 것처럼 기쁨과 슬픔의 감정이 끊임없이 대립한다.
그 당시 슈베르트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생사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슈베르트 자신의 모습을 투영한 듯하다.
아무튼 이러한 진행이 굉장히 자주 등장하고 슈베르트가 곡을 전개함에 있어 주요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음색을 전환하거나, 셈여림의 대비를 주거나 하는 등의 방법으로 장단조의 대비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연주하는 데 있어 중요하다.
이 곡에서도 이러한 장단조 전환이 자주 등장하는데, 연주자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간혹 화성이 주는 느낌을 잘 캐치하지 못하는 연주자가 있는데, 이런 연주자는 결코 좋은 연주자가 될 수 없다.
화성은 작곡가가 사용하는 언어인데, 앵무새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알아듣지 못하면서 하는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을 보고 우리가 말을 한다고 하지 않듯이, 연주자는 화성을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감각이 없다면 공부를 해서라도 익혀야 하는 것이 화성인데, 안타깝게도 많은 연주자들이 자신이 연주하는 곡의 조성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연주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 같다.
곡을 이해하기 위해 그 곡의 작곡 배경, 작곡가의 일생, 평전, 편지 이런 것들을 읽어보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 모르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지영 씨는 따로 이러한 것을 깊게 공부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음악적인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건 교육을 받는다고 단기간에 길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젊은 연주자가 그런 감각을 갖고 있다는 것은 상당히 귀한 일이다.
21세기 연주자들에게 테크닉적으로 너무나도 과한 것들이 요구되는 경향이 있고, 연주자들은 그런 부차적인 것을 연마하기 위해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보내고 있다.
그게 안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핵심과 본질은 다른 곳에 있는데 손가락만 열심히 돌리고 음악은 없는 그런 연주를 들을 때마다 교육이 너무 한쪽에 치우쳐져 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문지영 씨는 일단 테크닉적인 부분들은 궤도에 올라 이미 콩쿠르에서 검증받기도 했고, 그걸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음악 전반에 대한 공부를 앞으로 잘해나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지영 씨 연주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이 부분에서 어떠한 포인트를 살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대체로 잘 알고 있고 그걸 표현할 때 과하게 하지 않고 그냥 알고 있다는 티만 내는 느낌이었다.
음악에 대해 자기가 그 안에 들어가지 않고 관조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은 연주자에 있어 도움이 많이 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연주하는 자신이 듣는 음악도 중요하지만, 평생 골방에서 혼자 연주할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리사이틀에서는 듣는 사람이 어떻게 듣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서는 음악에서 한 발짝 나와서 객관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이로울 때가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는, 콩쿠르도 아니고 개인 무대인데 조금 더 과감한 시도를 해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이번 공연처럼 금호아트홀 같은 작은 홀에서 가지는 리사이틀은 어떻게 치든 아무도 뭐라고 안 하는데 말하고 싶은 것도 좀 확실하게 표현하고 좀 더 본인의 주관을 드러내도 좋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러기에는 눈치 보일 사람이 딱 한 명 있긴 하다. 슈베르트.
이번 공연에서 문지영 씨는 슈베르트 눈치를 많이 본다는 게 느껴졌다. 아마 슈베르트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앞서 언급했던 주제의 다양한 양태에 대한 표현 문제는 이 곡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주제가 제시되기 전, 즉 곡의 가장 첫머리에 다단조의 도미넌트인 G음의 4중 옥타브가 강하게 연주된다.
이 G 옥타브는 초고에는 없었다가 나중에 추가된 것인데, 이게 있고 없고의 차이가 굉장히 크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넣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집요하게 계속되는 셋잇단음표 연타를 암시하는, 음은 하나뿐이지만 곡 전반에서 나타나는 정말 중요한 모티브이다.
이 음이 제시된 후 주제가 제시될 때 실제 울림은 끊어져도 우리의 머릿속에서 이 음이 계속 울리고 있기 때문에 뒷부분을 연주할 때도 이 울림을 염두에 두고 그 위에 쌓아야 한다.
음 하나뿐인데도 곡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일종의 서주의 역할을 하고 있기에 음 하나에 모든 것을 담아야 하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연주자가 많은 심혈을 기울였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매우 만족스러웠다. 마치 벼락이 내려치는 듯 단호하게 선언적으로 시작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첫 음의 울림이 사라지고 주제가 아무런 화성 없이 제시된다. 그러나 직전에 연주된 G 옥타브가 여전히 뇌리에 남아있다는 점을 통해 기저에 G음이 페달 톤처럼 깔려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첫 옥타브를 통해 기대감을 한껏 올려놓은 사이, 피아니시모로 메인 테마가 제시되는 것을 듣고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음의 단호함은 어디 가고 가늘고 다 죽어가는 듯한 유약한 소리가 나는데 피아노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가 아닐까 싶었다.
이 곡의 많은 연주를 들어보았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표현은 들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직후에 화성과 함께 반복되면서 다단조의 조성이 확립된다. 직전에 주제만 제시될 때는 페달을 사용하여 레가토 뉘앙스를 강조했다면, 이번에는 앞과의 대비를 확실하게 주기 위해 페달의 사용을 절제하여 연주하였다.
그다음에는 주제의 앞부분이 약간 변화되어 전개되는데, 슈베르트 멜로디 전개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굳이 기호화하자면 a - b - a'(또는 c) - b 이런 식인데, 저 a'에서 조성에 약간의 변화를 주어 잠시 분위기를 전환하거나 다른 곳으로 갈 것 같은 기대감을 주고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전개다.
이것이 단조 곡에서 사용되면 아주 비극적인 느낌을 주는데, 실낱같은 햇빛이 비추고 나서 되풀이되는 절망이 더 비극적으로 다가오기 때문.
물론 슈베르트는 이러한 전개를 장조 곡에서도 살짝 긴장을 주기 위해 자주 사용하곤 했지만 단조에서 훨씬 효과적으로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나는 이러한 느낌을 연주에서도 좀 살려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는데, 대부분의 연주자는 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생긴 것만 봤을 때는 코드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a와 b의 대비만 신경 쓰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의 작곡가였다면 이렇게 연주했어도 무방할 것이나 슈베르트는 이보다 훨씬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슈베르트를 반복 일색의 형편없는 전개를 일삼는 작곡가로 생각하고 평가하게 되는 이유는 슈베르트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탓이다.
반복이 많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한 번에 많은 것을 바꾸지 않고 점진적으로 변화해나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말을 한다면 누군가는 "나는 A를 했어. 그러고 B를 했더니 C가 됐어."라고 하는 반면 슈베르트식 전개는 이런 식이다. "나는 A를 했어. A를 하고 나서, 조금 뒤에 B를 했어. A를 하고 나서 B를 했더니..."
이러한 전개는 사람에 따라서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지만, 섬세한 변화를 잘 캐치하는 사람이라면 슈베르트만 한 게 없다고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슈베르트를 연주할 때 연주자의 역할이 더더욱 중요한 이유다. 사람들에게 좀 더 이러한 세밀한 감정의 변화를 잘 와닿게 전달할 수 있도록 사소한 부분도 놓치지 않고 표현해주어야 음악이 산다.
물론 이 부분에서 워낙 연주자의 표현이 좋았어서 별 불만은 없었지만, 누군가는 이렇게 쳐 주었으면 하는 바람에 몇 자 써보았다.
이어서 슈베르트답게 같은 주제를 한 번 더 반복하는데, 원래 화음 없이 제시되었던 주제에 이제 화음이 붙어서 나오기 때문에 이전과 다르게 화음이 붙어있다는 것에 유념해서 들어야 한다.
이전 화성에서는 G음, 즉 도미넌트가 강조된 반면 이 부분에서 붙은 화음은 의도적으로 도미넌트 음을 회피하고 유보하여 좀 더 불안정한 소리를 내고 있다.
이후 반복이 끝나고 끝 부분을 활용하여 A파트를 마무리하는 종결악구가 등장하는데, 이렇게 또 비슷한 선율에 음 하나씩만 바꾸고 화음을 다르게 붙여서 방향 전환하는 기점으로 삼고 있다. 이런 부분을 절묘하게 살려줘야 슈베르트를 잘 친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뒤쪽 피아니시모 부분에서 음색을 확 뒤집어서 가볍게 처리하는 것을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는 그러한 음색 전환이 조금 소극적인 면이 없잖아 있었다.
이제 내림가장조의 B파트가 시작되며 2주제라고 할만한 주제가 제시된다. 사실 2주제라고 하지만 리듬적 특성이나 연타 같은 많은 속성들을 1주제와 공유하고 있어서 그렇게 대비되는 성격의 주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제의 전개 방식도 살짝 다르면서 유사성을 지녔다는 것이다.
왼손에서 한 단위가 반복되기 전까지 멜로디 전개의 구조가 a - a' - b - a" 이런 모양새이다. 이때 b의 조성이 a의 조성인 내림가장조의 단3도 위인 내림다장조가 되는데, 앞서 A파트에서도 b의 조성이 원 조성인 다단조의 단3도 위인 내림마장조가 된다. 조성 구조를 맞추어 통일성을 주고자 하는 시도이다.
그리고 이런 작은 단위에서의 조성 구조를 큰 단위에서 반복하지 않기 위해 큰 단위 조성은 A파트의 다단조에서 B파트의 내림가장조로 장3도 아래로 이동하여 분리하는 것도 눈여겨볼만하다. 이런 부분은 사실 내적인 통일성을 위한 일치로 보이고 연주와 어떻게 연결시킬지는 좀 더 고민해봐야 할 측면인 듯하다.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연주의 거시적 흐름을 결정하는 데 있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특히 이 B파트에서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같은 주제가 왼손에서 반복되고 종결구로 넘어가는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앞서 이 B파트 주제의 구조가 a - a' - b - a" 이런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했는데, 다시 반복될 때는 맨 마지막 a"가 생략되고 a - a' - b 이렇게 연주되고 다음 파트로 넘어가버린다.
이렇게 넘어갈 때 조금이라도 리타르단도(ritardando)를 해주지 않으면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는데, 일단 구조적으로 완결되지 않고 갑작스럽게 종결되어 다른 파트로 넘어가서 그렇고, 단위도 짝수 단위가 아닌 홀수 단위로 끊기게 되어 자연스럽게 전개되지 않고 훨씬 더 어색하게 들리게 된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의도된 결과이다. 슈베르트는 마디도 홀수 단위로 끊어 많이 사용하였고 베토벤, 브람스 등 이 분야에서 악명 높은(?) 사람들이 몇 있지만 슈베르트도 이 사람들 못지 않게 장난을 많이 친 편이긴 하다.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지면 안 그래도 반복이 많은 슈베르트 음악이 더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 파트에서의 전환은 청자를 깜짝 놀라게 해야 하는 부분이 아니다. 오히려 뒷부분에 나오는 아름다운 선율로의 자연스러운 연결이 필요한 부분이라 중간에 숨을 쉬어주거나 할 부분도 아니다.
아무리 악보에 표시된 리타르단도만 하는 것을 고집한다고 해도 이런 부분에서 느려지지 않는 건 곤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연주자의 소신은 존중하지만 이런 부분에서 느려지지 않고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참 의문스러운 일이다.
뒤이어 이 곡에서 가장 달콤한 멜로디가 등장한다. 아마 직전 종결구의 마지막 부분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멜로디가 한 번 반복되는데, 이때 윗 성부에 대선율(counterpoint)이 추가된다. 그런데 엄연히 대선율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조해주게 되면 성부에 혼동이 오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많은 연주자들이 단지 가장 위에 있는 노트라는 이유로 서로 다른 성부에 있는 멜로디를 연결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아래 첨부한 악보를 보면 처음 제시될 때와 반복될 때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분명하게 다른 레이어로 분리되어야 하는데, 이 날도 내 귀에는 저 빨간색으로 표시된 레이어와 이어지게 들렸다. 기본적인 내용이기에 더욱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잠깐의 달콤한 꿈은 사라지고 다시금 처음으로 돌아가기 전에 아주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B파트의 조성이 왜 내림가장조였는지 그 의미를 부여하는 패시지인데, 화성적인 맥락을 모르면 이게 왜 중요한지도 전혀 모르고 넘어가게 되는 그런 부분이다. 악보에도 악센트 이외에는 별다른 강조 표시가 없어 많은 연주자들이 간과하고 물 흐르듯이 지나가버리는 경향이 있다.
먼저 화성 진행을 보면 Ab major 코드에서 도미넌트 46화음으로 전이되는데, 그렇다면 앞의 Ab major는 어떻게 분석할 수 있냐면 흔히 독일6화음(German 6th)으로 불리는 증6화음 계열의 화음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엄밀하게는 이끈음인 F#이 누락되어 증6화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기능적으로는 Secondary Dominant(적합한 한글 표현이 없어 해당 단어는 부득이 영어로 기재한다. 도미넌트의 도미넌트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를 들어 가장조에서는 도미넌트인 E의 도미넌트가 되어 B 코드이다)에 해당하게 되어 같다.
너무 깊게 들어가면 끝도 없는 내용이라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단조의 도미넌트인 G의 기준에서 도미넌트는 G의 5도 위인 D가 된다. 이때 기본 3화음인 D - F# - A 그리고 7음인 C로 구성된 D 도미넌트 7화음은 증4도 관계(반음 6개 간격, C - F#처럼), 또는 트라이톤(tritone)인 Ab 도미넌트 7화음의 Ab - C - Eb - Gb와 2개의 음을 공유한다. (C, F# = Gb)
화음은 결국 음의 집합이기 때문에, 많은 음을 공유할수록 비슷한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 취급되고 이렇게 상당히 먼 것처럼 보이는 증4도 관계의 두 화음도 유사한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여겨졌다. 특히 이 트라이톤 관계에 놓인 화음은 각 화음의 이끈음을 공유하기 때문에 더욱 유사한 기능을 하게 된다. 앞의 예시에서는 D의 이끈음인 F#, Ab의 이끈음인 C를 서로 공유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 트라이톤 관계의 화음은 Secondary Dominant의 기능으로 사용되었고 그중 대표적인 세 화음은 각각 널리 사용되던 지역의 이름을 따 이탈리아(Italian 6th), 프랑스(French -), 독일6화음(German -) 이런 식으로 불리곤 했다. 리만 이론((Neo-)Riemannian Theory)과 같은 기능화성 이론에서는 그래서 이들 화음을 5음이 반음 하향한 Secondary Dominant로 분석한다.
이러이러한 이유로 원 조성인 다단조의 Secondary Dominant의 기능으로 Ab major가 사용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 진행이 베토벤이 이른바 후기라고 분류되는 시기에 아주 핵심적으로 사용한 조성 구조라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베토벤 연구의 산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닐 듯하다.
그런데 하나 문제가 남았다. D의 이끈음인 F#가 누락되었는데 어떻게 이 화음을 Secondary Dominant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 Ab - G의 반음 하향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이 진행은, 조성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기 이전에 사용되었던 선법에서 사용되었던 종지의 일종인데, 프리기아 선법(Phrygian mode)에서 사용하여 프리기아 종지(Phrygian Cadence)라고 한다. 이는 프리기아 선법의 종지음인 E음이 2도 위인 F와 반음 차이 나기 때문에 원래 7음인 D 대신 이끈음의 기능을 하게 되어 그런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의 예시를 첨부했다.
이러한 프리기아 종지는 선법 음악이 조성 음악으로 대체된 이후에도 살아남아 도미넌트로 이어지는 반종지 악구로 계속해서 사용되었고, 이게 앞에서 설명했던 Secondary Dominant - Dominant 맥락이다. 위 예시도 가단조의 반종지로 F - E 진행이 사용된 것인데, 이 곡의 예시와 정확히 같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도 원래 이끈음인 F#가 생략된 대신 Ab가 이끈음의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말 이례적으로 슈베르트는 옥타브 병행까지 하며 이 Ab - G 진행을 강조하고 있다. 잘 보면 바깥 성부인 소프라노와 베이스 모두 Ab에서 G로, 그것도 옥타브로 중복까지 하며 병진행하고 있는데, 이보다 이 진행을 강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러고 나서 우리는 가장 처음의 G 4중 옥타브를 떠올려야 한다. 비로소 처음으로 돌아와 조성도 내림가장조에서 원 조성인 다단조로 구분되는 아주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는 것을 이제는 알아야 한다.
물론 형식의 구분점은 누가 뭐래도 4마디 후인 87마디이고, 크레셴도와 포르테 표기도 이것 이후이지만 그 중간의 3마디는 긴장 형성을 통해 형식 분기점을 강조해주기 위한 그저 경과구일 뿐이다.
나라면 숨을 한 번 쉬든 리타르단도를 하든 템포의 변화를 주어 이 Ab - G 진행을 확실하게 강조해줄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별 기대는 없지만 연주자들도 이런 것들을 알고 연주에 반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좀 이론적인 내용들이 많았는데 이해하지 못해도 무방한 내용들이니 염려할 필요는 없다. 아무튼 이렇게 다시 A파트로 돌아오는데, 원래 화음 없이 연주되던 선율이 이번에는 G 옥타브의 셋잇단 연타와 함께 왼손에서 연주되는데, 앞에서도 언급했듯 이 옥타브 연타는 첫 G 옥타브의 에코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오른손으로 선율이 옮겨가고 G 연타를 왼손이 연주하는데, 뒤쪽의 베이스 움직임이 과하지 않게 잘 표현되어서 좋았다. 작곡가도 이 베이스라인을 살려줄 것을 요구하며 매 박마다 포르찬도(fz)를 넣어놨는데 강조하면서도 마지막 종지까지 끊어지지 않고 프레이징이 잘 이어졌다. 이런 부분들에서 왼손 표현에 강점이 있는 연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면 이제 A'파트에서 다음 B'파트로 넘어가는 경과구에서 아주 아름다운 반음계 진행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너무 물 흐르듯 지나가버린 것이 좀 아쉽게 느껴졌다.
확실히 도달점인 Ab 증화음 (아래 악보 두 번째 마디의 넷째 박의 화음) 같은 포인트에서 한 번 느끼고 넘어갔으면 이 매력적인 화성이 좀 더 와닿게 느껴졌을 텐데 너무 앞뒤 연결에 치중한 나머지 이렇게 빛나는 포인트를 놓치고 말았다.
B'파트가 시작되고 오른손에서 2주제가 연주되고 동시에 아르페지오 형태의 내성 반주를 연주하는데, 이 벨런스가 조금 부족했던 느낌이 있다. 멜로디를 더욱 살려주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테크닉적 난점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그것이 연주자가 의도한 소리였을 수 있으나 내 귀에는 멜로디가 내성에 의해 때때로 방해받는 듯한 느낌이었다.
추가로 이렇게 숨겨진 모티브들을 소소하게 살려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원래 부점 리듬의 첫 모티브 G - Bb - D가 악보상에는 생략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내성에 숨겨져 있다. 뒤에 한 번 더 나온다. 나 같은 사람들은 악보에 표시돼있지 않아도 숨은 의도를 파악하고 살려주는 세심한 연주에 감동을 받는 법이다.
이어 같은 멜로디가 왼손에서 반복되는데, 이 부분의 왼손 표현이 아주 좋았다. 긴 프레이즈의 옥타브 패시지에서, 특히 이런 포르테 패시지에서 노래하지 않고 시끄럽게 내려치기만 하는 연주자가 간혹 있는데 훌륭하게 아주 잘 표현했다.
딱 하나 아쉬운 점 꼽자면 이 멜로디의 앞부분이 비슷하게 한 번 반복될 때, 오른손에서 연주되는 코드가 단 하나 바뀌는데 D major 코드가 d minor 코드로의 변화이다.
누차 말하듯이 슈베르트는 디테일이 생명이다. 짚어주지 않으면 변화를 캐치하지 못하고 지나가기 쉬운 포인트인데 여기서 연주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뒤의 d minor 코드를 연주할 때 테누토를 하거나 아고긱 악센트(agogic accent)를 주고자 약간 길게 끌어 준다든지 하는 시도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뒤로는 비슷하게 반복되다가 다시 A파트의 세 번째 반복에서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바로 다단조에서 다장조로의 변화이다. 색으로 비유하자면 같은 색에서 명도를 확 높이는 느낌이랑 비슷한 듯하다.
나는 이 변화를 듣는 사람이 명확하게 인지할 수 있도록 톤을 바꾸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 문지영 씨는 이 포인트 대신 1주제가 메이저로 바뀌어 반복될 때 톤을 바꾸는 선택을 했다.
음역대가 바뀌기 때문에 이 편이 훨씬 표현하기 쉽고 효과적이긴 하지만 변화가 발생하는 포인트에서 바로 바꿔주는 것이 어렵더라도 여러모로 더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단조에서 장조로의 전환은 굉장히 불연속적으로 접합되어 있지만, 다시 슈베르트는 이를 단조로 끌고 가는 데 177마디부터 진행되는 이 과정은 굉장히 점진적으로 일어나 언제 장조로 바뀌었냐는 듯 다시 다단조로 조성이 돌아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끌고 감과 동시에 남은 한 방을 위해 의도적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나는 이 부분을 이 곡의 클라이맥스로 큰 텐션을 주어 그것이 해결되면서 오는 해결감, 긴장의 완화를 통해 곡을 종결하기 위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다단조에서 A major 7화음은 조성 안에 있는 화음도 아니고 자주 사용되는 화음도 아니다. 화음의 구성음인 A - C# - E - G 중 단 한 음 G음, 그것도 7음만이 다단조의 음계 내에 있는 음이다.
게다가 이 부분에서 원래 안정적인 토닉 계열의 화음이 오다가 이 부분에서 같은 선율에 이런 화음을 붙여놓음으로써 예상과 다른 이상한 화음이 나오니 청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같은 선율에 다른 화음을 붙이는 것을 리하모니제이션(reharmonization)이라고 한다. 바흐, 모차르트와 베토벤 등 대가들의 작품에서 종종 관찰되고, 슈베르트 이후에는 브람스가 이를 매우 체계적으로 사용한 바 있다.
나는 이 부분이 이 곡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처럼 보여서 특별히 더 강조해 주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많은 연주자들이 이 부분을 그냥 물 흐르듯 지나치곤 한다. 판단은 여러분의 몫이다.
이어 감7화음 계열의 화음이 이어지다가 다시 다장조를 암시하는 듯한 패시지가 나오는데, 토닉까지 강조하면서 이번에는 끝나는가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제를 또 한 번 반복한다.
정말 소름 돋는 건 이렇게 장조로 전조해놓고 또다시 단조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정말 질척거린다고 느껴질 만큼 손을 놓아주지를 않는다.
마치 꺼져가는 등불처럼 장조와 단조를 계속 스위칭하면서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는데, 이것이 슈베르트가 장단조 전환을 다루는 방법이다.
곡은 마침내 장조를 확정하며 마무리짓지만, 그것이 더 이상 전혀 희망차거나 밝게 들리지 않게 된다. 오히려 장조의 E와 단조의 Eb가 충돌하면서 아이러니함만 강조될 뿐이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내 빈 원전판 악보에는 이 부분에 ppp(피아니시시모)의 셈여림 표시가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전에 랜틀러에 관해 말했을 때 언급했듯 아마도 약음 페달을 사용할 것을 지시하는 것일 수 있다. 아래 악보의 첫 부분에 원래 ppp라고 적혀있는데, 이 악보에는 누락되어 있다. 이 부분은 약음 페달을 사용해도 아주 좋을 부분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센트 표기는 되어있지만 이제는 힘을 거의 잃어버리고 꺼져가는 G 옥타브를 주목하자.
2번은 1번의 단3도 위 조성인 관계조(Relative Key; 우리말로 나란한조라고도 하는데 같은으뜸음조를 의미하는 Parallel Key와 매우 헷갈리는 용어라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내림마장조의 곡으로, A - B - A - B'(Coda)의 3부 형식이다. A는 또 작은 a - b - a'로 구분되는 3부 형식으로 볼 수 있고, B는 두 파트로 나뉜다.
A파트와 B파트의 대비를 표현하는 것이 핵심적인데, B파트의 조성이 나단조로 내림마장조에서 선택할 수 있는 3도권 조성 중에서 가장 멀리 있는 조성이다. 그만큼 조성 관계도 멀고 분위기도 많이 다르다. 이 관계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다뤄보겠다.
한 가지 공유하는 특징이 리듬인데, 왼손에서 두 번째 박을 찍어주고 셋째 박을 비우는 모양이 같다.
그런데 악센트의 위치는 완전히 반대인데, A파트는 첫 박에 악센트가 찍히는 반면 B파트는 둘째 박에 강세가 생긴다. 이런 차이점을 잘 유념하여 연주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 부분의 셋잇단음표의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1번에서의 무게감 있는 음색은 어디 가고 높고 멀리 띄워서 공중에서 음이 빛나다 사라지도록 만들었다. 아주 좋은 표현이다.
끊임없이 흐르는 셋잇단음표를 박자에 얽매이지 않고 프레이징을 길게 가져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잘해주었다.
다만 이 곡에서도 장단조 전환이 A파트의 a - b 전환 사이에서 발생하는데 이 포인트에서 나는 음색을 확 뒤집는 것을 기대했는데 그러한 반전이 조금 부족했던 것 같다.
이어서 다시금 처음의 a파트가 반복되는데, 이때 원래 주제의 뒷부분을 활용하여 하나의 큰 상승 곡선을 만들어 A파트의 작은 클라이막스를 형성한다.
나는 이 변화하는 포인트, 아래 악보에서 크레셴도가 시작되는 마디를 들어갈 때 호흡을 한 번 해주거나 수비토 피아노(subito piano; 갑자기 작아질 것을 지시하는 셈여림 표현)를 통해 변화하는 포인트를 확실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수비토 피아노를 통해 셈여림을 줄여주면 상승을 통해 도달하는 포르티시모로의 셈여림 방향성도 훨씬 더 극적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문지영 씨를 포함한 요즘의 연주자들은 악보에 표시되지 않은 셈여림 표현을 자제하는 편이라 그러한 시도를 잘하지 않지만, 나는 하는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른 것은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맞지 않겠는가?
이렇게 분위기를 고조시켜놓고 다시금 단조로 전환하여 끝없이 아래로 추락하는데, 마치 지금까지 부풀어있던 행복감이 모두 허상이라고 말하듯 A파트는 그대로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는 단호하고 어두운 나단조의 B파트로 그대로 이어진다.
이 부분에서 나오는 포르잔도(fz)를 표현하기 위해 문지영 씨가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 연주자 못지않은 음량이 인상적이었다. 큰 홀은 아니었지만 홀을 꽉 채우기에 충분했다.
앞서 장단조 간의 대비의 표현이 부족했다는 언급을 했는데 이러한 절제가 어쩌면 B파트와의 대비를 위한 것이었다면 이해가 된다. 실제로 이 부분에서는 무게는 그대로 빼놓고 음색만 조금 어둡게 바꾸었다면 B파트에서는 1번에서 사용했던 그 무거운 음색이 다시 돌아왔었다.
셈여림의 대비가 자주 나타나는 특성도 훌륭하게 잘 표현했다. 이번에도 문지영 씨는 악보의 셈여림을 정직하게 해석하는 정공법을 택했는데, 대부분의 파트에서는 이게 통했으나 단 한 부분에서 아쉬움을 느꼈다.
B파트의 끝부분에서, 이전 1번에서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는데 바로 이 B파트의 조성이 나단조인 이유가 나온다. 그리고 그 맥락도 앞과 아주 똑같다.
이번에도 단3도 아래의 조성인데, 중요한 것은 이번에는 장조가 아니고 단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설명했던 Secondary Dominant라는 설명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만도 하다. 도미넌트 화음은 기본적으로 장화음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계적인 측면으로 봤을 때 원래 major로 사용하던 맥락을 minor로 바꾸어 사용했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이번에는 증6도를 이루는 이끈음을 누락한 것뿐만 아니라 장화음도 아니고 단화음을 사용하는 독창적인 변칙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고전파 작곡가들이 이 관계를 다루던 방법과 분명히 구별되는 것으로 슈베르트가 단순히 선대 작곡가들의 기법을 수용만 하지 않고 발전시켜 자신만의 해석으로 이 조성 관계에 대해 재정의한 부분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흐름이 이어져 어떻게 보면 바그너의 트리스탄 코드(Tristan chord)에서 정점을 찍은 것이기에 우리는 이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이 부분에서 이 나단조의 토닉, 즉 b minor 화음은 원 조성이 단조화된 내림마단조의 도미넌트 46화음으로 이어지는데, 1번에서의 경우와 같게 딱 이 포인트에서 원래의 조성으로 돌아오는 조성적 경계가 생기기 때문에 중요하게 표현해주어야 한다. 아래 악보에서 네 번째 마디에서 다섯 번째 마디로 넘어가는 부분이다.
그런데 문제는 악보에 셈여림 등에 관해 아무런 표기가 되어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 부분을 간과하고 단순한 동형진행으로 처리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많은 대가들은 보통 이 부분에서 셈여림을 확 줄이는 선택을 하는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문지영 씨는 그런데 완전히 반대로 이 부분에서 셈여림을 앞과 대비되도록 키우는 선택을 했는데, 이는 악보의 셈여림과도 상충되지 않으면서 어떤 대비를 주기 위한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효과는 전자에 비해 당연히 못하기에 내심 아쉬움이 느껴진 것이 사실이나, 어쨌든 그러한 포인트를 인지를 했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고 거기에 더해 문지영 씨의 소신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어서 좋게 보았다.
이후 A파트가 특별한 변화 없이 그대로 반복되고, 다시 B파트가 반복되는데 이번에는 A파트 끝 부분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끌고 아주 파멸적으로 마무리해버린다.
이 광기 어린 부분을 고상하게 표현하는 것은 다소 분위기에 안 맞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마지막 부분의 아첼레란도(accelerando)에서 가속이 조금 부족해 답답하게 느껴졌다.
마지막에 조금 더 달려줘서 장조로 시작해 단조로 끝나는 이 파멸적인 마무리를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여담이지만 단조로 시작해 장조로 끝나는 곡은 많아도, 이렇게 장조로 시작해 단조로 끝나는 곡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 독특한 내러티브는 분명히 브람스가 나중에 같은 조성인 내림마장조의 랩소디(Rhapsody)를 쓰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본다. 이 곡이 포함된 소품집 Op.119가 슈베르트의 즉흥곡과 동일한 4개의 곡으로 구성된 것도 결코 우연의 일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3번은 한 번 더 단3도 위로 상승한 내림사장조의 느린 템포의 서정적인 곡으로 아마 슈베르트의 곡 중에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일 것이다.
전체적인 구조는 A - B - A'의 3부 형식에 코다가 붙은 형태이다.
이 곡에서는 장단조의 전환은 눈에 띄지 않지만 대신 e flat minor 코드가 그 역할을 한다. 첫 코드인 토닉 G flat 코드 다음에 나오는 코드가 이 e flat minor 코드인데, B파트의 조성도 내림마장조로 동일하게 구성한 것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이쯤 되면 눈치챌 만도 하지만, 이 내림마장조는 원 조성인 단3도 아래의 조성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앞과 같은 기능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사실 이 전체 세트에 대해 느끼는 것이, 앞의 두 곡과 뒤의 두 곡의 분위기가 좀 다르다. 이전의 비극적인 분위기가 뒤의 두 곡에서는 별로 보이지 않는데, 이것이 의도적인 반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실제로 3번과 4번에서도 장단조 전환이 종종 보이는데, 이전 두 곡에서는 주로 장조에서 단조로의 전환이 많았다면, 3번과 4번에는 단조에서 장조로의 전환이 지배적이다. 게다가 4번은 2번과 정반대로 내림가단조로 시작해서 내림가장조로 끝난다.
만약 이런 접근이 맞다면 나는 이 2번과 3번 사이에 텀을 두고 시간을 주는 것이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연주자는 이러한 생각에 동의를 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어떤 2번과 3번 사이의 분위기적인 대조는 인지하고 있었는지 한 템포 쉬어주고 들어갔던 것 같다.
이 곡은 베이스의 선율이 소프라노 못지않게 중요한 곡이다.
소프라노 선율이 한 프레이즈를 마치면 베이스에서 노래를 받는 부분이 자주 보이는데, 이런 부분에서 저음의 베이스가 뭉개지지 않고 명료하게 잘 들릴 수 있도록 섬세한 조절이 필요하다.
박자 자체도 4/2라는 굉장히 긴 호흡의 박자여서 소프라노가 정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 베이스 성부에서 노래를 충분히 해줘야 곡의 느낌이 산다고 생각한다.
다른 성부로써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인격이 노래하는 듯이 표현한다고 접근하면 이해가 쉬울 것 같다. 오페라의 이중창, 듀엣처럼.
문지영 씨는 왼손에 강점이 있는 연주자라고 느껴졌던 만큼 이러한 표현을 잘해줄 만한 능력이 충분했으나, 좀 더 베이스가 치고 나와도 되는 부분에서도 약간 뒤로 빠지는 그런 파트가 가끔 있었다.
본인의 판단에 그것이 더 맞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연주한 것이겠지만 나는 멜로디는 누가 들어도 이게 멜로디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 선을 굵게 살려주는 것이 취향인지라 재미가 좀 덜했다.
이렇게 중요한 베이스가 덜 사니 솔직히 말해 이 곡은 딱히 기억에 남는 포인트가 없었다.
이건 좋은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고 그렇지 않게 볼 수 있는 부분도 있는데, 일단 들으면서 귀에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는 뜻이다.
정말 무난한 해석이었고 그렇기에 딱히 집어서 얘기할 것도 별로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생각하는 주요 포인트들을 짚어가면서 이 부분은 이렇게 쳐주는 것이 좋다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먼저 슈베르트 특유의 섬세한 변화, 노트 단 하나를 바꿔서 방향 전환하는 특유의 수법이 이 곡에도 보이는데 아래의 케이스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빈 원전판이나 헨레판에는 뒤쪽 마디에서 보이는 크레셴도, 디크레셴도가 표기되어 있지 않은데, 나는 그 표기가 있든 없든 저런 뉘앙스가 당연히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변화된 F 노트를 인지할 수 있도록 강조를 해주다 보면 자연스럽게 저런 뉘앙스가 나오게 되는데 이걸 꼭 알려줘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이걸 가지고 무슨 작곡가가 의도를 했니 안 했니 이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음악을 모른다고 스스로 시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뒤이어 내가 이 곡에서 가장 좋아하는, 정말 아름다운 멜로디가 나온다. 앞에서 격한 감정을 쏟아내고 마치 안개가 걷히면서 호수 위로 나타난 한 마리의 백조처럼 우아하고 순수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부분이 중요한 건 멜로디도 있지만, 단조에서 장조로 전환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같은으뜸음조(Parallel Key; 동주음조라고도 한다)는 아니고 내림마단조에서 내림다장조로 전환된다. 그리고 다시 긴장을 만들고 해소되면서 이 멜로디가 반복되는데, 이 때는 같은으뜸음조인 내림마단조에서 내림마장조로 전이된다. 계속해서 말하듯이 장단조 전환은 슈베르트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악상 전개 방법 중 하나이기에 주목해야 한다.
나는 어떻게 이런 부분에서 루바토를 전혀 하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표현할 수가 있는지, 그런 연주자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냥 한 번만 목소리 내서 불러봐도 이해가 되는 대목인데 노래할 줄을 모르고 손가락만 움직일 줄 아는 게 아닌가 싶다.
문지영 씨도 노래하기는 했지만 표현이 약했던 것 같다.
이렇게 소프라노가 아름답게 노래를 마치고, 앞서 언급했듯이 베이스의 노래가 나온다. 이 부분은 베이스의 노래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지만 화성적으로도 눈여겨 볼만한 지점이 하나 있는데, 이 베이스의 멜로디 라인이 도달하는 포인트에서 오는 화음이 앞에서 자주 언급했던 증6화음 중 하나인 독일6화음(German 6th)이다.
전체적으로 잔잔하고 평온한 분위기의 음악에서는 작은 긴장들로 곡을 지루하지 않게 끌고 가야 한다. 그렇기에 이러한 텐션 형성 하나하나를 공들여서 효과적으로 표현해야 곡이 지루하지 않다.
슈베르트가 이 곡에서 긴장을 형성할 때는 이 독일6화음과 감7화음(diminished 7th)을 사용하였고 이 둘은 단 하나의 음만 차이나는 상당히 유사한 성격의 화음이고 기능도 Secondary Dominant로 같다.
그리고 작곡가는 아주 친절하게 이 화음들이 오는 위치들에 포르잔도(fz)로 강조해서 연주하라고 일관성 있게 표기해두어 찾기도 쉽다.
이런 부분들을 표현함에 있어 이들이 같은 성질의 화음이라는 것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멜로디 라인만 강조해서는 안 된다. 화음이 듣는 사람에게 뚜렷하게 전달되어야 슈베르트가 의도했던 화성적 맥락이 온전히 전달될 것이다.
게다가 이 멜로디는 한 번 반복되는데, 이때도 음계가 단음계에서 장음계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연주자들이 이 부분에서 멜로디만 너무 강조하는 바람에 화성이 잘 들리지 않는데, 이런 부분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렇게 베이스에 주 멜로디가 있을 때 화성을 표현하는 것이 더욱 어렵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더 써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 파트가 끝난 직후에 정확히 같은 Ab 베이스의 감7화음을 사용하여 다시금 긴장을 형성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둘을 같은 화음이라는 것을 연주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이고 그다지 의미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다만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베이스가 움직임에도 이 두 마디의 화음은 하나로 묶이고, 언급했듯이 이 화음은 주요한 화음이기 때문에 화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포르잔도로 베이스 음들을 강조해주면서도 한 프레이즈로 연결되어 하나의 화음으로 들릴 수 있도록 연주해야 한다.
포르잔도로 연주하면서도 프레이즈를 끊지 않고 연결하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데, 가장 좋은 방법은 악센트와 포르잔도로 강조 표시되어 있는 베이스의 네 음들의 다이나믹이 하나의 곡선을 그리게 하는 것일 듯하다. 이런 부분에서 똑같이 표기되어 있다고 똑같이 치는 것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이 긴장이 해소되고 앞에서 본 그 아름다운 멜로디가 소프라노에서 반복된 후, 다시 베이스가 노래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중요한 화음도 없고 그저 멜로디의 충실한 표현이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 중요한 순간에서 베이스 멜로디가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들을 것이 없다. 계속 Eb로 정지해 있는 소프라노, 아르페지오 반주만 하는 내성, 결국 우리가 들을 것은 베이스뿐이다. 그 어떤 것, 특히 박자에 구속되지 않고 충분히 노래해주어야 사는 부분이다. 계속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 같은데 이 부분에서도 좀 더 과감하게 표현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이번 텐션은 다시 A파트로 돌아오는 경과구를 형성하였다. 큰 긴장 뒤에 오는 고요한 메인 멜로디는 아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앞과 비슷하게 반복되다가 그대로 마무리되지 않고 뒷부분을 변형하여 코다를 향해 방향 전환을 하는데, 앞서 1번에서 보았던 수법과 유사하지 않은가?
나는 그래서 이 부분을 이 곡의 클라이막스라고 생각을 하는데, 많은 연주자들이 나의 이런 생각에 공감을 못하는 것인지, 셈여림 표기가 다소 미적지근한 포르테피아노(fp)라서 그런 건지, 전체적인 분위기 상 절제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 부분에서 충분히 터져주지 않는 것 같다.
뒤의 두 의견은 일견 이해는 되지만 절대적인 음량을 크게 한다기보다는 작더라도 깊은 울림이나 루바토를 통해 강조하는 방향으로 연주해도 의도는 충분히 전달될 것이다. 오히려 이 편이 좀 더 효과적이고 그 감동도 더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루바토도 없고, 셈여림도 충분히 표현해주지 않고 그저 지나치는 것은 내 입장에서 결코 용납할 수 없다.
이 얼마나 순수한 영혼의 노래인가! 그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아는 사람이라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마지막 반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어김없이 소프라노의 노래가 끝나고 베이스가 이를 받는데, 이 패턴과 베이스, 화성의 흐름이 이전에 B파트에서 A파트로 넘어오는 경과구랑 매우 유사하게 생겼다.
이때 슈베르트는 또 뒷부분에서 한 번 틀어서 반복하는 방식을 사용하는데, 3번째 화음까지는 동일하게 가다가 네다섯 번째 화음들을 바꾸고 여섯 번째 화음에서 정점을 찍고 마무리하는 구조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번에도 이 정점에 해당하는 화음들이 앞에서도 사용된 증6화음인 독일6화음이라는 것이다. 이번에도 포르잔도 또는 포르자티시모(ffz)의 표기가 되어있는 것을 아래 악보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빈 원전판과 헨레판에는 둘 모두 포르자티시모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이 화음들의 성질을 잘 보면, 처음 제시될 때는 조성적으로 1~5번째 화음들이 내림다단조(원 조성인 내림사장조의 토닉을 도미넌트로 사용하고 있다)로 묶이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D(또는 Ebb; E 더블플랫) 증6화음에 엄청난 화성적 악센트가 생길 수밖에 없다.
관계적으로도 3도권 관계에 놓이고, 이전 화음의 베이스 음인 Cb와 이 증6화음의 소프라노 음인 C가 반음 관계에 놓여 있어 서로 대사(cross relation)를 일으켜 엄청난 음악적 텐션을 만들어낸다.
많은 화성학 이론서에는 이걸 좋지 않은 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금지하는데, 이렇게 맥락에 맞게 사용하면 되는 것을 아예 금지되는 진행으로 잘못 이해하는 일이 흔하게 벌어진다. 그만큼 높은 텐션을 일으키니 적재적소에 조심스럽게 사용하면 된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첫 제시 때는 이 맥락이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것이 반복될 때는 일반적으로 변화를 준다고 했을 때 더욱 텐션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바꾸는 것이 합리적인데, 비슷하게 반복하게 되면 아무래도 흥미가 떨어지기 마련이기에 작은 변화라도 주어 이를 최소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들리기에도 그렇게 들리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왜냐하면 먼저 조성적으로 앞에서는 1~5번째 화음이 묶이고 6번째에서 큰 변화를 주었다면, 반복될 때는 1~3번째 화음이 묶이고 4번째 화음에서 변화를 주어 조성적으로 사단조처럼 들리는 화음들이 4~6번째에 오게 된다.
이때 6번째 화음은 처음 제시될 때와 같은 D 증6화음이 와서 앞의 화음들에 의해 형성된 사단조의 맥락에서 도미넌트처럼 들리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도미넌트 화음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원래 오던 증6화음의 맥락과 비교했을 때 훨씬 약한 텐션의 화음인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이것은 이 진행을 단편적으로 해석한 것에서 기인하는 잘못된 분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뒤쪽의 반복이 앞에서 나오지 않은 채로 처음 제시된 진행이라면 이렇게 분석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 같은 화음을 앞에서 한 번 들었고 그때는 분명히 이 화음이 증6화음으로 사용되었다. 수직적 배치부터 해결까지 증6화음, 독일6화음의 전형적인 용법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듣는 사람이 화음을 같은 위치에서 다시 듣게 된다면, 화성적 맥락에 우선하여 구조적 측면에서 같은 6번째 순서에 오기 때문에 이 화음을 도미넌트 7화음이 아닌 증6화음으로 듣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전의 c flat minor(b minor) 코드에서의 전이보다 g minor 전위 코드에서의 전이가 왜 훨씬 멀게 느껴지고 더 큰 텐션을 만드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잡설이 길었는데 중요한 것은 아무튼 이 증6화음과 그것의 해결이 이 패시지, 나아가 이 곡 전체에서도 핵심이므로 가장 강조되어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전까지, 즉 처음부터 이 증6화음에 도달하기까지는 반드시 한 프레이즈로, 한 호흡으로 이어져야 중간에 긴장이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증6화음이 마침내 도미넌트로 해결되면서 곡이 마무리로 향하는 이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조금의 루바토라도 꼭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런 부분에서도 루바토를 해주지 않으면 도대체 어느 부분에서 할 수 있겠는가?
무조건 템포 변화를 배척하는 것도 결국은 허상에 불과하다. 이상한 부분에서 제멋대로 하는 것보다는 맥락에 맞게 적절하게 사용하여 자연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많은 기악 연주자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악기로 노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칸타빌레(cantabile)는 연주자에게 있어 평생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 곡처럼 마치 피아노로 연주한 가곡 같은, 성악적인 성격이 강한 곡들이 참 표현하기가 힘든 것 같다.
문지영 씨도 동 나이대 대다수의 연주자들보다는 나은 모습을 보였지만 당연하게도 아직 조금 보완해 나가야 할 점이 있다.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고 가장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할 것이다.
원래 분야를 막론하고 나이가 들수록 잘 되는 부분이긴 한 거 같긴 해서 앞으로의 성장을 기대해봐도 좋을 듯하다.
세트의 마지막 곡인 4번은 단3도씩 상승하던 이전의 맥락을 깨고 3번의 장2도 위 조성인 내림가단조로 시작한다. 형식은 2, 3번과 유사한 A - B - A'이고 코다가 앞의 곡들에 비해 짧다는 특징이 있다.
이 곡에 이르러 비로소 슈베르트의 조성 선택이 이제 완성되면서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이전 세 곡을 들었을 때는 단3도씩 올라가는 맥락인가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지만, 이 곡에서 그러한 패턴이 깨지면서 진짜 패턴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 비밀은 서사적인 관계가 아닌 순환적인 관계의 측면에서 보아야 찾을 수 있다.
이 조성 맥락에 관해 얘기하기 전에 한 가지 관련하여 주목할만한 곡이 있는데, 앞서 짧게 언급했었던 <피아노를 위한 6개의 악흥의 순간, D.780>이다.
이 두 곡은 공교롭게도, 같은 C조로 시작해(즉흥곡의 경우는 다단조로, 악흥의 순간은 다장조로 시작한다) Ab조(즉흥곡은 내림가단조로 시작해 장조로 끝나고, 악흥의 순간은 반대로 내림가장조로 시작해 단조로 끝난다)로 마무리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그런데 구성되는 곡의 수가 다른 만큼, 출발지와 목적지는 유사하지만 그 경로는 다를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악흥의 순간의 경우 1번에서 4번까지는 조성이 3도씩 계속 하강하다가 (C - Ab - f - c#) 다시 4번부터 3도씩 상승하여 ((c#) - f - Ab) 처음의 C조를 향하는 일종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때 이 조성의 흐름이 만드는 사이클은 완전한 한 바퀴라기보다는 U자의 곡선을 그리는 형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반면 즉흥곡의 경우, 3번까지 이어져오던 3도 상승 패턴이 4번에서 깨지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이 즉흥곡 세트의 조성 구조를 만드는 논리가 아니었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악흥의 순간과는 다른 논리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각각의 곡을 잘 살펴보면, 형식적인 측면에서 1번은 소나타 형식의 요소를 많이 차용하여 서사적 성격이 강하고, 길이도 세 곡에 비해 길고 음악적 내용도 많아 작품 전체에서 표면적으로도 무게감 있는 곡이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 세 곡은 그 자체로 순환 구조를 가지는 A - B - A의 3부 형식이다. 이런 관점에서 1번을 중심에 놓고 나머지 2, 3, 4번을 배치하면 드디어 조성 구조의 해답이 보인다.
먼저 다단조를 중심으로 나머지 조성들의 관계를 살펴보자면, 내림마장조와 내림가단조(장조)는 각각 다단조를 기준으로 3도 위, 그리고 아래의 조성이다. 3도권 조성들 중 화음 구성음 2개가 겹치는(Eb 코드는 c 코드와 Eb, G이 일치하고, Ab 코드는 C와 Eb가 일치) 가장 가까운 두 조성으로 설정되었다. 기본적으로 이 3도권 조성들은 다수의 공통음을 지니기에 기능적으로 같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내림사장조는 다단조와 조성적으로 5도권에서 대척점에 있는, 가장 먼 조성인데 1번과 3번의 분위기 대조를 생각해보면 이건 미리 설계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맥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증4도, 또는 트라이톤(tritone)이라고 부르는 이 조성은 앞에서 증6화음에 대해 얘기하면서 살짝 설명했지만 도미넌트를 서로 공유하기 때문에 굉장히 먼 조성인 것처럼 들리는 데도 기능적으로 같게 취급되는 참으로 기묘한 관계에 놓여있다.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중심의 다단조를 기준으로 같은 기능인 3도권과 트라이톤으로 나머지 3곡의 조성을 설정하고 이들을 내적으로 순환하는 관계로 묶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에도 역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가"일 것이다. 앞서 내가 1, 2번과 3, 4번의 분위기 대조에 대해 언급했는데, 만약 그것보다 방금 논한 것을 더 근본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중요하게 여긴다면, 1번과 2번 사이의 휴지를 더욱 길게 하여 1번과 나머지 세 곡을 분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1번, 그다음으로 3번이 이 세트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에 놓인 것이 드러난 만큼 연주자는 1번과 3번, 특히 1번을 가장 공들여 해석하고 연주해야 할 당위성이 생겼다고 본다. 1번을 가장 열심히 분석해놓은 것도 슈베르트가 가장 공들여 쓴 것이 보였기에 가장 볼게 많기도 했지만 그만큼 공들여 쳐야 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시 4번으로 돌아와서 몇 가지를 짚어보도록 하겠다.
앞서 언급했듯이 크게 A - B - A'로 분절되는 이 곡은 각각의 파트도 작은 구조로 나눌 수 있는데, A파트는 a - b - c - b'로 또 작게 나눌 수 있다.
처음 제시되는 주제는 아르페지오로 펼쳐놓은 (a)와 이와 대조되어 코드가 연주되는 (b)가 결합되어 있는 형태이다. 사실 둘 다 멜로디라고 하기에 좀 그런데 사실 이렇게 다소 특징 없는 멜로디를 앞에서 제시한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우선 멜로디에서 우리가 큰 매력을 못 느끼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화음을 듣게 되는데, 연주자 또한 그 점을 잘 고려하여 듣는 사람이 화음의 변화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신경 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a)와 (b) 모두 뒤에서 절묘하게 활용되는데, 이걸 들으면 왜 이런 주제가 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조금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다.
먼저 코드 변화의 패턴을 잘 보면 처음에는 토닉인 a flat minor 코드가 반복되어 두 번 나오고, 그다음에는 단3도 위의 내림다장조, 곧 나장조로 같은 주제가 반복된 다음 단조로 바뀌어 나단조로 반복된 후 뒷부분이 변형되어 이번에는 토닉이 메이저화된 A flat major 코드로 주제가 나온 후 다음 파트로 넘어가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6마디씩 두 번 반복되는 것을 하나의 그룹으로 보면 세 그룹으로 이 첫 파트를 나눌 수 있고, 연주자는 이러한 a - b - a' 구조를 드러낼 수 있도록 변화되는 포인트에서 루바토를 주거나 음색을 변화시켜 이런 포인트들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이러한 거시적인 구조를 연주자가 숙지하고 있어야 연주자도, 듣는 사람들도 길을 잃어 헤매지 않고 바른 길로 걸어갈 수 있기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b파트가 시작되는데, 이 부분에서 연주자가 한 템포 쉬어가며 형식의 분기점을 표현해준 것이 좋았다.
이 부분에서 처음 제시된 아르페지오 모양의 주제 (a)를 활용하여 전개하는데, 이것이 다시 반복되면서 새로운 대선율(counterpoint)과 함께 나온다. 이 곡에서 처음으로 그나마 멜로디라고 들어줄만한 라인이 나오는데, 이런 맥락에서 봤을 때 사실 이것을 대선율로 보는 것이 맞는지, 주객이 전도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물론 이상할 것은 없고 음악은 앞에서부터 듣는 것이기에 당연히 처음에 나온 것을 사람들이 주제로 인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또한 이렇게 앞에서 나왔던 모티브를 활용하여 뒤에 나올 멜로디에 반주처럼 사용하는 맥락은 간간히 찾아볼 수는 있는 맥락이긴 하다.
사실 이 대선율은 처음 제시되는, 완전히 새로운 멜로디는 아닌 것이 그 모양을 잘 보면 첫 주제의 뒷부분인 (b)를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도 상행했다가 순차 하행하는 모양이다. (Cb - Fb - Eb - Db)
여담이지만 나는 이 모티브가 아마 서양음악사 통틀어 가장 많이 사용된 모티브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한다. 이 모티브를 사용하지 않은 작곡가를 찾기가 힘들고 심지어 중세 그레고리오 성가 같은 곳에서도 보이는데, 범용성이 뛰어나 워낙 널리 사용되다 보니 여전히 나는 명확한 원 출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후에 이 모티브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 생기면 따로 글로 남겨보도록 하겠다.
아무튼 나는 b파트에 들어오면서 앞의 (a) 모티브가 반주로 사용된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이 대선율과 엄격히 구분하여 대선율이 제시되기 전 첫 부분에서 셈여림도 피아니시모로 확 줄인 다음 크레셴도도 굉장히 절제해서 표현해서 온전히 대선율의 제시에 청자를 집중시키는 것이 최적의 해석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 대선율은 앞에서 말했듯 단순한 대선율로만 볼 수 없고 이 곡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모티브이기 때문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연주자들은 마치 뒤가 없는 듯 이 부분에서 크레셴도를 과하게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대선율을 제시할 때는 또 피아니시모 지시가 있으니 다시 셈여림을 줄이는 이해할 수 없는 해석들을 하곤 한다.
또한 악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크레셴도는 있지만, 어느 정도까지 커져야 하는지는 슈베르트가 지시하지 않았고 따라서 이 크레셴도의 목적지를 어떻게 설정하는지는 순전히 연주자의 재량인데, 앞에서 설명한 맥락을 고려하여 연주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문지영 씨는 이 부분에서 크레셴도를 과하게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원래도 셈여림 표현을 과하게 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딱히 이러한 맥락을 고려해서 절제했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그래도 연결성이 떨어지거나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좋게 평가하고 싶다.
이러한 맥락을 어떻게 자연스러움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도 연주자에게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중요한 과제일 것이다.
이제 이 대선율이 전개되어 정점을 찍고 하강한 후 새로운 멜로디가 나오는데, 눈치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 멜로디 또한 앞서 나왔던 대선율, 또는 (b) 모티브의 변형이라는 것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정확하게는 앞의 여섯 음을 공유하고 있다. (Eb - Ab - G - F - Db - Bb)
이 모티브가 이 곡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할 만하지 않은가?
잠시간의 고요한 멜로디가 끝나고 다시금 앞에서 나왔던 아르페지오와 대선율이 전개된 후 A파트가 마무리된다.
B파트, 또는 트리오(Trio)는 A파트보다는 음악적으로 직관적이고 단순한 편이라 해석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지만 이 확실한 셈여림 라인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하나의 과제라고 할 수 있겠다.
이 B파트는 또다시 a - b - a'의 작은 세도막 형식으로 나눌 수 있는데, 각각의 파트에서 (a, a'파트의 도돌이표까지 고려할 경우) 두 번씩 상승과 하강이 이루어진다. 이때 이 세 파트에서 발생하는 상승과 모두 관련된 단 하나의 화음이 있는데, 다름 아닌 독일6화음이다.
내가 이런 의미에서 3번과 4번의 화성적 맥락이 묶인다고 한 것이다. 단순히 이 화음을 자주 사용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음악적으로 긴장을 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이 동일하다는 의미에서 말한 것이다. 앞서 1번이나 2번에서도 이 화음이 사용되었지만 거시적인 구조를 형성하는 데 사용된 것이라 이 두 곡과는 방법론적으로 차이가 있다.
하나씩 보자면 첫 a파트에서는 먼저 메인 테마가 제시되고, 뒷부분에서 독일6화음을 통해 방향 전환을 한 후 고조시킨 텐션이 도미넌트 화음에서 터지는 그런 모양을 하고 있다. 포르자티시모(ffz) 표기가 되어있는 부분이 각각 도미넌트 46화음, 7화음이 오는 자리이고 이전 두 마디의 화음이 도미넌트에 대한 독일6화음이다.
다음 b파트에서는 반대로 도미넌트 46화음으로 긴장을 쌓은 후 독일6화음에서 터트리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a'파트에서는 원래 도미넌트가 마이너화된 올림사단조로 마무리되던 패시지를 원 조성인 올림다단조의 토닉으로 마무리하기 위해 4마디가 더 추가되었는데, 조성만 바뀌었을 뿐 기능적으로 독일6화음이 도미넌트로 해소되는 구조는 같다.
이 세 번의 패시지를 모두 같게 표현하는 것은 효과적이지도 못하고 음악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어떠한 그림을 가지고 표현해야 하는가?
일단 표기상으로도 그렇고 음악적으로도 a와 a'에서의 클라이막스보다 b의 것이, 목적지가 포르테라는 표면적인 셈여림 지시에서도 그렇지만 셈여림은 결과일 뿐이고 긴장을 쌓는 화음 자체가 평범한 도미넌트 46화음이라 독일6화음으로 만든 텐션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a보다는 a'의 것이, 긴장을 쌓아가는 과정 자체가 4마디에서 8마디로 두 배로 늘어나기도 했고 비슷한 것이 반복될 때 후자를 더욱 강조해주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알 것이다.
그러므로 순서를 따져보면 2 - 3 - 1의 순서로 셈여림의 단계를 조절하는 것이 적합할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문지영 씨의 경우 이 각각의 클라이막스들에서 단단하고 큰 울림을 훌륭하게 만들어 내었으나, 이런 큰 그림은 뚜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분명히 이런 맥락을 분명히 고려했을 것으로 보이지만, 각각의 표현에 더 충실하고자 한 듯하다.
한 가지 첨언하자면, B파트 내내 지속되는 오른손 내성의 코드는 무작위로 작성된 것이 아니라 두 음 중 아래 음이 대부분 소프라노의 주선율을 반 박 뒤에서 따라가는 일종의 카논(kanon)의 모양을 하고 있다.
물론 작곡가가 음악적으로 어떤 의도를 가지고 만든 비자명한 결과라고 강하게 말하기는 힘들다. 그저 연주하기 편하게 손에 맞추어 만들어진 음형일 뿐이라고 해도 반박할 수는 없기에 과하게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간혹 연주자들이 소프라노 멜로디를 따라가는 아래 음이 아닌 그저 코드톤(chord tone)인 위 음이 들리게 연주하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는데, 아예 소프라노의 주선율만 강조하여 내성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다면 몰라도 강조해서는 안될 음을 강조해서 연주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다행히도 이번 연주에서는 그런 일이 없었고, 간간히 카논의 뉘앙스를 살릴 수 있는 조용한 패시지에서는 잘 살려주었다.
반대로 절대적인 음량과 울림이 중요한 포르테 패시지나, 앞서 설명했던 긴장을 쌓아서 끌고 가는 것이 중요한 크레셴도 패시지에서는 이런 폴리포니(polyphony)적인 것보다는 호모포니(homophony)적인 뉘앙스를 중시한 선택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고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체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곡선을 그리는 것이, 특히 A파트에서, 중요한 곡인데 이런 긴 호흡을 잘 표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쏟는 연주자라고 느껴져서 이 곡도 늘어지거나 호흡이 무너지는 일 없이 무난하게 잘 연주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또 짧은 소품들에 강점이 있는 연주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이번 연주에서는 긴 곡들을 더 좋게 들었어서 의외였다.
확실히 주 프로그램이라 그런지 앞의 춤곡보다 더욱 공을 들인 느낌이 많이 들었다. 많은 포인트들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다 표현해주었다.
이 표현하는 방식이란 것은 정말 다양한데, 예를 들어 형식의 전환점에서는 리타르단도를 할 수도 있고, 한 번 숨을 쉬어주고 들어갈 수도 있다.
어느 것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전자의 경우 너무 자주 사용할 경우 음악이 늘어져서 긴장감이 떨어질 수 있다. 또 템포를 계속 변화시키다가 본래의 템포를 잃어버리게 되는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다.
대체로 20세기 초중반까지의 연주자들이 전자의 방식을 선호하였는데, 요즈음의 추세는 후자를 더욱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음악의 전체 흐름을 더욱 중시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나도 거기까지는 동의하는 바이나, 정말 극단적으로 악보에 템포 지시가 있어야만 템포를 변화시키는 연주자들이 있는데, 나는 음악의 뉘앙스가 템포 변화를 강하게 나타내고 있다면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뉘앙스를 알고도 다른 이유나 본인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과 의도 때문에 템포를 변화시키지 않는 경우와, 이걸 모르고 무시해서 템포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연주에서 티가 날 수밖에 없다.
전자는 본인의 음악적 소신이니 존중하는 편이지만, 후자는 자연스러움이라는 측면에서 좋은 평가를 받을 수가 없다.
문지영 씨는 대부분의 포인트에서 숨을 한 번 쉬어주는 선택을 하면서 템포는 일관적으로 가져가는 선택을 했다. 앞서 말했듯이 나의 취향과는 다르지만 존중한다.
나는 특히나 잘 아는 음악의 경우 들으면서 연주자와 호흡을 같이 하면서 듣는데, 간혹 호흡이 이상해서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연주를 들을 때마다 참 괴롭다.
이번에는 적절한 때에 한 번씩 끊어주는 음악적인 센스가 돋보여서 특히 좋았다.
그래도 아쉬운 건 있는 게 좀 더 느끼고 넘어갈 수도 있는 포인트에서는 한 번 짚어주고 가는 것도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조금 남았다. 그렇다고 뭐 급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해석적인 측면에서 탁월함을 느끼고 하는 부분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튀는 부분 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2부에 관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다루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