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30 아름다운 목요일 피아니스트의 노트 - 문지영
친애하는 쿠펠비저,
...
한 마디로 말해서,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고 비참한 사람인 것 같아.
절대 건강을 회복할 수 없고, 절망 속에서 모든 상황을
도리어 악화시키는 사람을 상상해 봐.
가끔 밝은 희망들이 짓밟히고, 사랑과 우정의 행복이
단지 고통만을 야기하는 사람을 생각해 봐.
...
나의 평안은 사라졌고, 내 마음은 무거워,
다시는 그 평안을 되찾지 못할 거야.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 다음날 눈이 떠지지 않기를 바라.
그리고 아침이 되면, 전날의 슬픔만이 나에게 엄습해 와.
...
고통은 이해를 향상시키고 정신을 강하게 한다.
기쁨이 그것들을 나약하고 경솔하게 하는 반면에,
나의 음악 작품은 이성과 나의 고통을 통해 존재한다.
고통으로 만들어진 작품이 세상을 무엇보다도 행복하게 하는 것 같다.
- 슈베르트의 편지 中 (1824.03.31)
프로그램
프란츠 슈베르트 (Franz Schubert, 1797 - 1828)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독일 춤곡, D.790
Zwölf Ländler für das Pianoforte, D.790/Op.171 (1823)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즉흥곡, D.899
Vier Impromptus für das Pianoforte, D.899/Op.90 (1827)
피아노를 위한 12개의 왈츠, D.145
Zwölf Walzer für das Pianoforte, D.145/Op.18 (1821)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즉흥곡, D.935
Vier Impromptus für das Pianoforte, D.935/Op.142 (1827)
유난히 비가 많이 오는 유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공연장을 향하는 내내 축축하고 처지는 날씨 때문에 기분이 썩 상쾌하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런 음울한 날씨가 그날의 공연이 주는 메시지를 더욱 살렸으리라.
비가 와서 걸음이 늦어 평소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는지라, 표를 받고 거의 바로 공연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가는 입구 앞에 두루마기들이 놓여있어 뭔지도 모르고 가져왔는데, 연주자가 자필로 쓴 슈베르트의 편지 발췌문이었다. 글머리에 그대로 옮겨놓았다.
프로그램에는 별로 읽을 것이 없었는지라 공연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편지 말미에는 연주자의 메시지가 적혀있었다.
지금 제 나이의 슈베르트가 남긴 편지와 조그마한 글들을 보며
마음은 착잡하고 무거워지고, 그 모든 슬픔과 고통을 겪어내며
세상을, 친구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한 음악을 끊임없이 써 내려갔을
슈베르트를 생각하며 겸허해집니다. 연주자에게도 너무나 큰 위로가
되어주는 아름다운 그의 작품들을 여러분들과 나눌 수 있음에
마음 깊이 감사함을 느낍니다.
작곡가와 그가 남긴 곡에 대해 겸허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연주자의 덕목으로써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고 이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이 작곡가 개인보다는 음악 그 자체에 향해있는 것이 더 좋다.
음악인들은 항상 주어진 음악 앞에서 겸허해져야 하고, 자신이 음악 위에 군림하려 드는 순간 음악은 멈추기 마련이다.
많은 연주자들이 스타가 된 이후 자신의 음악을 잃는 이유이다.
같이 겸허함을 느끼며 공감하는 동시에 오늘 공연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를 알게 되었다.
프로그램이야 미리 알고 갔었고, 슈베르트라는 한 작곡가의 곡들로만 채워진 프로그램은 흔치 않긴 하지만 이상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이 글을 읽는 순간 연주자가 공연에 대해 매우 무거운 주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제야 프로그램의 의미를 짐작하며 내심 쉽지 않은 공연이 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물론, 말만 이렇게 늘어놓고 정작 공연에서 보여주는 음악에는 전혀 진지함이 느껴지지 않는 그런 연주자들도 더러 있다.
그런데 문지영 씨는 뭔가 잘 해낼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문지영 피아니스트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여러 콩쿠르 소식들을 통해서였고, 부조니 콩쿠르를 우승했다는 소식을 듣고 관심이 생겨 연주를 찾아서 들어보게 되었다.
당시 처음 들었던 연주는 쇼팽 협회 주관 쇼팽 페스티벌에서 있었던 리사이틀이었다.
문지영 씨는 지난 2015년 쇼팽 콩쿠르에 출전했다가 1라운드 후 기권하였는데, 기권한 사람을 다시 불러 리사이틀에 초청한 것은 여러모로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듣기론 부조니 콩쿠르 우승 이후 제네바 측에서 부탁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정확한 사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쇼팽 콩쿠르에서 문지영 씨가 혹여나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둘 경우 부조니 콩쿠르 입장에서는 위상이 흔들리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 될 것이기 때문..
아무튼 그 짧은 순간에 협회 사람들의 눈에 들었는지 이번에는 쇼팽의 곡 중 - 쇼팽 협회의 쇼팽 페스티벌이니 당연히 포함되었겠지만 - 마주르카 3곡과 프렐류드(전주곡) Op.28을 연주하였고, 2부에는 드뷔시의 영상 1, 2집,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소나타 4번을 연주하였다.
다른 것보다 프렐류드 연주가 매우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있다.
음악에 대한 주관이 매우 뚜렷하게 느껴졌고 나이에 맞지 않은 원숙한 해석을 보여주고 있었다.
호흡과 루바토, 셈여림 표현 모두 자연스러움의 미덕이 느껴졌다. 젊은 연주자답지 않은 모습이라 놀라웠다.
젊은 연주자들은, 아니 연주자들뿐만 아니라 예술하는 젊은 사람들은 자꾸 뭘 더하려고 하고 더 말하려고 애써서 전체가 망가지는 경우가 많은데, 문지영 씨의 연주에서는 그런 어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곡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으며, 무엇보다도 음악에 대한 진지하고 겸허한 태도가 느껴져서 좋았다.
이번 공연에서 남긴 말도 말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게 된 이유다.
그리고 곡에 대한 애착이 연주에 그대로 드러나는 성향인 듯하여 프렐류드의 경우도 어떤 곡은 정말 잘 이해하고 흡수했다는 느낌이 드는 반면 일부 곡들은 조금 겉도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이건 상당히 긍정적으로 다가오는 면모인데, 그만큼 자신의 연주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뚜렷하게 전달된다는 뜻이다.
그 말하고자 하는 바는, 좋은 연주자라면 대체로 작곡가의 의도에 잘 부합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와닿지 않는 곡들을 치게 되면 메시지도 불분명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재밌는 점은 내가 프렐류드의 곡들에서 느끼는 호불호와도 상당히 유사했다는 점이다. 음악 취향도 서로 비슷한가 보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선호하지 않는 곡을 연주하는 상황이 분명히 생기는 콩쿠르 무대에서 어떻게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는지 신기하기도 했는데, 정말 엄청난 노력으로 극복한 것인지 그러한 한계를 덮을만한 압도적인 실력 덕분이었는지, 어떤 경우든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콩쿠르보다는 자신 있는 곡들로만 채울 수 있는 리사이틀에서 더욱 유리하게 작용하는 법이다. 콩쿠르 무대보다 개인 무대가 더 기대되었던 이유이다.
잡설이 너무 길었는데, 여하튼 공연장에 들어오기 전보다 더욱 가라앉고 무거운 마음으로 감상에 임하게 되었다.
원래도 다 여러 번 들어본 익숙한 곡들이었는데, 그전까지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침울하게 들리는지.
정말 공연 전에 본 글귀들 때문인 건지 연주자가 그렇게 의도하고 연주한 것인지 스스로 분별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는데 연주가 계속되면서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프로그램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은, 메인 프로그램인 즉흥곡 두 세트와 이들에 앞서 프렐류드의 역할을 하는 가벼운 춤곡이 커플링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흔한 프로그램 구성인데 정말 힘을 잔뜩 준 무대이거나 전곡 연주, 사이클의 일부와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첫 곡부터 무겁게 분위기를 잡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연주자도, 듣는 관객도 지치기 때문.
요즘은 오케스트라 공연들이 하나의 공식처럼 자리 잡았던 서곡 - 협주곡 - 교향곡 순서의 프로그램에서 탈피하고자 많이 노력하는 것처럼, 독주 무대에서도 프로그램을 다변화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지만, 공연의 성격 상 그런 시도를 했더라도 어울리진 않았을 것이다.
연주할 곡을 먼저 선곡하고 스토리를 만들었다기보다는 공연의 주제에 맞게 선곡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한 작곡가의, 인생의 한 순간을 그려내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있었고 그에 맞게 전체적인 분위기가 매우 일관되게 유지되도록 세심하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즉흥곡 두 곡이 먼저 선곡되었을 것이고, 나머지 커플링 된 두 곡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간다.
실제로 이 프로그램에 포함된 즉흥곡 두 세트를 제외하고 나면 잘 알려진 곡 중에는 소나타에 비하는 규모와 내용을 담고 있는 환상곡 C장조 D.760(Fantasie in C für Pianoforte, D.760)과 악흥의 순간(Sechs Moments Musicaux für Pianoforte, D.780) 정도만 남는다.
이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긴 호흡이 요구되는 대곡들보다는 짧은 곡들이 이어진 소품집에 더 강점이 있다고 느껴지는 연주자이고, 본인도 그것을 더 선호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의미에서 방랑자 환상곡은 누구에게나 부담스러운 대곡이기도 하고, 프로그램이 주는 전체적인 메시지와는 다소 맞지 않는 느낌도 든다.
악흥의 순간의 경우는 즉흥곡 세트들과 성격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분위기가 겹쳐 희석될 것을 우려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이제 다른 곡들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데, 인지도는 다른 곡들에 비해 못하지만 슈베르트는 많은 수의 춤곡을 남겼고 이는 슈만, 브람스와 같은 후대의 위대한 작곡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남은 후보군이 별로 남지 않은 상황에서 10분가량의 적당한 길이의 춤곡 세트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연주자가 이전에도 이 곡들을 즐겨 연주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스승인 김대진 교수가 D.790으로 음반을 남긴 바 있다.
자주 연주되는 곡들은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즉흥곡들에 쏟은 노력과 시간이 더 많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지만.
첫 곡은 슈베르트가 26세 때 작곡한 12개의 독일 춤곡, D.790이었다.
독일 춤곡(Deutsch Tanze), 또는 "랜틀러(Ländler)"라고 부르는 이 춤곡은 18세기 말에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 및 스위스 일부 지역과 슬로베니아에서 유행했던 동명에 춤에 맞추어 연주되던 곡이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춤곡 중 하나인 왈츠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다.
18세기 말에 오스트리아, 즉 빈에서도 유행했던 만큼 당대의 위대한 작곡가였던 하이든, 모차르트 그리고 베토벤 모두 이 랜틀러를 다수 남긴 바 있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모차르트의 K.605 중 2번인데, 반복을 포함해도 3분 남짓인 이 짧은 곡 안에서 모차르트 음악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왜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얘기를 하냐면, 슈베르트가 이 곡을 쓸 때 분명히 선배 작곡가들인 그들의 작품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기 직전에도 베토벤을 찾던 양반이 오죽하랴.
그들이 남긴 독일 춤곡들의 특징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으며 상당히 자유롭고 또 깊이 있는 음악 세계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 음악적 실험을 해보고 이를 바탕으로 대곡을 쓰는 일종의 아이디어 노트의 기능을 하기도 했다.
사실 이건 그들이 남긴 소품들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모차르트에게는 론도가 그러했으며, 베토벤에게는 바가텔이 그러했다.
내가 대작곡가들의 소품을 각별히 여기는 이유이다.
그들은 짧은 곡 하나를 써도 의미를 담기 때문에 배울 점들이 많다. 오히려 대작들에서 나타나지 않는 엄청난 밀도와 과감함, 강렬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춤곡이라는 곡의 특성상 사실 진지한 얘기를 담는 것은 다소 어울리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사교 모임에서 노래를 곁들여 추는 한없이 가벼운 곡이어야 하는데, 무게를 잡고 있는 것이 어색할 법도 하다.
슈베르트는 여러 사교 모임에서 친구들을 위해 즉흥적으로 춤곡을 작곡하기도 했는데, 이 곡들은 그런 가벼운 목적으로 작곡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곡을 쓸 시기에 슈베르트는 매독으로 건강이 이미 악화되기 시작하여 전 해인 1822년부터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야 했기 때문.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슈베르트의 이 곡은, 무게감은 없지만 사색적이면서 눈물을 머금고 있는 듯한 비애가 느껴진다. 또 베토벤에 비할 바는 분명히 아니긴 하지만 구조에 대한 고민과 연구도 나름대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슈베르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젊은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최만년의 작품들에서 동나이대의 대작곡가들이 보여주었던 뛰어난 음악성과 깊이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 베토벤, 브람스 등이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31세의 나이에 어떤 곡들을 썼는지 생각해보면 비교가 될 것이다.
공연 후기를 작성할 때는 되도록이면 이론적인 내용들을 많이 덜어내려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부분이 있기는 하다. "이런 부분들은 어떤 것들을 고려해서 쳐야 하는데, 이 연주자는 이렇게 쳤다"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근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렇게 여러 곡을 이어놓은 연작의 경우에는 구성하는 각각의 곡들의 개성을 살리면서도 그들을 관통하는 여러 요소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작품에 공을 많이 들이는 작곡가일수록 이런 연작을 쓸 때 아무렇게나 쓰지 않고 곡들이 서로 긴밀하게 이어지면서 전체 구성이 만들어내는 하나의 그림도 중요시하곤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 작품이 하나의 곡으로 묶일 이유가 전혀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들이 이론화된 것이 바로 "순환 형식"인데,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써 보도록 하겠다.
아무튼 여러 곡을 하나로 묶어주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전체 곡의 구조이다.
특히 이렇게 짧은 곡들 여러 개가 이어져 있을 경우, 개별 작품 안에서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기보다는 한 작품의 요소를 변화시키면서 그 변화 과정에서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용이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구조를 분석한다는 것은 각각의 곡의 형식, 조성, 모티브, 템포, 박자, 리듬 등 수많은 요소들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 곡처럼 모든 곡이 "랜틀러"이라는 하나의 장르로 묶이는 경우는 형식이나 템포, 박자, 리듬과 같은 요소들보다는 조성과 모티브에 더욱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듣는 사람에게도 그런 것들의 변화가 더욱 잘 들릴 것이기 때문.
나의 경우 듣는 것과 유리된 분석을 굉장히 지양하는 편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어떻게 들리는가"로 귀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데 이 곡의 조성 구조를 분석하다 보면 뭔가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곡의 원고를 발견하고 편집하여 초판을 내놓은 것이 다름 아닌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 - 1897)다.
작곡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만, 그는 많은 수의 작품을 편집하고 수정한 편집자이기도 했다.
수 없이 많은 곡을 연구하여 자신의 작품 활동에 반영한 그는 단순히 이전 시대의 음악을 연구하고 즐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늘날의 고전음악 애호가처럼 자필 악보나 편지 같은 글을 모으는 수집가이기도 했다.
그때는 음반 같은 것도 없었으니 음악을 들으려면 당연히 누군가가 연주를 해야 들을 수 있는 것인데, 선배 작곡가인 슈만과 멘델스존의 뒤를 이어 이전 시대의 음악을 발굴하여 출판하고 초연하는 데 브람스의 그러한 취미가 상당히 많은 기여를 했다.
당대 빈 음악계에서 브람스가 가졌던 위상을 생각하면 이러한 흐름은 파급력이 컸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그가 높이 평가한 슈베르트의 재평가도 이루어질 수 있었다.
브람스는 1863년 빈 여행에서 슈베르트의 여러 원고를 발견하고 이를 출판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이 12개의 랜틀러이다.
한 가지 의문은 그가 원고를 발견하고 편집한 이 12개의 랜틀러가 처음부터 하나의 세트였냐는 것이었다.
특히 춤곡의 경우는 당시의 관례가 어떠했냐면, 작곡가의 의사와 관계없이 출판사에서 여러 춤곡을 한 번에 묶어 세트로 출판하는 일이 흔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곡의 케이스는 슈베르트의 생전에 출판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우가 조금 다르다.
또한 브람스는 다른 곡들을 편집할 때 원고를 최대한 그대로 살리고 정말 최소한의 터치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곡의 경우에도 슈베르트가 빠트린 것으로 추정되는 몇 가지 임시표를 추가하는 데 그쳤다. 당연히 실수처럼 보이는 것들도 이것이 슈베르트의 의도가 맞는지 고민한 흔적이 많이 보인다.
또 다른 문제는 이 곡들 중 일부는 처음 출판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다른 곡들과 섞여 서로 다른 배치와 구성으로 연주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경우에 따라 같은 곡을 조성을 바꾸어 싣는 일도 일부 발견된다. 이 곡의 경우 2번, 8번이 D.783/Op.33이라는 세트에 포함되어 출판된 바 있다. 8번은 조성이 바뀌고 앞부분이 조금 다르다.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로운데, 뒤에서 간략하게 설명해보겠다.
요즘 클래식계의 분위기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일일 것이다. 작곡가가 남긴 셈여림, 아티큘레이션 하나 가지고 어떤 게 맞는지 토론을 벌이는 마당에 멀쩡한 곡을 작곡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여기저기 끼워 넣는 게 웬 말인가.
그러나 춤곡이라는 특성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요즘도 클럽이나 이런 곳에서 춤을 출 때 DJ가 여러 음악을 믹싱해서 틀어주듯, 여러 춤곡을 묶어 한 번에 연주하는 것이 그 당시에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순전히 실용적인 맥락에서 나온 현상인 것이다.
춤추는 사람 입장에서 춤곡에서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는 리듬, 템포와 분위기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어차피 리듬과 템포야 같은 랜틀러, 왈츠 내에서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니 무슨 음악이 무슨 음악 앞에 오고 첫 곡으로는 뭐가 오고 마지막 곡은 뭐가 와야 하고 그런 것은 조금만 생각해도 별 대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렇게 한 세트로 묶어 출판된 이 12곡들 사이에서 어떠한 일관성을 찾는 것이 다소 의미 없는 작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분석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작곡가의 의도를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없으면 없는 대로 받아들이면 될 것이다.
이쯤 되면 그냥 없다고 하고 넘어갈 수도 있음에도, 브람스가 다른 편집자들이 으레 하듯 배치나 순서를 고치거나 하지 않고 거의 원고 그대로 출판했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브람스가 편집한 건데, 브람스는 이러한 곡의 배치가 슈베르트가 의도한 그대로라고 믿은 듯하다.
그래서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좀 더 슈베르트의 입장에서 이 작품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슈베르트는, <겨울 나그네>나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와 같은 연가곡의 경우도 같은 조성으로 끝내지 않은 작곡가이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순서나 관계는 결코 즉흥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매우 섬세하게 설계된 결과이다.
그럼에도 라장조로 시작한 음악이 마장조로 끝난 것이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라장조로 시작한 음악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라장조로 끝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
바로 이러한 점에서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함께 낭만주의의 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것이다.
고전적인 맥락에서는 집을 떠났으면 당연히 원래 집으로 돌아와야 이야기가 끝나는 것인데, 낭만주의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보내고 끝내는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느 것이 맞고 틀리다기보다는, 그것을 얼마나 더 설득력 있게 표현하느냐의 문제다.
브람스가 이 작품을 접하고 영향을 받아 작곡한 곡이 <16개의 왈츠, Op.39>인데, 공교롭게도 이 곡 또한 나장조로 시작해서 올림 다단조로 끝나서 첫 곡과 마지막 곡의 조성이 다르다.
바로 이 브람스의 작품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는데, 이 브람스 Op.39와 슈베르트 D.790의 마지막 곡의 공통점이 둘 다 다른 춤곡들과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
3박자 리듬이 강조되지 않고, 멜로디라고 할 만한 것은 아르페지오뿐으로 뚜렷한 라인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으로 D.790의 첫 곡을 바라보게 되면, 이 곡도 다른 곡들에 비해 거의 2배가량 긴 것이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러한 점들로 미루어 봤을 때 이 곡은 동등한 춤곡 12개의 세트가 아닌 Introduction과 Finale 내지 Coda를 가진 10곡의 춤곡 세트라고 보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비교적 생뚱맞은 마장조로의 종지가 조금이나마 납득이 가능하다. 게다가 이 곡을 보면 5도 - 1도, 다른 표현으로는 도미넌트(Dominant; 딸림화음)에서 토닉(Tonic; 으뜸화음)으로의 정격 종지(Authentic Cadence)가 곡이 끝날 때까지 계속 나타난다.
이 정격 종지는 이른바 "공통양식시대"(Common Practice Period)에서 한 악구 또는 음악 전체가 끝났음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로써 기능했고, 이 종지가 계속해서 반복되면, 그것도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반복되면 조성감이 확고해지게 되고 안정되면서 자연스럽게 음악의 긴장, 텐션이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힘을 빼는 것이다.
그래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이 5도 - 1도의 정격 종지는 굉장히 절제해서 사용해야 한다. 문장을 쓰는데 자꾸 문장 부호를 남발하고, 문단을 너무 많이 나누면 흐름이 끊기고 어색해지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아래 악보를 보면 알겠지만, 이 마지막 곡인 12번에서는 이 곡의 조성인 마장조의 5도 - 1도의 정격 종지만 9번 나타난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부분들)
A - B의 2부 형식이라지만 곡 전반에서 처음 제시된 2마디의 악구가 계속해서 반복되는 패턴이며 변칙을 준 부분은 단 4마디뿐이다.
그저 "악곡의 종지"라는 기능에 충실한 곡이라는 해석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앞서 언급한 브람스의 Op.39의 마지막 곡은 이렇게 종지 악구가 계속 반복되지는 않지만, 이전 곡의 조성과의 관계를 통해 좀 더 거시적인 5도 - 1도 진행을 만들어내고 있다. (15번은 내림가장조, 16번은 올림 다단조라서 Ab(G#) - C# 관계가 도미넌트 - 토닉의 관계에 놓인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비로소 이제 하나의 흐름은 찾기 힘들어도 대충 그룹은 나눌 수 있게 된다.
아래는 12개의 곡의 조성과 이를 바탕으로 나눈 그룹을 나타낸 것이다.
1번 - 라장조(D major) - Introd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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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 - 가장조(A major)
3번 - 라장조(D major)
4번 - 라장조(D maj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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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번 - 나단조(b minor)
6번 - 올림 사단조(g sharp minor)
7번 - 내림가장조(A flat major)
8번 - 내림 가단조(a flat minor)
9번 - 나장조(B major)
10번 - 나장조(B major)
11번 - 내림가장조(A flat maj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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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번 - 마장조(E major) - Coda
위와 같이 조성에 따라 4개의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처음과 끝을 제외하고 나면 두 그룹이 나오는데, 첫 그룹은 1번의 라장조와 연결되는 D 계열의 조성이고 후자는 B - G#(Ab) 계열 조성이다.
(2번의 가장조는 라장조와 5도, 즉 도미넌트 관계에 놓여있어 하나로 묶어도 무방하고, G#은 Ab와 이명동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그룹을 나누고 나면 비로소 3도씩 하행하는 D - B - G# - E의 큰 그림이 보이게 된다. 연속적이진 않지만, 의도된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시적 구조를 연주에서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사실 작곡가가 이미 곡에서 많은 장치를 해놓았다면 연주자가 해야 할 일이 많이 줄어든다. 예를 들어 그룹이 바뀔 때 분위기 전환을 위해 셈여림, 템포, 리듬 등에 변화를 주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 곡은 그러한 장치들을 적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춤곡"이라는 하나의 카테고리에 놓인 서로 비슷한 성격의 곡들을 모아놓은 곡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주자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연주자는 이러한 것들을 연주로 표현할 의무가 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의도적으로 그룹들의 경계 사이에 시간의 텀을 두어 숨을 쉬는 것이다.
쉬우면서도 강력하지만, 때때로 적합하지 않을 수 있기에 매번 적용할 수는 없는 방법이다. 숨을 너무 자주 쉬면 흐름이 끊어져 긴장감이 줄어든다.
좀 더 어려운 방법은 음색과 울림을 바꾸는 것이다. 이 방법은 효과적으로 구현하기가 매우 힘들지만 뛰어난 연주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음색에 변화를 주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다. 무게를 주거나 덜 수도 있고, 멀리 보내던 울림을 가까이 가져와 내성적으로 만들 수도 있고, 아니면 톤 컬러 자체를 바꿀 수도 있다. 건조한 음색, 촉촉한 음색이라고 표현하는 것들이 그러한 종류일 것이다.
음색의 극적인 변화는 사람들을 집중시키고, 적재적소에 사용되었을 때 깊은 감동을 주기에 뛰어난 연주자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중 꼭 하나만 사용할 필요도 없고, 또 상황에 따라 다른 방법이 있을 수도 있다. 해석의 일부이기에 선택은 연주자의 몫.
그렇다면 이 곡에서는 어떤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먼저 첫 번째 전환점인 1번과 2번 사이. 사실 이 포인트에서는 특별히 어떤 시도를 더 하는 것이 이상하고, 딱히 대비를 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이 낫다.
조성 간의 관계도 가깝고, 셈여림과 텍스처의 대비로 확실하게 끊어주기는 하고 있기 때문이다.
굳이 차별점을 두자면 attacca, 즉 바로 붙여서 연주하기보다는 한 번 끊어주며 숨을 쉬어주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문지영 씨도 이러한 선택을 했다. 문제는 다른 모든 곡에서도 이 정도의 텀을 두었다는 점이다.
나머지 두 포인트들은 확실히 끊어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4번 - 5번 사이의 전환점은 아주 효과적인, 거의 정답에 가까운 방법이 있다.
4번의 마지막 부분과 5번의 악보를 첨부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헨레를 비롯한 원전판(Urtext) 악보들에는 저 5번의 첫마디의 셈여림이 16마디와 같게 pp(피아니시모)가 아닌 ppp(피아니시시모)로 표기되어 있는데, 지금 첨부한 악보에는 첫마디의 셈여림이 pp로 표기되어 있다. 저작권 문제 때문에 해당 원전판 악보들을 첨부할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이다.
원전판이 정확하다는 가정 하에, 슈베르트가 저 위치에 피아니시시모라는 셈여림을 부여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슈베르트가 사용한 셈여림의 범위는 ppp부터 fff 까지였는데, 유명한 포르테피아노(피아노의 전신) 연주자인 말콤 빌슨(Malcolm Bilson)의 말에 따르면 슈베르트의 ppp 지시는 단순한 셈여림 지시가 아닌 약음 페달 지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오기가 더욱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연주자는 이 곡에서 약음 페달을 사용하지 않았다. 프로 연주자니 원전 악보를 보았겠지만 현대 연주자들은 "una corda"나 "mit Dämpfer" 등등 지시가 없으면 약음 페달 사용을 자제하는 경우가 많고 이러한 자세한 배경까지 알지는 못 했던 것 같다.
아무튼 4번에서 포르테로 끝난 후 5번에서 소프트 페달을 사용하여 음색과 셈여림의 대비를 주면 형식의 구분을 표현하기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아쉬운 일이다.
마지막 전환점인 11번과 12번 사이는 어떤 방식이 적합한가?
이 포인트에서야말로 조금 텀을 주는 것이 적합할 것이다.
아니면 조금 위험한 방법이긴 하지만 템포의 변화를 주는 것도 불가능한 방법은 아닐 것이다. 애초에 마지막 곡인 12번은 다른 곡들과 그 성격이 조금 다르기 때문에, 그런 차이를 반영해서 다르게 접근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중요한 포인트들에서 준 변화들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다른 곡들 사이에서, 특히 많은 연관이 있는 두 곡 사이는(예를 들어, 조성이 같거나, 주요 모티브를 공유하거나 등) 텀을 거의 주지 않고 attacca로 가져간다든지 이런 차별을 두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변화를 줘야 하는 포인트에서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부분들에서 절제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템포에 대해서 언급하자면, 이 곡에는 맨 처음에 적힌 "Deutsches Tempo", 즉 독일 춤곡 템포로 연주하라는 지시 외에는 다른 템포 지시가 없다.
물론 템포는 어느 정도는 연주자의 재량이지만,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템포를 변화하지 않고 처음에 설정한 템포를 끝까지 가져가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연주에서 설정된 템포는 독일 춤곡치고는 조금 빨랐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실제로 그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 사람은 당연히 없었지만(?) 이렇게 목적이 분명한 음악은 그에 맞추어 연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특히 이 랜틀러가 왈츠와 가장 대비되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템포인데, 왈츠의 템포가 랜틀러의 거의 두 배에 가깝다. 2부에서 마침 왈츠를 연주했기 때문에, 비슷한 분위기로 비치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템포 대비를 조금 더 주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용으로 시대악기 연주자 트루델리스 레온하르트(Trudelies Leonhardt)의 동곡 연주 영상을 첨부한다.
시대 연주만이 유일한 정답이다 뭐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소나타나 다른 여타 장르들에 비해 춤곡은 그 특성상 템포가 중요하기 때문에 이런 부분들은 작곡가가 특별한 지시를 남기지 않았다면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알 만한 사람들은 레온하르트라는 이름이 익숙하겠지만 하프시코드 연주자로 유명한 구스타프 레온하르트(Gustav Leonhardt)의 여동생이시다.
구스타프가 바흐를 위시한 바로크 레퍼토리로 유명했다면 이 분은 포르테피아노를 주로 연주하여 베토벤, 슈베르트 연주에 주력하였다.
특히 슈베르트의 경우 방대한 양의 녹음을 남기고 연구도 많이 하신 분인 만큼 스페셜리스트라고 불리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들어보면 확실히 현대 연주자들보다 조금 느린 템포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얘기들은 이쯤 해두고 세부적인 디테일 몇 가지만 짚고 넘어가 보겠다.
이 곡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보아야 할 것은 베이스의 움직임이다.
춤곡의 상징과도 같은 3박자의 소위 "쿵짝짝" 리듬은 첫 박인 "쿵"에 많은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또 기본 박에 맞추어 사람들이 리듬을 타기 때문에 춤을 추는 입장에서도 당연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춤곡들에서 일반적으로 화성적 리듬도 한 마디 단위로 가기 마련이다.
화음이 변화하는 단위가 한 마디라는 뜻이다. 즉 한 마디에 한 화음 이런 식으로 대응된다.
이 화음의 성격은 가장 아래 음인 베이스(Bass)에 의해 결정되는데, 어떨 때는 이 베이스가 하나의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이도록 만들 때가 있다. 베이스라인(bassline)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작곡가가 의도적으로 베이스라인을 만들었다는 것이 보인다면, 그것을 살려주는 것이 옳다. 베이스라인, 나아가 화성적 맥락은 음악에 내재된 프레이징 형성과 호흡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가 되기 때문에 무시할 경우 자연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연주가 될 수밖에 없다.
꼭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야만 베이스를 살려주는 것은 아니다.
베이스 성부에 주요 멜로디 및 주제가 등장하거나,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동형진행을 하거나, 3도권(Circle of Thirds; 3도 간격으로 놓인 음, 화음 또는 조성), 5도권(Circle of Fifths; 5도 간격으로 ~) 등 뚜렷한 방향성이 보인다면 그것이 들리도록 연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베이스를 강조하는 것이 상황에 따라 간혹 여의치 않을 수 있으나, 훌륭한 연주자라면 멜로디와 이 베이스 사이에서 밸런스를 잘 유지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을 것이다. 둘 중에 무엇이 음악적으로 중요한 지 판단하는 것도 연주자의 능력이고 해석의 일부이다.
이 곡에서 반드시 살려주어야 하는 베이스라인이 몇 가지 있다.
먼저 3번의 경우 상당히 까다로운데 모든 베이스 음 하나하나가 모두 중요하기 때문이다.
먼저 파란색으로 표시된 4개의 베이스 음 D# - E - A - D의 경우 첫 4마디에서 제시된 후 한 번 반복되고, 마지막에 곡을 마무리할 때 다시 등장한다.
이러한 맥락은 곡의 통일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장치이기 때문에 반드시 살려주어야 한다. 다만 그 방식에 대해서는, 오른손의 아름다운 멜로디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표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파트의 첫 부분에는 반음계로 하강하는 A# - A - G# - G - F#의 라인이 눈에 띈다.
코드 진행으로 따지자면 도미넌트 화음들의 연속 진행으로 F# - B - E - A - D 이렇게 5도권 화음들이 연속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이들은 화성적으로 하나의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음계 베이스라인들은 과하게 강조하지 않아도 그 흐름이 굉장히 잘 들리기 때문에 효과적으로 살려주기 쉽다.
연주자가 고민할 점은 이 두 라인을 어떻게 구별해서 연주할 것인가에 관한 것이다.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을 것이고, 굳이 일일이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음으로 4번에서는 두 번의 반음계 상행 라인이 등장하는데, 이런 베이스라인도 아까처럼 이 곡에서만 나타나는 특징적인 것이기 때문에 살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5번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부분은 앞의 라인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다.
이렇게 여러 마디에 걸쳐 하나의 음을 지속시키면서 화음을 변화시킬 때 이 음을 지속음, 페달 포인트(Pedal Point) 또는 오르간 포인트(Organ Point)라고 한다.
오르간에서 페달을 밟아 놓고 양손으로 그 음 위에 다른 화음들을 연주하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주로 베이스 음에서 나타나며, 드물지만 소프라노 성부나 내성(안 쪽 성부)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이 곡의 경우는 보다시피 베이스에서 나타난 페달 포인트로, 그 음은 곡의 조성인 나단조의 토닉인 B 음이다. 이런 경우를 특히 토닉 페달 포인트(Tonic Pedal Point)라고 한다.
페달 포인트는 그 특성상 해당 음이 매우 강조되기 때문에, 곡의 조성에서 중요한 음인 토닉이나 도미넌트 음을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미넌트 음이 페달 포인트로 사용되면 당연히 도미넌트 페달 포인트(Dominant Pedal Point)라고 부를 수 있다.
이 곡에서처럼 곡의 머리에서 사용되는 토닉 페달 포인트는 조성감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토닉 음이 강조되기 때문에 그렇다.
아무튼 이러한 페달 포인트의 경우 굳이 세게 치거나 강조해줄 필요는 없으나, 이 음들이 끊기지 않고 말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 중요하다. 계속해서 이어지게 들려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페달 포인트는 해당 음이 속하지 않은 화음이 연주되어 불협화가 생길 때 비로소 그 의미가 생기기 때문에 (예를 들어 이 곡의 경우 첫마디에서 연주된 도미넌트 F# 코드의 구성음(F# - A# - C#) 중 A#와 C#는 토닉 화음인 B 코드(B - D# 또는 D - F#)에 포함되지 않는 음이기 때문에 불협화를 만든다) 위 화음과 페달 포인트의 밸런스가 굉장히 중요하다. 어느 두 음이라도 들리지 않으면 그 의미가 퇴색되기 때문에 그렇다.
후에 7번에서는 작곡가가 대놓고 힌트를 주었다. 이 곡도 첫 8마디와 그 이후 몇 마디들에서 베이스가 곡의 조성인 내림가장조의 토닉인 Ab로 묶여 토닉 페달 포인트가 나타난다. 곡 전반에서 나타나는 곡의 주요한 특징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잘 보면 페달 포인트가 시작되는 지점들에 슈베르트가 따로 fp(포르테피아노)라는 셈여림 표시를 해 두었는데, 이보다 친절할 수 없다.
이렇게 적어놓은 부분들은 의무적으로 살려주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연주자는 이 포인트도 효과적으로 살려주지 못했다.
이전에 쇼팽 프렐류드 영상에서 같은 조성의 17번 프렐류드에도 토닉 페달 포인트가 나오는데, 해당 연주에서는 매우 만족스럽게 그 부분을 처리해 주었는데 이번 연주에서는 그렇지 못해 더욱 아쉬움이 남았다. 첨부된 첫 번째 리사이틀 영상 47분 52초부터 해당 부분이 나오니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하시길.
다음으로 8번의 재현부, 원래 주제가 재현되면서 약간 변형된 부분인 25마디부터 30마디까지 베이스에서 동형진행이 나온다.
여기서 멜로디도 비슷한 모양이 반복되는 동형진행인데, 절묘한 것이 화음이 묶이는 프레이즈와 멜로디의 프레이즈가 다르다.
멜로디가 (A - B) (A - B) (A - B) 이렇게 묶여 있다면 화음은 B - A 간의 강력한 도미넌트 - 토닉 관계가 형성되면서 A (B - A) (B - A) B와 같이 그룹이 묶이게 된다.
이들 프레이징이 계속해서 엇갈리면서 해결되지 않고 계속해서 계류하며 마지막 종지까지 텐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잘 설계해 놓은 것이다.
단순한 동형진행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강조해 주어야 할 당위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음을 강조해주기보다는 프레이징을 강조하기 위해 첫 음인 C와 Bb를 특별히 테누토 해주는 것이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토닉 페달 포인트만 보였는데, 9번과 11번에서는 도미넌트 페달 포인트가 곡 머리에서 발견된다.
도미넌트 페달은 토닉 페달보다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두 곡이나 파트 사이의 경과적인 패시지들에서 자주 사용되곤 한다.
이 두 곡에서도 곡의 머리에 사용되면서 앞의 곡과의 조성적 연결을 용이하게 하고 새로운 조성의 토닉으로의 부드러운 전이를 위해 계획적으로 삽입된 것으로 보인다.
9번의 경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첫 4마디에서 페달을 사용하지 않고 베이스 음인 F#를 테누토(tenuto)로 강조해준 다음 새 프레이즈인 5마디부터 페달을 사용하여 분리해주는 방법이 좋을 듯하다.
물론 이 방법만 있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셈여림이나 방향성 등 여러 요인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일 듯하여 제시해보았다.
또 이 곡의 두 번째 파트인 9마디부터 D - A - E - B 이렇게 4도 하행하는 베이스 진행이 나온다. 5도 하행, 즉 4도 상행하는 진행의 경우 도미넌트 - 토닉 관계의 연속이기 때문에 안정되는 방향의 정격 진행(Authentic Progression)이라면, 이 케이스처럼 반대로 4도 하행하는 진행은 토닉 - 도미넌트 또는 서브도미넌트 - 토닉의 변격 진행(Plagal Progression)의 연속으로 텐션이 높아지는 진행이 된다.
즉 점점 커지라는 의미의 크레셴도(crescendo) 표기는 13마디에서 등장하지만 화음 진행의 특성상 앞 9~12마디에도 크레셴도의 맥락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것을 어떻게 연주할지는 연주자들마다 생각이 다를 것으로 생각된다. 내 생각에는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하여 셈여림 자체는 4마디 이후부터 커지되 고조되는 느낌 정도는 살려줄 수 있을 것 같다. 첫 부분처럼 페달 사용을 분리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첫 4마디는 베이스만, 뒤 4마디는 마디 전체를 밟는다든지.
위는 앞에서 언급한 11번의 첫 부분이다. 앞 5마디에서 도미넌트 페달이 사용되고 있다.
그 외에 숨겨진 모티브들에 대해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 보겠다.
앞서 베이스의 페달 포인트를 언급했던 5번의 악보이다.
첫 부분의 오른손 패시지를 잘 보면 성부가 3개인데, 대부분의 연주자들은 첫 프레이즈에서 D - C# - D 라인을 살리고, 그 뒤는 B - A# - B를 살리곤 한다. 문지영 씨도 이와 같이 연주하였다.
그런데 나는, 첫 프레이즈에서 D - C# - D 라인을 살려주었으면 다음 프레이즈에서도 아래 성부의 D - C# - D를 살려주는 것이 음악적으로 더 효과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전자와 같이 연주하게 되면 첫 D - C# - D와 B - A# - B가 한 성부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합당하지 않은 것이, 실제로 이 둘은 같은 성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첫 D - C# - D는 중간 성부가, 두 번째 B - A# - B는 윗 성부가 노래하고 있다.
반면 후자와 같이 연주한다면 D - C# - D를 연주한 앞 성부와 뒤 성부의 음역이 옥타브 차이가 나기 때문에 확실히 분리되어 다른 성부로 들리기 때문에 음악적으로도 더 합리적이고 대화하는 듯한 제시 - 응답 형태로 더욱 흥미롭게 들린다. 이렇게 되면 성부 간의 자리바꿈을 했다는 인상을 강하게 줄 수 있다는 효과도 있다.
또한 연주와는 무관하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패시지의 멜로디는 토닉인 B음으로부터 3도씩 하행 후 상행하는 ((B) - G - E - C# - A - (A) - F# - D - F# - A) U자 곡선을 그리는 형태로 조성되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같은 부분이 재현되는 부분인 21~24마디에서는 3도 아래로 평행 이동하여 재현된다.
7번과 8번의 멜로디 간 유사성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앞에서 8번이 다른 춤곡 세트에 포함되었는데 이 세트에서 변형되어 실렸다는 말을 했었다.
그런데 이 변화가 더욱 눈에 띄는 것이, 이렇게 변형하면서 비로소 7번과의 유사성이 생겼다는 것이다. 즉 슈베르트는 이를 의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뜻이다.
먼저 7번과 8번의 첫 부분을 비교한 것이다. 멜로디가 그리는 곡선, Contour가 매우 유사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7번의 C - Bb - Eb - Bb - C - Ab에서 선법만 단조로 바뀌어 C음이 Cb으로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D.783에 실린 것과 비교하면 상당수 부분이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재밌는 것은 이 8마디 이후의 나머지 부분은 같다는 것이다. 7번과의 유사성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바꾸었다는 주장에 힘이 더욱 실리는 이유이다.
아쉬운 것은 이런 유사성을 연주에서 살려주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특히 8번의 경우 1, 3마디의 3박에 화음의 변화로 인한 악센트가 삽입되어 있어 더욱 상황이 여의치 않다.
이쯤 되면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나 연주에서 이 점을 고려하여 연주할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곡에서 등장하는 여러 아티큘레이션들에 대해서 말하고 이 곡에 관해서는 마치도록 하겠다.
슈베르트를 비롯한 많은 고전 작곡가들은 스타카토의 종류를 굉장히 세분화하여 사용하였는데, 문제는 손으로 기보한 악보에서는 이들을 서로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20세기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기호가 서로 구분되지 않은 채 모두 스타카토로 획일화되어 기보 되었고 연주되었다.
최근의 악보들에는 이러한 아티큘레이션 기호들을 정확하게 표기하여 나오고 있지만, 또 이들을 어떻게 구분하여 연주할 것인지에 관한 연구도 명확하게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곡에는 다른 종류의 스타카토 기호는 보이지 않는데, 대신 슬러 스타카토(slur-staccato)와 일반 스타카토를 구별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또 스타카토 뉘앙스가 강한데 스타카토 표기가 되어있지 않은 부분들에 대한 고민도 필요할 것이다.
문지영 씨의 경우 악보의 표기를 최대한 존중하여 스타카토 뉘앙스가 강하더라도 표기되어 있지 않으면 페달 등의 사용을 통해 울림을 연결하는 결정을 하였다. 다만 한 가지 문제점이, 슬러 스타카토 부분에서도 페달을 사용하여 이 둘이 잘 구분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내가 잘 못 들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그날 상당히 뒷자리에 앉아서 관람했었는데 소리가 조금 울려서 해상력이 조금 떨어지는 상황이었다.
물론 내 귀가 적응을 한 것인지 연주자가 조절을 한 것인지 이후 프로그램부터는 그러한 경향이 덜 했는데, 이 곡을 들을 때는 확실히 소리가 울려서 스타카토 뉘앙스가 페달을 밟았을 때 잘 살지 않았다.
자리의 문제, 내 귀의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슬러 스타카토를 연주할 때 개인적으로는 페달을 사용하지 않고 표현하는 것이 더욱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또 1번의 경우 처음 나오는 선율이 화음이 바뀐 형태로 두 번째 파트에서 반복되는데, 아래 마디를 보면 프레이징이 전혀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페달을 밟게 되면 확실히 프레이징의 맺고 끊음이 잘 들리지 않는 느낌이 있다. 그래서 이 공연에서도 저 둘의 구분이 잘 되지 않았던 느낌이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2번의 첫 부분이 앞에서 내가 언급했던, 스타카토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지만 표기는 되어 있지 않은 경우인데, 문지영 씨는 이 패시지에서 페달을 사용하여 스타카토 뉘앙스를 최대한 감추려고 하는 느낌이었다.
이러한 선택은 바로 뒷부분에서 스타카토 패시지가 나오기 때문에 곡 안에서의 대비는 잘 만들어냈으나, 앞의 1번의 슬러 스타카토와의 구별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느낌이 강하게 들어 아쉬움이 남았다.
전체적으로 무난한 호연이었다.
춤곡과 다소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다소 어두운 무채색의 톤을 계속 가져갔는데 연주회 전반의 메시지나 곡의 배경을 따져보면 일견 이해가 되는 일이었다.
이후의 즉흥곡과의 대비를 위해 이 곡에서 좀 가볍게 가져갔어도 괜찮았을 법했지만 사실 이 즉흥곡들이 곡 내내 시종일관 어두운 분위기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무방했다.
게다가 연주회 전체의 메시지를 생각한다면 다분히 의도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안 좋은 얘기들만 늘어놓은 것처럼 보여 오해를 살까 봐 말하자면, 이런 얘기들을 굳이 하는 이유는 다른 부분들에서 흠잡을 바 없는 완벽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더 높은 차원의 얘기들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테크닉적으로도 어려운 곡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실황에서 나올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연주였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확실히 대부분의 연주자들이 그렇듯 화성적인 맥락이나 이론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 측면에서는 조금 부족하다고 느껴졌지만 사실이나 이 정도도 못하는 연주자가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널린 것이 현실이다.
기본도 못 지키는 연주자에 대해서는 이런 말들을 하기도 아깝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후기에 이런 걸 쓴다는 것은 나로서는 극찬에 가깝다.
위에서 열거한 내용들은 정말 비로소 거장이 되어야, 아니 거장들도 많은 곡들에서 제대로 지키지 않고 연주하는 경우가 태반인 사항들이다.
그러나 위대한 연주자는 듣는 사람에게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연주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 눈에는 문지영 피아니스트가 그런 연주를 보여줄 가능성이 충분해 보였다. 앞으로의 성장이 더욱 기대되는 연주자에 대해 보내는 나의 애정의 표현(?)이라 해두자.
글이 너무 길어지는 듯해 일단 여기서 갈무리하고 나머지 프로그램에 대한 얘기는 2편에서 이어가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