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달루시아의 뜨거운 태양, 말라가 #1
덥다.
양손으로 23kg에 달하는 캐리어를 들고 10kg는 되는 것 같은 배낭과 기내용 가방 하나까지 낀, 겨울옷의 이방인이었다. 히트택까지 껴입으며 아무리 그래도 북반구의 겨울인데 이정도는 입어줘야지, 매서운 한파가 만들어낸 생각이었다. 20도보다 조금 안되는 말라가의 겨울, 나보다 코트 한 벌 정도는 덜 입은 주위 사람들을 보자 가방이 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여기서 숙소까지는 또 이 무거운 짐들을 들고 어떻게 가야하나, 오기 직전 언니와 전화하며 우버를 타고 에어비앤비에 가겠다는 내게 '우버가 얼마나 위험한데!'라고 얘기하던 언니의 말이 괜히 귓가에 맴돌아 작은 말라가 공항의 벤치에서 괜히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먼저 와있는, 아직 두 번밖에 못 만났지만 이 넓은 유럽 땅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인 목화언니에게 비행기에서 내렸음을 카톡으로 보내고 우버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20여분을 고민 끝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는 또 왜 이렇게 고픈 건지 암스테르담 비행기에서 나눠준 KLM의 브라우니를 씹으며 그래, 해보는 거야. 가야지.라는 생각으로 우버를 불렀다. 내 첫걸음이었다
파란색 정장을 입은 우버 기사님이 내게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지중해 연안답게 멋들어진 선글라스와 남색도 아닌 다소 쨍한 파란색의 세미정장을 입은 기사님. 이게 스페인의 정열이려나! 이런 생각정도 했다.
예약해 둔 에어비앤비로 향하면서, 창문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열심히 봤다. 고백하건대 난 말라가가 어떤 도시인지 아무런 정보도 없이 갔다. 그때의 나는 모든 게 귀찮고 와서 하고 싶은 건 영감에 젖어 더 나은 기획을 하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리고 여러 사람들의 여행 후기를 읽으며 무엇이 유명한지, 뭐가 맛있는지, 어떤 것을 사야 하는지 등 이런 정보는 손하나 까딱하기 싫었고 내가 유일하게 와서 하고 싶었던 것은 지중해 태양이 떨어지는 카페테라스에 앉아 조용히 커피 한잔을 마시며 아무런 생각 없이 앉아있는 일이었다. 집을 구하면 2월 개강까지는 시간이 남아있으니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파리에서 큰 계획 없이 곳곳을 걸어 다니며 2주 정도 지내는 게 나의 가장 큰 목표였다.
모든 게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스페인은 어떤 곳일까, 말라가는 과연 어떤 곳일까, 빠르게 지나가는 말라가의 건물은 아주 낯설었다. 조금 두려웠다. 이 무거운 가방 4개를 혼자 끌고 숙소까지 갈 수 있을까, 혹시 소매치기를 당하면 어떡하지, 누군가가 내 짐가방이 탐나서 홀라당 가져가버리면 어떡하지, 생각하던 중 여기야, 내려! 하는 우버 기사님의 말씀에 내려 짐가방을 정리하자, 내가 우버로 설정해 놓은 숙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혼자 그 가방들을 짊어지고 5분 정도를 걸어가야만 숙소가 나오는 것이었다.
골목길을 걸어가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보내준 사진 속의 철문 앞에 서서 한참을 문과 씨름했다. 번호키 도어락 인생 약 20년, 고등학교 기숙사에서도 무조건 도어락과 카드키인 한국이었는데 열쇠가 무슨일인가. 한참을 씨름하다 지쳐 주저앉기 직전 기적적으로 열린 문으로 들어가며 기뻐하길 잠깐, 내 앞에는 무시무시하게 높고 좁은 계단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막막했다. 이건 그냥 사실 해낼 수 있을까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내게만 손해인 일이었기 때문에 캐리어를 질질 끌고 올라갔다. 쿵쿵 소리를 내며 캐리어를 옮기고, 다행히 1층에 사는 할머니께서 측은하게 나를 보시며 가방을 봐줄 테니 편히 짐을 옮겨라,라고 하셔서 좀 시간을 챙기며 올라갈 수 있었다. 짐을 다 옮기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꼬질꼬질한 상태로 급하게 만나기로 한 목화언니와의 약속장소로 향했다.
에어비앤비를 나서자마자 보인 풍경은 내가 상상하던 유럽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리 날씨가 좋은 말라가라고 하더라도 겨울은 겨울이었기에 조금 우중충했고, 건물은 아기자기하기보다는 그냥 조금 오래된 건물 같아 보였다.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바로 앞에 있는 것들이 내가 얼마나 자주 가고, 또 좋아하게 될 곳들이란 것을 잘 몰랐던 것 같다.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숙소 위치는 단연코 최고 중 최고였다. 길을 나서자마자 오른쪽으로는 모든 식료품이 있는 LIDL이, 왼쪽으로는 내가 너무나 애정하는, 지금은 너무너무 그리운 화이트 초콜릿 딥을 파는 츄러스 가게 Tejeringos가 있고 맞은편으로는 스페인 대표 백화점 El Corte Inglés가 보인다.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말라가의 Centro로 향하는 다리가 있다. 어디서든 걸어서 닿을 수 있는 말라가이지만 이렇게 모든 게 가까운 곳은 또 쉽지 않다. 더군다나 fiesta의 나라 스페인은 새벽까지 Centro는 사람이 많아 시끄럽기 때문에 주거지역으로는 그만큼 완벽할 수 없는 곳이었다. 남은 기간 동안 결국 Huelin에 살며, 해변과 가깝지만 늘 놀기 위해 40분을 걷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때는 정말 말라가 노른자에 운 좋게 지냈던 것이었다.
목화언니를 만나러 가는 길, 사실 나는 이 날 약속시간에 10분 정도 늦었는데 Centro와 SOHO 사이 대로변을 지나가며 신기한 것들을 계속 두리번대며 가느라 늦었다. 고등학교 때 세계지리를 배우면 지중해성 기후 지역들은 오렌지나 레몬이 가로수 나무라고 했는데, 그게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게 얼마나 신기하고 재밌는 일인지 그때 알았다. 이곳은 왜 꽃집도 이렇게 빈티지하고 예쁜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하나하나 눈으로 담고, 사진으로 담았다. 스페인어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스페인어로 된 간판이 펼쳐진 거리가 마냥 신기하고 낯설면서도 좋았다.
목화언니와 만나서 Los Mejillos로 향했다. 그래도 스페인에 왔는데 빠에야는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선택한 곳이었다. 스페인 첫날은 스페인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이상한 욕심이 있었다.
아직 1월 말인 말라가는 밖에서 밥을 먹기에는 쌀쌀했지만 따뜻한 난로도 있겠다, 앞으로 자주 올 것 같은 말라가의 시내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느끼고, 익숙해지고 싶어서 밖의 좌석을 선택했다. 빠에야 하나와, 한국에서 은은하게 유행하던 감바스를 시키려고 메뉴를 펼쳤는데 이게 웬걸, 감바스 종류가 그렇게 많이 있을 수 없었다. gambas는 다 gambas인데 왜 이렇게 뭐가 많은지, 한참을 유심히 보다 목화언니와 대충 느낌이 오는 대로 시키고 애써 우리가 아는 그 gambas가 맞을 거야,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요리가 나오는데 내가 알던 감바스가 맞긴 맞는데.. 새우구이가 나와버렸다. 스페인어로 gambas는 그냥 새우였다는 것을. 백종원 아저씨가 보여준 올리브유와 마늘이 함께 어우러지는 감바스는 gambas al pil pil이라는 것을.
첫날의 말라가는 이런 신기함의 연속이었다. 그냥 말라가여서 특별했는지도 모르겠다. 힙하디 힙한 카페가 발에 치일 듯 많은 서울을 불과 며칠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돌아다녔는데 말라가에서는 La bella Julieta라는 카페의 이름에서부터 감탄하며 사진을 찍어댔던 것 하며 르꼬르동블루 출신 파티시에의 베이커리에도 큰 기복 없다가 말라가 길거리 이름 모를 빵집 쇼케이스에 홀려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던 처럼. 늦은 밤이 아니었지만 어둑해진 낯선 곳이 살짝은 두려워 목화언니와 꼭 붙어 걷던,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기대하며 아무도 우리를 모르고 아무도 우리의 말을 이해할 수 없는 그 동떨어진 거리를 걷던. 그 모든 것이 새롭던 풍경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생각해 보면 17시간의 비행동안 불편해서 하루 넘게 잠을 못 잔 상태였는데 어떻게 그렇게 돌아다녔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짐정리도 못하고 다크서클은 줄넘기할 만큼 내려와 꼬질꼬질한 상태로 한참을 걸었지만 근 몇 달간의 그 어떤 하루보다 또렷하고 가장 솔직한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어쩌면 그날의 말라가는 정말 마법이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