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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Jun 19. 2023

인연의 징검다리

소소한 에세이 첫번째 과제 - 일기


  6개월 간의 휴직을 하면서 ‘육아휴직’이라는 타이틀에 맞게 아이들을 케어하는 것 외에 거창한 계획은 따로 없었지만, 오로지 아이를 기르는 것 뿐 아니라 나 자신도 보살피자는 뜻에서 내 육아휴직의 부제는 ‘자아휴직’ 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기적으로는 우선 6개월이라는 기간을 꽉 채워 동네 요가원을 등록했다. 단기적으로는 ‘다음 주에 무엇을 할까?’ ‘누구를 만날까?’ 고민할 때마다 내가 결정의 기준으로 삼는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출근할 때 할 수 없었던 일인가?’ 이다. 


  오전에 요가를 다니는 것을 비롯해서 혼자 조조영화를 보는 것, 벚꽃을 보러 평일 낮에 윤중로에 가는 것,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적이는 것, 아이들 귀가에 맞춰 – 매일은 아니더라도 – 깨끗한 집안과 따끈한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것, 컨디션 안 좋은 둘째가 ‘오늘은 어린이집 가기 싫은데..’ 하면 흔쾌히 가정 보육을 결심하는 것, 아이 친구 엄마들과 낮에 커피 한 잔 하는 것... 등 누군가에게는 평범하게 느껴지겠지만 워킹맘으로 지낸 지난 8년의 시간 동안 나에게는 사치처럼 느껴졌던 일상이다. 이러한 일상에 더해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나 선후배에게 전화해 안부를 묻고, 시간이 맞으면 밥 한 끼 하는 것도 나에겐 큰 즐거움이다. 


  오늘은 친구도 선후배도 아닌 육촌 조카 예림이와 점심을 먹은 날이다. 6.25가 일어나기 전 해에 오남매의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신 우리 아빠는 비슷한 시기에 시집 온 큰 형수님이 낳으신 조카와 함께 비슷한 또래로 자랐다. 그 조카가 나에겐 사촌오빠이고, 유년기부터 도저히 오빠 같지 않은 아저씨들에게 ‘오빠’라고 불러야 했던 나에겐 마찬가지로 조카 같지 않은 조카가 있는데 딱 한 살 차이 나는 여동생 같은 큰 조카가 바로 예림이이다. 예림이는 자기 아래로 줄줄이 태어난 사촌 동생들과 한 동네에서 자주 드나들며 자랐고, 나는 부산에서 자라며 겨우 일년에 한 두 번 명절에나 만나는 사이여서 언니 동생하는 그들과는 거리감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고모’ 라는 호칭이 그 거리감을 더욱 강화한 것 같다. 


  몇 주 전 구로 디지털 단지를 지나다 우연히 모 게임회사를 다닌다던 예림이가 생각나 톡을 보내보니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서 혼자 지내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고모가 밥 한 번 사마 하고 잡은 날이 바로 오늘이었던 것. 재택근무 중 점심 시간이 있어 한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을 내어 만난 예림이는 어릴 적 수줍은 모습에 사회생활 하던 연륜이 제법 더해져서 넉살 좋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어주었다. 덕분에 내 결혼식 때 스치듯 인사하긴 했지만 그 전후로 20여년 간 문자 한 번 주고 받지 않았던 시간이 무색하게 정다운 대화를 할 수 있었다. 

  아직 싱글이라 잔소리 듣기 싫어 고향집에 안 내려간 지 한참이라는 조카는 결혼 하고 아이가 둘인 고모가 부럽다 했지만, 작은 원룸에서 자유로운 날들을 보내던 내 과거가 떠올라서 나도 부러운 건 마찬가지. 연애해라 결혼해라... 또는 결혼 하면 여자가 손해니 하지 말아라 등 조카가 이미 숱하게 들었을 훈수를 나도 모르게 두고 있을까봐 염려되는 마음에 그 주제를 피하다 보니 내가 싱글이던 시절 여행 다니던 이야기와 지금 남편을 만나게 된 연애 스토리, 사회 초년생 때의 에피소드 등을 늘어놓게 되었다. '안물안궁' 재미없는 꼰대 이야기일 뿐이려나 싶지만 겨우 한 살 차이이니 그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다음 만남이 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징검 다리 같은 이런 만남이 다음 만남의 어색함과 뜬금없음을 줄여줄 것이라 믿으며 한 명씩 섭외 대상을 물색하고 있다. 물론 나는 그러한 어색함과 뜬금없음을 즐기는 파워 E형 인간이라 이러한 만남을 즐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흘러가는 데로 흘려보낼 시절 인연도 있지만, 그냥 보내기 아쉬운 소중한 인연이라면 징검다리를 놓아 이어나가려는 노력을 해보는 것도 좋은 시도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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