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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Jul 18. 2023

여섯 살의 인생 수업

소소한 에세이 세 번째 과제 - 여섯 살 암흑기

  요즘 아이들 – 특히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은 - 돌 전후로 어린이집을 가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학교에 가기 전 총 세 곳의 기관을 다녔다. 다섯 살에 동네 미술학원 유치부, 여섯 살에는 부산의 큰 절에서 운영하는 불교유치원, 일곱 살에는 다시 동네로 돌아와서 동네 음악학원 유치부. ‘OO학원 유치부’는 동네 상가에 있는 예체능 학원에서 낮에 운영하는 유치원 같은 개념인데, 요즘 생각해 보면 일명 영유라고 불리는 ‘영어학원 유치부’의 시초가 아니었나 싶다. 


  내 유년기에서 가장 혹독했던 시절은 바로 여섯 살, 불교유치원에서의 1년이다. 그 유치원은 부산시 전역으로 큰 셔틀버스를 여러 대 보낼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유치원이었는데, 옥련사라는 절에서 운영을 하고 주지 스님이 곧 원장선생님이셨다. 부모님이 불교 신자이셔서 절에 대해 큰 거부감은 없었던 나였기에 불교식 식사 감사 노래나 강당의 황금색 불상은 별로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나의 시련은 당시 ‘무궁화반’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각종 놀이나 활동을 제시간에 완성하기 힘들었다는 것. 

  열 칸짜리 공책에 어떤 낱말카드를 풀로 먼저 붙이고 한 바닥씩 글자를 따라 써야 했는데 여섯 살의 나는 아마도 까막눈이었던 것 같다. ‘펭귄’이라는 글자를 아무리 똑같이 따라 그리려고 해도 자꾸만 ‘펭권’ 이라고 밖에 써지지 않을 때의 당혹감은 아직도 꽤나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낱말카드를 어디서 받는 것인지도 몰라서 – 또 물어볼 만큼의 숫기도 없어서 – 친구들 공책을 보고 펭귄이나 가위, 라디오 등의 그림을 비슷하게 베껴 그리길 여러 날... 요령껏 검사를 피해왔는데 어느 날 선생님께 발각되어 그동안의 낱말카드를 모두 다 – 내가 그린 그림 위에 풀칠을 해서 덮으며 – 새로이 붙여 주시던 기억 역시 무척이나 불편한 감정으로 남아있다. 

  반에 친한 친구는 없었다. 모두 어리숙했던 날 귀여워하며 친절을 베풀었던 것 같기는 하지만. 한 동네에 살며 같은 셔틀을 타는 어떤 친구와는 그래도 이름을 부르며 인사를 하고 지내기도 했는데 나중에는 그마저도 친구가 아닌 사이가 되어버리고 만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반으로 전학 온 아이가 나와 같은 동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어 빠르게 친해진 적이 있다. 서로의 집을 오가며 가깝게 지내던 그 친구가 어느 날 “사실 이 동네에 사촌 언니가 살고 있어서 여기로 이사 온 거야. 우리보다 한 살 많고 이름이 차OO야.”라고 말해주었을 때 어찌나 놀랐는지! 이름도 특이했던 차OO은 바로 유치원 때 같은 반이었고 “OO야 안녕?” 하고 인사를 나누던 그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요즘 말로 이건 “꼬여버린 족보”, 친구는 언니라고 하는데 나는 OO야 하고 반말을 하는 사이. 


  막 퇴근해서 구두도 벗지 못한 엄마에게 쪼르르 달려가 이 사건을 이야기한 나는 드디어 이 모든 혼란의 원인을 밝혀냈다. 엄마는 뭐 별 것 아닌 일로 이리 호들갑이냐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아~ 그때? 니 여섯 살 때? 유치원에서 제비 뽑기하고 당첨돼서 접수하러 갔는데 가위질이랑 색칠이랑 이것저것 시키보데? 그러더니 일곱 살 반에 넣어도 되겠다 해서 월반했다 아니가. 니 몰랐나?” 


  댕- 하고 머리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어쩐지 내 나이를 물어보며 나를 신기해하고 귀여워하던 친구들, 따라가기 힘들었던 공부의 양. 나는 과제를 다 끝내지 못했는데 어느새 다 끝낸 친구들은 카펫에 옹기종기 앉아 동화구연을 듣곤 했었다. 선생님이 한 주간 매일 들려주시는 어떤 문장들을 가정에다 전달하면, 엄마가 수첩에 받아 적어서 다시 가방에 넣어주는 숙제도 있었는데 무슨 말인지를 몰라 외우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었는데... 뒤늦게 알게 된 진실에 내 마음은 허무하고 슬펐다. 어쩐지 여섯 살의 나는 유치원에서 작고 외롭고 허덕이기만 했다. 일곱 살에 다시 또래 친구들과 동네 음악학원을 다닐 때는 리듬치기도 피아노도 곧잘 한다고 칭찬받고, 그림대회에서 상도 받으며 밝게 지낸 기억만 가득한데 여섯 살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뒤늦게 밝혀진 내 여섯 살 암흑기의 이유가 어른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된 월반 때문이었다니 한동안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그 후로 나는 매스컴을 통해 천재 소년 송모군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또래끼리 어울리며 얻을 수 있는 많은 행복과 즐거움을 어른들이 마음대로 앗아간 것만 같아서.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것이 있다. 나는 딱 1년만 그런 시절을 보내고 말았기에 내 아이를 키우는 데 있어서 지나친 선행이나 조기 외국어 교육을 조금은 꺼려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또래와의 정서적 교감이나 주고받는 언어적 표현이 삶을 얼마나 알록달록하게 만들어 주는 지를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동안 엄마를 원망하는 마음이 컸지만 요즘은 또 다르게 생각해 보니 그것도 여섯 살의 값비싼 인생 수업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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