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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Dec 25. 2023

화이트 크리스마스(2)

소소한 에세이 과제 ‘날씨’


  그날은 어쩐지 공부 내용이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아 하루 종일 축제처럼 밖에서 놀다 하루가 다 지나갔던 것 같다. 무섭기로 소문난 학생 주임 선생님도, 늘 회초리를 들고 다니던 영어선생님도 우리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으셨다.

  집으로 가는 길에는 학교에서 보다 더 비탈진 내리막길을 내려가야 했는데, 난생처음 보는 눈 쌓인 내리막길을 걸어서 내려가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지만 행인들의 얼굴에서는 괴로움보다 즐거움이 묻어났다. 심지어 비탈길을 오르내리던 승용차 한 대는 브레이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바퀴가 헛돌더니 아래쪽에 있던 차까지 슬금슬금 미끄러져 내려가 ‘콩!‘ 하고 부딪히는 접촉 사고를 냈다. 눈앞에서 그런 사고를 목격한 건 처음인데 왜인지 만화 속 장면 같아 웃음이 나왔다. 지나가던 여고생들이 깔깔 웃어서였을까? 두 차의 운전자들은 차에서 내려 허허허 하고 웃으며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있다고 이야기 나누셨다.

  여고생이 바라본 눈 오는 부산의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답게 보였지만, 당시의 일이 뉴스로는 어떻게 보도되었을까 문득 궁금해서 찾아보았다.




  49년 만의 가장 많은 눈이었다고 하니, 우리 부모님 세대도 선생님들도 아마 그렇게 많은 눈은 처음 보셨던 모양이다. 처음 눈이 내리던 날은 어른들도 즐거우셨을지 모르지만 제설장비와 염화칼슘이 전혀 준비되지 않았던 ‘따뜻한 남쪽나라' 부산에서는 한동안 그 눈을 치우지 못해 최악의 눈 피해를 겪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서울에 올라와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살고 있는 요즘은 겨울에 눈 내리는 모습이 그렇게까지 신비롭고 굉장한 일까지는 아니게 되었다. 너무 신나 하는 모습은 왠지 '서울 어른' 같지 않아 보일까 봐 조금은 설레는 마음을 감추고 우산을 쓴 채 의연하게 눈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곤 한다. 더군다나 화이트크리스마스에 더 이상 명동이나 강남역에 갈 일이 없는 나로서는 요즘도 예전 같은 날씨 마케팅이 존재하는지조차도 잘 모르고 산다. 하지만 재작년에 사놓고 시기를 놓쳐 포장도 뜯지 못한 아이들의 눈썰매와 - 아이돌 버프로 배송이 밀려 - 몇 번 사용하지 못한 눈오리집게는 올해의 첫 함박눈을 기다리는 내 마음인지도 모르겠다. ’서울 어른‘의 몸속에 꽁꽁 숨겨놓은 ‘부산 아이’의 마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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