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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쓰홀릭 May 15. 2024

시절인연

소소한 에세이 과제 ‘내 인생의 명언’

  본 뜻은 모든 사물의 현상은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말을 가리키는 불교용어다. 명나라 말기의 승려 운서주굉(雲棲株宏)이 편찬한 '선관책진(禪關策進)'이라는 책에 나오는 말로, '시절인연이 도래(到來)하면 자연히 부딪혀 깨쳐서 소리가 나듯 척척 들어맞으며 곧장 깨어나 나가게 된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현대에는 모든 인연에는 때가 있다는 뜻으로 통하며 때가 되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인연의 시작과 끝도 모두 자연의 섭리대로 그 시기가 정해져 있다는 뜻도 내포한다.                                                                                                        - 나무위키에서 발췌-


  ‘시절인연’이라는 말을 모르던 유년기의 나는 본의 아니게 친구들을 서운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딱풀처럼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와 2학년 때 다른 반이 되어 서운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그건 그때뿐. 2학년이 되고 나서는 새로운 반에서 새 친구를 사귀느라 바빠 예전 친구가 자꾸만 교실에 찾아오거나 같이 집에 가자고 기다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던 나였다. 해마다 그런 일은 반복되었고, 우리 교실에 찾아오는 친구들은 나의 새 담임선생님께 야단을 맞거나 주의를 받곤 했다. 누구를 찾아온 것인지 용건이 무엇인지 말씀드려야 했기에 그 친구와 엮인 나도 왠지 야단맞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불편하기도 했다. 3월까지는 그러한 마음을 안고 그럭저럭 지내다가 자연스럽게 멀어지고는 했는데, 3학년 때 단짝이었던 친구는 4학년이 된 지 한참 지나고도 계속 우리 반으로 나를 찾아왔었다. 얌전한 새침떼기에 잘 삐치기도 했던 그 친구와 달리 4학년 때 처음 만난 새로운 친구는 털털하고 웃기고 보이쉬한 매력이 있는 아이였다. 전혀 새로운 타입의 친구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겨 옛 친구가 걸리적거린다 생각한 나는 급기야 함께 집에 가는 하굣길 놀이터에서 “이제 우리 교실에 그만 찾아와 달라.”는 냉정한 부탁을 하기에 이르렀다. 싸우거나 절교한 것은 아니었고, ‘너도 이제 4학년이니 너네 반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지, 언제까지 나랑만 붙어 지낼 거냐’는 조언을 한 것이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는 닭똥 같은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친구의 눈물을 본 나도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랐다. 내 딴에는 저를 생각해서 한 말인데 섭섭해서 울고 있으니 방금 한 말을 취소할 수도 없고 다시 잘 지내자고 하기에는 내 마음이 너무 떠나버린 후였다.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서 한 초등학생에게 ‘잔소리와 조언의 차이점’을 물었는데, ‘잔소리는 기분 나쁜데 충고는 더 기분 나빠요.’라 대답한 것이 명언으로 회자된 적이 있다. 그때 나에게 시덥잖은 충고를 들은 내 친구는 얼마나 기분 나쁘고 속상했을까? 한 번씩 인생을 돌아볼 때, 그땐 그러지 말 걸 하고 후회되는 몇 장면 중 하나이다.


  여중에 여고를 나오면서 친구 관계는 더욱 복잡 미묘해졌다. 두루 여러 친구들과 잘 지내는 것이 좋은 나와 한 명의 단짝과 깊은 우정을 속닥이고 싶은 소녀들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자꾸만 트러블이 생겼고 나는 그것이 피곤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과 다음 해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도 아무렇지 않았고, 금방 새로운 친구들을 만들어 새로운 반에 적응해 나갔다. 6~7명이나 되는 중학교 1학년 때 친구들은 그런 나를 두고 섭섭하네 어쩌네 하면서도, 우리 중 누구라도 주번활동을 하느라 하교가 늦어지면 운동장에서 놀며 기다려주었다. 등하교를 위해 봉고차에 회비를 내고 있는 나에게 ‘봉고차 타고 가면 배신’이라는 귀여운 억지를 부리며 끈질기게 나를 자기네 그룹에 끼워주었다.

  그래서였을까? 중학교 2학년, 3학년 때 각각의 반에서 나름대로 사이좋게 지내고 함께 소풍 도시락도 나눠 먹고 하던 그룹이 있었지만 그 친구들이 보기에 나의 ‘베스트’는 중1 때 친구들로 여겨졌고 나도 점점 그들의 끈질기고 진한 우정에 스며들었다. 시간이 지나 우리는 각기 다른 여고로, 그리고 또 대학으로, 전국 각지의 직장으로 흩어졌지만 결혼 전까지만 해도 계곡으로 무작정 엠티를 떠나기도 하고, 서로의 자취방을 베이스캠프 삼아 서로를 초대하고 재워주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지낼 때는 서로에게 없으면 안 될 것처럼 소중한 사이였어도 시간이 흐르고 마음의 거리가 멀어져 소원해진다면 그 사람과의 인연은 거기까지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지낸 시간이 길어도 마음의 거리가 가깝다면 언젠가 다시 만났을 때 어색함 없이 인연을 이어나갈 수 있다.      


  결혼하고 이사 온 새로운 동네에서 의지할 곳 없이 아기를 키우던 육아휴직 시기.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 거리며 실시간으로 새로운 글을 읽어 내려가던 온라인카페가 있다. 그곳에 꽤나 주기적으로 올라오는 고민글은 ‘조리원 동기들과의 관계 언제까지 이어지나요?’ ‘어린이집 엄마들과의 대화가 불편해요.’ ‘워킹맘인데 아이 친구 엄마들과 만나야 하나요?’ 등 아이를 기르면서 생겨난 새로운 인연에 대한 것이다. 그러면 아이를 이미 다 키운 ‘선배맘’들이 나타나 ‘그때는 그게 중요한 것 같지만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류의 댓글을 달아주고는 하는데 그런 댓글들을 정독하다가 알게 된 단어가 바로 ‘시절인연’이다. 뉘앙스상 인연에는 다 때가 있으니 떠나는 사람 잡지 말고 오는 사람 막지 말라는 이야기 같았고, 그것은 그동안 내가 살아온 방식과도 일치하는 것이어서 내 마음에 쏙 드는 말이었다. 단, 다시 안 볼 사람이라고 함부로 막 대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다. 인연에는 다 때가 있기에 나중에 다시 어디에서 상대방을 만날지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이 인연이 여기에서 끝일지 나중에 다시 이어질지는 내가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관계에서도 예의를 갖춰야 한다.     


  친구, 연인, 이웃, 직장 동료,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다양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인 사람들.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나와 같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면 그만큼 실망도 크게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은은하고 잔잔하게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고, 또 인연이 다했다 생각하면 서서히 자연스럽게 멀어지더라도 그 관계를 놓아주는 ‘시절인연’의 마음가짐을 무척 좋아하고 그렇게 살아가고자 한다. 예전에 그 자연스러운 속도를 잘 몰라 본의 아니게 마음에 상처를 준 어린 시절의 내 친구들에게 심심한 사과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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