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에세이 과제 - 내가 떠나온 곳
어렵다는 시험을 통과하고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여전히 서울에서의 내 공간은 딱 원룸 하나만큼의 크기였다. 좁지만 꼭 필요한 가전제품들이 풀 옵션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깔끔하고 아늑한 공간에 내 월급의 일부가 매달 꼬박꼬박 들어갔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는 밖에서 돌아다니는 시간이 많았기에 딱히 그 생활이 청승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뜻밖의 ‘현타’는 후배들과 떠난 부산 여행에서 찾아왔다.
서울 경기 출신이어서 아직 부모님 댁에 사는 두 동생들과 나는 여수 2박-전주 2박-부산 1박으로 이어지는 국내 기차여행을 계획했다. 마지막 여행지인 부산에서는 숙소를 잡지 말고 우리 부모님 댁에 신세를 지기로 했는데 마침 우리 부모님께서는 그 때 여행을 가셔서 집이 빈다고 미안해하셨다. 사실 집이 비어서 우리는 더 좋았다. 밤늦게까지 수다를 마음껏 떨어도 되고, 차려주시는 밥을 황송하게 받아먹지 않아도 되고, 편한 옷차림으로 거실을 돌아다닐 수 있기 때문이었다. 부산집에 도착해서 우리는 그동안 모아온 빨래를 싹 돌리고 휴식을 취한 뒤 광안리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스폿으로 향했다. 민락 회센터에서 광어회 한 접시를 떠다가 광안대교 야경이 잘 보이는 수변공원으로 가서 돗자리를 깔았다. 소맥을 말아 한 잔씩 마시며, 여행의 마지막 밤을 화려하게 장식하던 중 후배들이 앞다투어 말했다.
“언니, 여기 너무 좋은데요? 며칠 전에 여수 밤바다에서 왜 좋다고 한 거예요? 이렇게 멋진 데를 알면서?”
“언니, 이렇게 좋은데 살면서 왜 아등바등 서울에 와서 그 작은 방에 월세 내며 사는 거예요, 대체?” “
“그러게~ 나 왜 거기서 바다도 못 보고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살지?”
이것은 - 후배들의 반응이 칭찬인 걸 잘 알지만 - 문득 서울에서 자취하는 나의 처지가 떠오르면서 나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서울이 아니면 다 ‘시골’인 줄 아는 사람들은 명절이 다가오면 나에게 ‘이번에 시골 가냐’고 물어왔다. 구차하게 부산은 시골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좀스럽게 느껴져서 그냥 ‘네’ 하고 말았는데 어느 날은 내가 먼저 ‘저 이번 주말에 시골 가요’라고 말하면 ‘에이 부산이 무슨 시골이야?’라고 반문하는 서울 사람들.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부산이 시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으면 부산에 안 가 본 사람임을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내 고향에서는 ‘서울촌놈’이라고 부른다.
사랑과 이별을 노래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함께 있을 때는 사랑인 줄 몰랐는데 헤어지고 나서야 사랑임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지만 나는 부산에서 살 때도 부산이 좋았고, 떠나온 지 반평생이 지난 지금도 늘 그립다.
봄이면 벚꽃이 일찍부터 흩날리는 내 고향 아파트 단지도 여전히 아름답고, 맛있는 빵가게가 많아져서 ‘빵천동’이라는 별명이 붙은 내 고향 동네 ‘남천동’은 빵순이들의 빵지순례길에 꼭 들러야 하는 부산의 핫플레이스로 소개되곤 한다. 몸은 멀리 떠나와 있지만, 아직 그곳에 남아있는 친구들이 있고 부모님이 계셔서 부산이라는 도시와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끈이 연결되어 있다. 언젠가 내 아이들이 다 자라서 독립하고, 우리 부부도 퇴직해서 특별히 서울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면 어느 도시로 가서 살고 싶은가에 대한 답은 딱 하나, 부산이다. 서울내기인 남편 역시 아주 우연한 사건으로 출생지가 부산인데 – 게다가 내가 태어난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이것은 운명인가 – 회도 좋아하고 소주도 좋아하고, 부산 처가에 가면 언젠가 여기서 살고 싶다고 말하곤 한다. 어쩌면 미래의 손주들에게 우리는 ‘부산 할머니, 부산 할아버지’로 불릴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모님처럼 말이다. 예전처럼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나에게는 고향이 있고, 그 고향이 아름다운 도시 부산이어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