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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발진과 제조물책임

by 기담

‘급발진’ 사고와 제조물책임, 대법원이 밝힌 증명의 문턱
자동차를 둘러싼 급발진 논란은 기술적 실체를 입증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오랫동안 법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특히, 사고의 원인이 차량 자체의 결함인지 운전자의 실수인지 불분명한 경우가 많아 제조업체의 책임을 묻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근 대법원은 제조물책임에 관한 증명책임의 분배와 추정 요건을 엄격히 해석한 판결을 내놓으며 주목을 받고 있다. 대법원 2020다263758 판결은 ‘급발진’ 사고를 주장한 유족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원심의 판단을 뒤집고, 결함 추정의 기준을 명확히 제시했다는 점에서 제조물책임법 실무에 적지 않은 파장을 예고한다.

사망사고로 이어진 이른바 ‘급발진’ 주장
사건은 한 중년 여성이 승용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주행하던 중 갓길 300미터 구간을 10초간 비상등을 켠 채 200km/h가 넘는 속도로 질주하다가, 우측 진출로에서 직진하여 가드레일과 충돌하고 차량이 추락한 뒤 전소되는 참사로부터 시작되었다. 운전자와 동승자는 모두 사망했고, 유족들은 차량에 ‘급발진’ 결함이 있었다며 제조업체를 상대로 제조물책임에 기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유족들은 차량이 정상적으로 운행되던 중 급가속이 발생해 제어불능 상태로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다. 즉, 운전자가 가속페달을 밟지 않았는데 차량이 급가속되었으므로 이는 차량의 결함에서 기인한 사고라는 것이다. 이러한 ‘급발진’ 주장은 차량 결함의 존재와 그로 인한 인과관계를 모두 제조업체의 책임으로 돌리는 주장 구조를 띤다.

원심은 유족의 손을 들어주었다
원심 법원은 제조물 책임법 및 대법원 판례에 따라 사고가 제조업자의 배타적 지배영역에서 발생하였고, 통상적으로는 과실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 사고라는 점을 유족이 입증하였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차량의 결함으로 사고가 발생하였다는 점이 추정되며, 제조업체가 이를 반박하지 못한 이상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특히 원심은 사고 당시 브레이크등이 점등되지 않았다는 사정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근거로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제시하며 유족의 주장에 손을 들어주었다.

대법원, 결함 추정 요건을 엄격히 보아야 한다고 판단
하지만 대법원은 원심 판단을 뒤집고 사건을 다시 심리하도록 했다. 대법원은 제조물책임 소송에서 결함 및 인과관계의 추정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운전자가 정상적으로 차량을 사용하였고, 사고가 제조자의 지배 영역에서 발생하였으며, 제품의 결함 없이는 통상적으로 발생할 수 없는 사고’라는 세 가지 요건을 소비자가 입증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특히 ‘정상적 사용’이라는 요건과 관련하여, 이른바 급발진 사고와 같이 가속 페달 조작이 쟁점인 사안에서는 “운전자가 급가속 당시 가속페달을 밟지 않았다는 점”을 소비자가 입증하여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러한 입증은 직접적인 증거뿐만 아니라, 간접사실에 의한 추론을 통해 가능하다고 하면서도, 간접사실만으로는 페달 오조작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의 입증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기준도 덧붙였다.

대법원은 사고 차량의 제동등이 점등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는 운전자가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다는 정황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차량 급가속의 원인이 운전자 조작의 오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소비자가 결함 추정의 출발점이 되는 ‘정상적 사용’이라는 요건을 입증하지 못한 것이고, 그 결과 결함 및 인과관계 추정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실무에 주는 시사점: ‘입증책임의 경감’은 무조건 면책이 아니다
이 사건은 제조물책임법에서 소비자의 입증책임이 다소 완화된다고 하여 무조건 제조업체의 책임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판결이다. 특히 운전자 조작이 중요한 변수가 되는 자동차 사고에서는, 단순히 사고의 결과만으로 결함을 추정할 수 없으며, 사용자의 조작 여부와 행동 양상이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또한 이번 판결은 2017년 제조물책임법 개정으로 도입된 결함 및 인과관계 추정 규정(제3조의2)의 해석과 적용 범위를 실무에 처음으로 명확하게 제시한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규정은 소비자에게 우호적인 조항이지만, 여전히 입증의 첫 문턱은 소비자가 넘어서야 한다는 점에서, 제조물책임 소송이 결코 쉽게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는 현실을 보여준다.

맺음말
기술이 집약된 현대사회에서 소비자가 제품의 결함을 입증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과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법은 일정한 요건 하에 결함과 인과관계를 추정해주도록 하고 있지만, 그 요건조차 입증하지 못하면 제조업자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 이번 대법원 판결의 핵심이다.

자동차 ‘급발진’과 같은 고장 유형은 원인 규명이 어렵고 논란이 지속되는 분야다. 소비자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은 제조업자의 의무임과 동시에, 법의 역할은 사실에 입각해 책임을 공정하게 나누는 데 있다. 이번 판결은 그 공정성과 책임의 기준을 재확인한 사안으로, 향후 유사 사건의 판단 기준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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