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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주자카드 소송 중 제출은 위법 아냐

by 기담

소송 중 개인정보 제출, 정당한 행위인가?
— 대법원,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 ‘정당행위’로 위법성 조각 가능성 열어

최근 대법원은 아파트 입주민들의 개인정보가 포함된 서류를 법원에 제출한 행위에 대해, 정당한 소송 행위로 평가될 여지가 충분하다며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유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환송하였다(대법원 2024. 6. 13. 선고 2023도3673 판결). 이 사건은 사적 법률분쟁과 공적 개인정보 보호라는 두 가치가 충돌할 때, 어떤 기준으로 위법성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판결이다.

1. 사건의 발단: 입주자카드 584장 제출
이 사건의 피고인은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이자 동대표 회장으로서, 관리소장과 공모하여 관리사무소에 보관 중이던 ‘입주자카드’ 584장을 재판부에 제출하였다. 문제는 이 입주자카드에 세대주 성명, 주소, 가족 관계, 차량번호, 전화번호, 직업, 생년월일 등이 포함된 개인정보가 다량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피고인은 동대표 회장직 및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직의 직무집행정지를 구하는 가처분 사건에서 채무자 지위에 있었고, 이 사건 입주자카드는 자신의 직무의 정당성을 뒷받침할 증거로서 법원에 제출된 것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이를 정보주체의 동의 없이 제3자(법원)에게 개인정보를 제공한 것이자, 업무상 알게 된 개인정보를 누설한 행위로 보고 개인정보보호법 위반 혐의로 피고인을 기소하였다.

2. 원심의 판단: 위법성 조각 사유 부정
원심은 피고인의 행위가 개인정보 보호법 제17조(제3자 제공 제한), 제18조(목적 외 이용·제공 제한), 제59조(업무상 알게 된 개인정보 누설 금지) 위반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아울러 구 개인정보 보호법상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제공 사유(예: 법률에 따른 경우 등)에 해당하지 않으며,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보았다. 즉, 피고인이 석명을 이유로 법원에 제출하였다고 해도, 동의 없는 제3자 제공과 누설에 해당하며 이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이러한 원심 판단은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우선시한 결과이지만, 대법원은 이와 다른 판단 기준을 제시하였다.

3. 대법원의 판단: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으면 위법성 조각 가능"
대법원은 다음과 같은 법리를 설시하였다.
재판과정에서 소송상 필요한 주장의 증명이나 방어권 행사를 위해 개인정보가 포함된 서류나 증거를 법원에 제출하는 경우, 이는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로 평가될 수 있으며, 위법성이 조각될 여지가 있다.

즉, 개인정보를 소송자료로 제출하는 행위가 반드시 처벌 대상은 아니며, 그 제출이 사회상규에 반하지 않는 한 형사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구체적인 판단 기준도 제시하였다. 아래와 같은 요소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행위가 객관적으로 정당하다고 평가될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정보 제출자의 지위와 수집·보유 경위

제출의 목적과 필요성

개인정보의 민감성 및 양

실명 가림, 최소 제출 범위 등 안전조치의 여부

정보주체의 권리 침해 정도

대체 가능한 증거제출 방식 존재 여부 및 불가피성 등

이러한 기준은 단순히 형식적인 법령 위반 여부만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소송과정에서 실질적 권리행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평가함으로써 형법상 위법성 조각 여부를 보다 정교하게 판별하도록 한 것이다.

4. 본건에서 위법성 조각 가능성 충분
대법원은 본 사안에서 피고인의 개인정보 제출행위가 형법 제20조에 따라 위법성이 조각될 여지가 충분하다고 보았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입주자카드는 소송 행위의 일환으로 재판부에 제출되었고, 그 제출 목적이 주장의 증명 및 방어권 행사라는 점에서 공익성이 인정된다.

둘째, 피고인은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삭제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침해 위험성이 큰 정보는 어느 정도 보호하였다.

셋째, 관리소장이 입주자카드를 정당하게 보관 중이었으며, 피고인이 입주자카드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다른 법익을 침해한 정황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 보면, 피고인의 행위는 사회상규에 반한다고 단정하기 어렵고,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이더라도 형법 제20조에 따라 정당행위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5. 판결의 의의와 향후 과제
이 판결은 단순한 ‘개인정보 제공’ 문제가 아니라, 사법절차에서 증거 확보와 방어권 행사가 어떻게 균형 있게 보호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판례다. 정보주체의 프라이버시 보호는 중요한 가치이지만, 그것이 절대적 기준이 되어 소송상 권리 행사를 위축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동시에, 소송 당사자나 법률대리인에게도 책임 있는 정보 활용이 요구된다. 개인정보의 제출이 불가피하더라도, 비실명화, 부분 제출, 사전 설명 등의 보호조치를 병행해야 하고, 가능한 경우 정보주체의 동의를 구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법원 역시 개인정보가 포함된 자료를 제출받을 때, 그 필요성과 보호수단을 적절히 관리·통제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개인정보가 포함된 증거는 별도 봉인 제출 후 열람 제한 등을 걸 수 있고, 재판기록 관리에 있어 사후 파기 또는 열람 범위 제한 등의 기준을 제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6. 결론
이번 대법원 판결은 소송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 있는 개인정보 처리 문제에 대해 보다 유연하고 실질적인 기준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단순히 피고인의 무죄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 발견과 기본권 보호라는 양대 가치가 충돌할 때 법원이 어떤 시각으로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라 할 수 있다.

앞으로 법조인과 행정실무자, 그리고 정보처리자인 단체·관리인들은 이 판례가 제시한 원칙을 적극적으로 참조하여, 합법적이고 신중한 개인정보 활용과 제출에 나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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