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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인 Jan 21. 2022

[일상고찰] 먼지에 대한 오만과 편견

집먼지에 대한 고찰

폴 고갱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1897년, 캔버스에 유채, 139×374cm, 보스턴 미술관)


신혼 한 달 차. 잘 마른 수건들을 욕실장에 넣고 콧노래를 부르며 거실로 나온 순간, 나는 놀라서 우뚝 멈춰 섰다. 내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 빅뱅이라도 일어난 건가. 우리 집 거실에 은하계가 펼쳐져 있었다. 먼지였다.

스노볼 안에 있는 피규어들이 이런 기분일까? 햇살을 받은 먼지는 반짝반짝 흰 눈처럼 빛난다. 수천 수백만의 눈부신 먼지들이 내 주변을 우아하게 부유하고 있었다. 문자 그대로 더럽게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태어나서 먼지의 존재를 그렇게 확실하게 인식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먼지에 대해서 자각한 이후엔 먼지만 보이기 시작하는 저주받은 생활이 시작됐다. 모르고 지낼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알고 나니 참을 수가 없었다. 하루 종일 식탁, 화장대, 티비장 위에 볼을 착 붙이고 먼지가 있나 없나 눈을 희번덕거리며 걸레질을 해댔다. 망령이 따로 없었다. 먼지에 대한 충격이 큰 것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회사를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되면서 '이제는 집안일이 나의 업인데! 청소도 잘해야지!' 하는 (혼자만의) 신입 주부 똥군기도 한 몫했다.


그러나 의욕과는 반대로 당시의 나는 먼지에 대한 이해도가 제로였다. 당연한 것 아닌가? 살면서 먼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심지어 나는 결혼 전에 자취 생활을 꽤 길게 했는데, 그때는 이렇게 먼지가 잘 보이지도, 많지도 않았다(고 착각하며 살았다)

6년 간 콧구멍 따갑게 먼지와 동고동락하면서 깨달은, 먼지에 대한 나의 오만과 편견을 나열해본다.




안 보이면 없다고 믿은 것


먼지는 햇살 속에서 가장 잘 보인다. 일하며 자취할 때는 그 사실을 몰랐다. 아니 알 기회가 없었다. 햇살이 환한 시간에 집에 있을 때가 거의 없었으니까. 게다가 여자 혼자 사는 집인 걸 티 내고 싶지 않아 밤이건 낮이건 커튼을 치고 지냈다. 신기하게도 먼지는 형광등 불빛 아래선 잘 안 보인다. 형광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구석진 곳은 말해 무엇하리. 퇴근을 하고 집에 불을 켜면, 옷가지와 화장품들만 대충 잘 정리되어 있어도 내 작은 원룸은 그런대로 깨끗해 보였다. 더러운 게 없는데 청소할 이유가 있나? 그 시절 나의 청소 패턴은 평일엔 떨어진 머리카락들만 대충대충 훑어 버리고, 주말이 되어서야 청소기를 한 번 돌리고 화장대를 닦는 정도. TV 위나 서랍장은, 어쩌다 손이 스쳤는데 먼지가 때처럼 밀리는 걸 보고서야 뜨악하며 걸레질을 하는 정도였다.


가끔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공기가 좀 탁한 것 같다거나 갑갑하다고 느껴질 때는, 그게 쌓인 먼지 때문이라곤 생각 못하고 '아 역시 도로가의 집은 매연이 심하다니까' 혹은 '아 나 오늘 너무 일하면서 너무 스트레스받았나 봐' 하고 가여운 나를 위로하며 창문을 더 꼭꼭 닫고 치킨을 시켜먹었다... 참 생각할수록 이런 한숨 나오는 위생관념의 먼지 무지렁이가 용케 크게 아프지도 않고 잘 살았다.




먼지는 무조건 들어오는 것?


결혼을 한 뒤 밝은 집 안을 면면이 들여다보면서 살림을 하니, 드디어 먼지들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나는 충격에 빠졌다. 도대체 이 많은 먼지들이 어디서 생긴 걸까? 어리석은 나는 범인을 속단했다.

'현관문은 하루에 몇 번 안 여니까 먼지가 들어올 곳은 창문뿐이지!'

나는 먼지라고 우리 집에 쌓이는 이 존재들이 당연히 '밖에서 우리 집에 침입한' 불순물들로만 이뤄져 있다고 생각했다. 미세먼지나, 꽃가루나, 황사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 중의 착각이었다.


먼지의 가장 큰 발원지는 바로 집 안에 있었다. 정확히는 집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들! 고양이 두 마리가 뿜어내는 털, 그 녀석들이 화장실에서 일으키는 모래먼지. 남편과 나의 몸에서 매일 떨어져 나가는 머리카락과 각종 각질들, 매일 쓰는 수건과 잘 때마다 덮는 이불의 먼지. 어디 그뿐인가? 널 때도 팡팡 털고 다 마르고 난 뒤에도 팡팡 털어 개던 빨래들은 내 속만 시원했지 우리 집을 가장 숨 막히게 하는 먼지의 온상이었다. 진짜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고 움직이는 먼지 공장인 내가 애꿎은 창문만 탓했으니,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청소법도 틀려먹었다


먼지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내가 제일 먼저 준비한 것은 물티슈였다. 그때는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빨래도, 설거지도, 욕실 청소도, 하물며 목욕도 전부 물로 하니까. 뭔가 더러운 걸 씻고 닦아낼 때는 마땅히 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맞는 것 같았다. 적어도 반나절은.


티비장이며 식탁이며 화장대까지 열심히 닦고 또 닦아도 하룻밤만 자고 일어나면 거기 또 먼지가 있었다. 먼지는 마치 남편의 수염 같았다. 아침마다 공을 들여 면도를 해도 오후만 되면 오늘 면도 깜빡했냐는 소리를 듣는 아랍계 하관을 가진 우리 남편. 믿음과 정성을 배신당한 인간들은 비탄에 빠진다. 심지어 먼지는 수염처럼 벽을 뚫고 자라나는 것도 아닐 텐데, 나는 당최 이 미스터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그날. 마트에 갔는데 물티슈 옆에 낯선 이름이 보였다. 정전기 청소포.

'이게 뭐지?'

별생각 없이 호기심에 상품 설명을 읽던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정전기로 먼지를 흡착하는, 일종의 마른걸레였다! 세상에, 마른걸레로 먼지를 청소한다고? 나는 팥으로 메주를 쑨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벙쪘다. 청소하는데 물이, 물이 필요가 없다고...? 이미 세상은 1차원적인 사고를 가진 나를 버린 채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

'어머, 이건 사야 해!' 이런 수준이 아니라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싶은 기분 아는가? 나는 당장에 집으로 달려가 청소포를 비벼 티비장 위를 닦아보곤 작은 비명까지 질렀다. 지금까지 나는 무얼 했던 걸까. 정전기 청소포의 발견은, 먼지 청소에 대한 나의 인식을 송두리째 깨부수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나는 이것을 '제1차 먼지 혁명'이라 부른다.


제대로 된 먼지 청소란 먼지를 '떼어내는' 것이었다. 물론 두껍게 굳은 오래 묵은 먼지는 먼저 시원하게 물걸레로 제거하는 것이 맞겠으나,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매일매일 집 안에 얇게 내려앉는 일상 먼지다. 이런 먼지들은 물에 젖으면 투명해지면서 최첨단 스텔스 기능을 갖춘다. 그리고 더욱 물체에 찰싹 달라붙는다. 그래서 그 순간엔 닦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걸레질에 따라 이리저리 밀리기만 하다가 물기가 마르면 밀려난 그 자리에 다시 하얗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니 끝이 없을 수밖에. 서른 살이 넘어서야 이걸 알다니. 솔직히 이렇게 살아가는데 중요한 내용은 학교 정규과정에서 가르쳐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먼지가 뭔지


그래서 먼지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게 된 내가 먼지 청소의 달인이 됐냐면, 그건 또 아니다. 내가 프로의 경지에 다다르기 전에 우리는 공기청정기와 건조기를 샀다. 이 멋진 기계들은 집안의 먼지들을 아주 효과적으로 제거했고 통장의 잔고도 아주 깨끗하게 만들어주었다. (너무 미미해서 먼진 줄 알았을까...?) 나는 이것을 '제2차 먼지 혁명'으로 부른다. 결혼 6년 차, 바야흐로 우리 집은 대평화 시대를 맞았다.


물론 이 평화의 일등공신은 기계들이지만, 먼지에 대한 내 마음의 변화도 꽤 큰 지분을 차지했다고 밝히고 싶다.

내가 오랜 기간 먼지를 제거하면서 깨달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먼지를 완벽하게 제거하는 방법 같은 건 없다는 것이다.


내 몸의 세포에게 각질을 만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세상에게 바람을 일으키지 말고, 꽃에게 가루를 털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을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여러 방법을 동원해 생활에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먼지를 누그러뜨리는 것뿐. 애초에 먼지는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 최선을 받아들이고 나니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요즘의 나는 집에 먼지가 좀 앉아 있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저는 저대로 매일 쌓이고 나는 나대로 매일 할 만큼만 치운다. 어찌 됐던 서로 할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니 이상한 동지애(?)도 생겼다. 결국 먼지보다 우리가 먼저 사라질, 아니 결국 우리도 세상의 먼지가 될 거 아닌가. 그러니 선을 넘지 않는 선에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주기로 했다.


예전엔 조금의 먼지라도 눈에 보이면 그게 게으른 주부의 상징 같고 우리 집의 치부 같아서 한시도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지만, 먼지는 정복의 대상이 아니다. 정복할 수도 없고. 어리석은 고집에 시간을 낭비하느니 나는 좀 더 게으르고 여유롭게 살기로 했다. 사실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 그렇지 않나? 나 같은 오만한 인간들만 이 사실을 이렇게 자주 잊고 산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이 광활한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니, 열심히 살아도 의미 없다는 말을 하는데. 난 전자는 동의할 수 있으나 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먼지는 결코 하찮게 볼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우주의 먼지가 맞지만, 만약 이 우주를 관리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에게 우리는 제일 혀를 내두를 존재일 것이다. 먼지만큼 성가신 게 없거든.


우주의 한자를 보자. 집 우(宇), 집 주(宙)다. 이미 우리는 이 광활한 집의 집먼지다. 끊임없이 나타나고 사라질 위대한 우주의 먼지로서, 조금 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도 괜찮겠다.

먼지를 생각하다가 우주 삼라만상까지 생각하다니, 역시 엔프피로 사는  피곤하고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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