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여름이 타다 남은 재”라던 어느 시인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뜨거웠던 올해 여름, 우리는 어떤 재로 남은 가을을 만나게 될까.
집 앞 창문으로 보이는 나무에 초록초록한 잎 사이로 한 귀퉁이가 붉게 물들었다. 문을 열고 빼꼼 얼굴을 내미는 수줍은 아이처럼, 가을이 살짝 얼굴을 내밀었다. 빼꼼 얼굴을 내민 가을이 반가워 미소 지었다.
8. 23일처서가 지났다. 처서는 24 절기 중 열네 번째에 해당하는 절기로, 입추와 백로 사이에 있는 절기이다. 처서는 한자로 멈출 처(處),더위 서(署)로, 더위가 그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처서가 지나면 아침, 저녁으로 공기가 달라져 일교차가 커지는 시기이기도 하니, 오죽하면 모기도 처서가 지나면 입이 삐뚤어진다고 했던 걸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 정취를 좋아한다. 여름도 가을도 아닌, 여름에서 가을로 건너가는 시기. 나는 이 시기에 가을을 마중 나가듯이 어디쯤 가을이 오고 있나 찾는다. 가슴에 돌덩이를 얹은 듯, 숨이 턱 막힐듯한 더위를 마주하다, 처서가 지난 아침에 느껴진 공기는 여름의 공기와는 사뭇 다름을 감각한다. 상쾌한 공기가 코를 타고, 온몸으로 스며들 때, 내 몸 안의 산소는 불순물을 걸러낸 정수된 물처럼, 새것으로 걸러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 기분을 예민하게 감각하는 것일까. 더웠던 여름의 햇살이 한껏 누그러져 아침의 공기는 이슬을 머금은 듯 상쾌하고, 풀냄새는 더 진하고, 더 “숲”스럽다.(숲스럽다? 숲 속의 냄새 같달까?)
타는 듯한 폭염이 지속되는 때에는 여름이 끝나기는 할까 싶었는데 처서가 지나서 비가 내리더니 그 후로는 더위가 한풀 꺾이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처서가 지난 후 어느 저녁에는 바람이 시원해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남편에게 말했다.
"절기는 정말 놀랍지 않아? 계속 폭염문자가 오고, 이 폭염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싶더니 처서가 지나니 마치 마술처럼 저녁공기가 이렇게 달라질 일이야?" 그랬더니 남편이 나보고 절기를 따지면서 말하는 걸 보니 옛날 사람이라고 한다. 옛날사람의 기준이 언제부터 절기를 따지는 것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농사가 생계수단으로 절실했던 시절에, 언제 씨를 뿌릴지, 언제 열매가 익는지, 농작물을 수확하기 위해 적당한 시기를 정하려고 얼마나 많이 태양의 움직임을 세심히 관찰하고 기록해서 24 절기를 정한 걸까 헤아리면 절기는 염원이 담긴 간절한 마음이 아닐까. 그러니 이렇게 틀림이 없다고. 절기에 담긴 지혜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이 옛날사람인거라면, 옛날 사람 하지 뭐. 흥!!
달력을 보면 언제부터인가 절기를 본다. 8월에는 한여름의 절정을 이루는 무더위가 있지만 입추와, 처서도 한 달력에 있지 않은가. 무더위의 절정과 누그러짐을 달력으로 확인하고 온몸으로 감각하면서 오묘한 세상의 이치를 느낀다.
불행과 행복이, 절망과 희망이, 슬픔과 기쁨이 선으로 선명하게 그어 경계 짓 듯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 안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시소처럼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는 삶의 원리를 깨우쳐 주기라도 하는듯이.
절기 속엔 자연의 질서를 거스리는 것 없는 순조로운 이치가 있었다. 순리는 그런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오리니 여름에는 땀을 흘리라고. 흘린 땀은 식게 마련일 테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 순리에 기댄 믿음.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의 슬픔도 지나가고, 오늘의아픔도 끝이있음을 믿고 다시 희망을 꿈꾸게 된다.
우리의 불행과 행복도 자연의 이치대로 순환한다고 믿게된다. 빼꼼 내민 가을을 마중하며, 혼자 생각에 빠지다가, 어느 여름보다 뜨거웠던 올해 여름이 남긴 재는 어떤 모습일까. 가을을 그려본다.
이 그림책을 처음 봤을 때,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이 시기의 정취를 이렇게 절묘하게 그림으로 표현한 것에 감탄을 했는데요. 그림책 겉표지에 정말 잘 표현하고 있어서, 겉표지 그림을 가장 좋아하는 그림책입니다. 그래서인지 처서가 지난 이 시기에 매번 이 그림책을 펼쳐 봅니다. 겉표지 그림 당겨볼까요?
여름에서 가을로 서서히 들어가듯...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 자연의 질서의 순조로운 이치가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