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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지령 Nov 18. 2023

언제든 사과할 수 있는 마음

싸우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삶의 일부

보름아. 너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 밖에는 올해 첫눈이 오고 있어. 엄마는 당장이라도 너에게 달려가 “보름아! 눈이 와!~~ 눈이 온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엊그저껜가 너는 지루하고 심심하다는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며 “엄마, 빨리 눈이 왔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지. 네가 눈을 기다리는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엄마는 너에게 달려가고 싶었던 거야. 지금 학교에 있는 너는 갑자기 찾아온 저 반가운 손님을 보면서 당장이라도 뛰어나가 놀고 싶다고 생각하겠지? 모든 좋은 것을 볼 때 엄마는 항상 네가 먼저 떠올라. 센서가 사람을 인식하면 문이 저절로 열리는 자동문처럼.

엄마는 커피를 내렸고, 글 쓸 때 집중이 잘 되는 음악으로 재즈를 틀었어. 재즈는 엄마가 잘 모르는데, 이런 생각이 들더라. 음악은 결국 분위기잖아? 모르면 어때? 그 음악을 즐기면 되는 거지. 재즈를 들으면서 엄마가 느끼는 것은 겨울과 커피와 제법 잘 어울리는 음악이라는 것. 어쩐지 올해 겨울엔 재즈를 들으며, 커피를 내리고, 자주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겨울만 되면 움츠러드는 엄마였는데 올해는 겨울이 좋아질 것만 같아.

 

오늘은 엄마가 어제 우리가 한 대화를  편지로도 전하고 싶어서 노트북을 열었어.

어제 자기 전에 엄마가 너에게 물었지.

“보름아, 엄마는 네가 남자고, 엄마가 여자라서 어쩔 수 없는 생각의 차이가 있다는 걸, 네가 크면서 점점 인식하곤 해. 엄마는 게임을 안 하지만 너는 게임을 하잖아. 그런 문제로 엄마가 잔소리를 하고, 너는 잔소리하는 엄마가 밉고. 서로를 이해 못 하는 부분이 생기고, 그런 것들이 늘어나서 서로에게 화가 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실은 전날 네가 학교에 가방을 두고 왔던 걸로 엄마가 너에게 불같이 화를 냈잖아. 너는 가방을 두고 온 줄도 몰랐고. 너는 저녁이 되어 학교 숙제를 하려고 할 때 학교가방이 사라진 걸 알았지. 엄마는 어떻게 가방을 학교에 두고 올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됐던 거야. “정신 좀 차리고 다녀라~ 어디다 정신을 빼놓고 다니냐~” 엄마가 너에게 화를 내는 동안 너는 아무 대꾸도 없이, 그저 말없이 듣고만 있었지.

시간이 지나고, 엄마의 마음이 누그러지고 나서야 하교하고 집에 들어온 네 모습이 슬금슬금 떠올랐어. 두 손을 모아 '마리모'가 들어있는 작은 어항을 소중하게 들고 온 너의 모습이 말이야. 너는 들어오자마자 "엄마, 엄마! 이것 봐~ 얘가 '마리모'라는 건데, 살아있는 생명이야. 기분이 좋으면 물 위에 둥둥 뜬대~ " 너는 한껏 들떠 있었고,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신이 나 있었어. 엄마도 생전 처음 보는 생명체라, 내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눈이 커져서 말했어. "얘가 살아있다고?" 엄마도 신기했어. 초록색이라고 “녹차”라고 이름을 붙여준 네가 사랑스러워, 너에게 커피 한 모금을 머금은 것 같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지. '마리모'를 보면서 너와 내가 신기해하던 모습들이 겹치면서 기억이 떠올랐어. 네가 오면 항상 현관에서 너를 반기며 네 가방을 받아주는데… 맙소사!! 엄마도 '마리모'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네가 가방을 안 메고 왔다는 사실을 캣치하지 못했던 거야.


그제야 엄마는 너의 마음이 보였던 것 같아. 빨리 집에 가서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너의 마음이. ''마리모'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리고 가야겠다’며 어항에 두 손을 모은 너의 모습이. 너의 머릿속에는 온통 '마리모'로 꽉 차 있었던 거야.

"여자들은 전화를 하면서도 요리도 하는 멀티 플레이가 는데 남자는 멀티 플레이가 안된다"는 떠도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나서 “푸핫”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어. 너의 마음을 느끼고 나서야 아이니까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어. 엄마도 언젠가 버스에 보조가방을 두고 내린 적이 있었어. 엄마는 가방을 잃어버리고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이 없지만, 너는 아이라는 이유로 혼냈다고 생각하니 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 누구든 물건을  잃어버릴 수 고, 찾으면 되는 건데 말이야. 엄마가 잃어버린 경험으로는 그건 물건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서도 아니거든. 엄마에게 혼나 거실에서 시무룩하게 있는 네 모습이 꼭 비를 흠뻑 맞은 강아지처럼 보였지. 비에 축 처진 강아지 털처럼 슬픔으로 축 처진 너의 표정. 그런 너를 와락 안고 나직이 말했어.

“보름아.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 같이 찾아보면 되고 방법을 생각해 보면 될 것을. 엄마가 화를 내버렸어.” 했더니 너는 반가워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금세 표정이 밝아져서는 “괜찮아” 하고 엄마를 안아주었지. 늘 엄마보다 마음이 넓어.

 

아! 엄마 질문 기억하지? 그날 밤, 엄마의 물음에 너는 푸른 호수의 물빛처럼 말갛게 웃으며 말했지. “에이~엄마는 뭘 그런 걸 걱정해?~~ 가족이니까, 서로에게 화가 날 일도 있겠지~ 엄마는 그런 걸로 우리가 계속 서로를 미워할 것 같아?”

엄마는 너의 물음에 화답하듯 대답했어. “아니~~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잖아. 서로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 같은 존재들. 그러니까, 우리 잘못했다고 생각될 때는 빨리 사과하고 화해하자. 사랑하는 사이에는 자존심이 필요 없어. 우리는 결국, 계속 **“사랑하고야 마는” 사이니까.”

“ 응 엄마 걱정 마. 그리고 나는 착한 사춘기 보낼 거니까.”

너의 말에 너의 사춘기와 나의 갱년기 시기가 겹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 생각에 엄마는 웃음이 빵 터져 대답했지. “엄마도 착한 갱년기 보낼게” 우리는 새끼손가락이라도 걸어야 할 것처럼 약속하듯 말했어. 참 웃긴 약속이었지.


그날, 우리는 그렇게 화내고, 그렇게 화해하고, 그렇게 대화하며 “잘 자” 인사하고 잠이 들었어. 보름아.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니까 언제든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는 사이가 되자. 엄마가 진짜 미안했어. 근데 말이야. 착한 갱년기를 보내겠다고 말했지만 너도 나도 그건 호르몬 문제라 스스로를 제어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 안 했어.. 그렇더라도 엄마는 다짐했어. 내가 잘못한 것에는 바로 진심을 담아 사과하겠다고. 그렇다면 고약한 사춘기가 온대도, 사나운 갱년기가 온대도 결국에는 웃으며 서로를 와락 껴안을 수 있지 않을까?

싸우는 일도, 화내는 일도 삶의 일부니까 화해하고 결국에는 다시 사랑하는 쪽으로 우리 삶의 모양을 다듬어가자.


이제 조금 있으면 네가 하교할 시간이야. 이따 봐. 보름아. 오늘은 너의 가방을 꼭 받아줄게. ^^


                                              2023.11. 17.

         첫눈 오는 날. 너를 생각하며. 엄마가.


** 고수리 작가님 책 제목을 인용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수오서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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