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개를 무서워한다. 길을 가다가 개를 마주치면 멀찍이 피해서 간다. 행여 나를 보고 짖기라도 하면 깜짝 놀라 비명이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가까이 다가오기만 해도 공포에 질려 얼음이 된다. 애완견을 키우는 집에 가면 내가 어딘가에 안착할 때까지 개를 잡고 있어 달라고 부탁한다. 혹시라도 애완견이 내 발을 물까 봐 두려워 의자에 발을 올리고 앉는다.
개를 무서워하는 것은 어렸을 때 집에서 키우던 개한테 물린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몇 살 때인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아마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듯하다. 단지 마당에서 키우는 개가 있었다는 사실과 어느 저녁 무렵, 개가 나를 물었다는 사실, 그 두 가지만 기억에 남아있다. 그 사건으로 개는 나에게 무서운 존재로 각인되었다. 개에서 비롯되었지만, 고양이도 동류로 여겨져 무섭고 피해야 하는 대상이다.
몇 달 전,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했던 기억의 액자 하나가 산산조각 났다. 엄마와 옛 추억을 더듬다가 내가 어릴 적 개에게 물린 일을 기억하냐고 물었다. “너는 개에게 물린 적이 없어. 개에게 물린 거 네가 아니라 엄마였지.” 종아리를 덥석 물리는 바람에 아직도 흉터가 희미하게 남아있다며 내 말을 바로잡았다.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니냐고 거듭 물었지만, 엄마의 기억은 단호했다. 지금껏 내가 믿어온 기억은 무엇이었던가.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내것화’한 공포였던가. 긴긴 시간 동안 개에게 물린 건 나라고 굳건히 믿어왔던 진실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올리버 색스가 쓴 책 <의식의 강>에 오류를 범하기 쉬운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유년에 겪었던 두 번의 폭격 사고 중 하나가 자신의 명백한 기억 오류라는 사실을 저자는 5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 그가 ‘진실임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던 기억’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큰형이 편지에 적어 보낸 내용을 읽고 스스로 쌓아올린 이미지였다. 내 경우는 그의 기억만큼 생생하고 구체적이지는 않았지만, 엄마의 경험이 내 경험으로 주체가 바뀌었다는 사실은 같았다. 저자의 표현처럼 타인의 경험을 차용하여 나 자신의 기억으로 여겼던 것이다.
경험의 차용이 나에게만 일어난 일은 아니라는 사실에 놀랐고 안도했다. 동시에 기억이 이리도 불완전하다고? 경험을 이전하기도 하고, 누구에게 들은 건지 어디에서 읽은 건지 꿈꾼 건지 실제 있었던 건지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게 기억의 본모습이라고? 의문이 찾아들었지만, 학술 사례를 짚어가며 조곤조곤 이르는 저자의 말에 의심의 불은 가뭇없이 사위었다. 출처 혼동이 있을지언정, 인간의 기억이 유연하고 창의적이라는 사실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빌린 기억이 개에게 물린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기억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메커니즘이 뇌에는 없는 것 같다고 하니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진정한 독창성은 ‘기억과 차용’에서 ‘동화와 통합’의 수준으로 도약하는 잠복기를 통해 탄생한다는 저자의 말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기억과 차용이 독창성의 출발인 셈이다. 글을 쓰는 일은 무의식적으로 스며든 타인의 언어와 경험을 내 것과 잘 버무려 새롭게 표현하는 여정이라고 생각한다. 그 길 어딘가에서 나만의 문체와 색이 다보록이 영글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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