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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으로 Apr 21. 2022

4월 21일의 꽃, 수양버들

'내 가슴의 슬픔'이라는 꽃말

 어릴 적 유원지에 가면 항상 수양버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호숫가에 흐드러진 수양버들은 마치 원래 그 장면에, 그 자리에 있어야만 알맞은 풍경의 한 조각처럼 느껴집니다. 어릴 적을 생각하면 아득하고 애틋한 감정이 들지요? 저만 그런가요? 뿌연 햇살과 점점이 박힌 아날로그 필름의 무드가 완연히 어우러지는 화상의 색채가 그려집니다. 왠지 서글퍼요.

 수양버들의 영어 이름은 'weeping willow'입니다. '흐느끼는 버드나무'라는 뜻이라네요. 아마도 흐르는 바람에 몸을 떨며 하늘거리는 모양새가 서양에서도 우리와 같은 정서로 슬퍼 보였나 봅니다.

 어제는 인간이, 혹은 반려동물이, 무엇으로부터든 '온화한 애정'을 느끼는 경우들을 이야기해보았는데, 오늘은 역설적으로 그 반대를 이야기하려 해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참으로 복잡 미묘하지요. 혼자 일 수 없으나 반드시 혼자만 남겨집니다. 감정의 소용돌이 혹은 침잠 속에 나 말고 타인이 그 슬픔을 대신해줄 수 없지요. 너무 외롭습니다. 악몽을 꿀 때, 아무리 힘껏 달려도 앞으로 나가지 않고 제자리인 것처럼 개인의 슬픔과 고독 또한 타인과 나누고 나눠도 결국에는 혼자만이 견뎌내야 하는 영역이 남고 맙니다. 마음이 건강할 땐 끄떡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약해지면 그 나눌 수 없는 슬픔과 홀로 견뎌내야 하는 외로움에 어쩔 줄을 모르게 되지요. 아무리 많은 인간관계 속에 있어도 동시에 적막하기 그지없는 인간 본연의 슬픔은 그저 모든 사람이 인생을 얻고 살아간다면 반드시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인 것 같습니다. 마음의 여유에 따라 그 십자가가 거뜬하기도 하고 무거워 당장이라도 쓰러져버릴 것 같기도 합니다.

 '내 가슴속의 슬픔'은 제 아무리 깊어도 타인과는 얕게 공유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얕게나마 그것이 도움이 됨은 맞습니다. 다만, 오늘 마주한 가슴속 슬픔에 오롯이 홀로 맞서야 한다는 사실이 공허하네요. 누구나 그런 것이겠지요. 헛헛한 마음은 잠으로 회피해봅니다. 지리하게 그러다 보면 또 어느샌가 마음이 단단해지는 계절이 오겠지요.


< 수양대군의 이름을 따 수양버들이라 지었다고 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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