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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ace near Water May 02. 2024

코펜하겐 봄, 감기, 망상

코펜하겐에 봄이 왔다.  


정말 이곳에도 이제 봄이 왔구나 느껴진 첫 주말.  

한국 갔다 와서 코펜하겐에서 맞이하는 첫 주말.  

시차 적응이 되어 기운이 날 즈음의 첫 주말.  


설렘도 잠시, 토요일 아침 남편이 감기가 걸렸다.  


코펜하겐에서 맞이하는 첫 주말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던 것만큼 주말이 남편의 감기에 의해 희생되는 것에 은근 화가 났다.  그래도 어쩌겠나.  짜증스러운 마음을 바로잡았다.  이기심을 내려놓고 사랑하는 불쌍한 남편, 정성스레 보살피자고 다짐했다.  슈퍼에 가서 남편이 아플 때 찾는 치킨수프 재료도 사고, 과일도 사고, 생강차를 끓여주기 위해 생강도 잔뜩 샀다.  


남편은 자연 힐링주의인 내 영향을 받아, 감기가 걸리면 이제 더 이상 병원을 가거나 약 먹을 생각을 안 하고 내가 해주는 집치료 (homeopathy) 요법에 의지한다.  좋은 (?) 현상이지만 챙겨주느라 내가 죽어난다.  

결혼 전부터 남편을 이렇게 길들인 내 탓이다.   


일요일 저녁부터 낌새가 이상했다.  자꾸 재채기와 콧물이 나왔다.  그리고 영낙없이 그다음 날 바이러스는 나한테로 이사를 왔다.  남편은 출근을 해도 될 정도로 괜찮아진 것을 보고 알았다.  바이러스는 남편과 동일한 패턴으로 나를 공격해 왔다.  첫날은 목이 찢어져라 아프고, 그다음 날은 목은 좀 가라앉지만 코에서 나야가라 폭포가 쏟아지듯이 콧물이 쏟아졌다.  보통 15시간짜리인 나의 신체 배터리는 2시간을 채 못 넘기고 수면을 필요로했다.  


이번 바이러스의 또 다른 특징은 신체뿐만 아니라 정신도 지배한다는 것이다.  작은 일에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진정한 몸과 마음의 수련이었다.  나와의 싸움이었다.  바이러스를 나에게 옮긴 남편을 탓하며 그에게 온갖 짜증을 내며 요란하게 감기를 치렀다.  내가 생각해도 비이성적이었다.  그런데 내가 막 짜증을 내면 남편은 그 나쁜 에너지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고 나쁜 기운 다 방출해서 내보내라고 하며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내보낼 것을 장려했다.  나와 나의 짜증을 동일시하지 않고 분리해서 보는 남편.  이번 감기 지독하다며 욕이 절로 나올 때 남편은 바이러스에게 욕을 하지 말고 와줘서 고맙다고 하고 이제 그만하면 됐다고 하며 다독여 보내라고 했다.  


이런 것을 공부한 적도 없고, 관심도 없는 남편은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에너지인 것을.  같은 바이러스를 맞이했지만 요란을 떨며 감기를 치룬 나와 대조적으로 조용하게 점잖게 우아하게 감기를 치른 남편을 보고 다시 한번 감탄했다.  남편은 진정 리틀붓다인가.  나같은 불완전한 인간을 선택한 남편은 어느 별에서 온 천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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