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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Jul 17. 2023

오은영이 부모와 아이들을 망치고 있는 것일까?

부모에게 애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르든 혼내지 말고 잘 타이르기만 할 것을 요구하는 오은영식 교육법이 버릇없고 영악한 요즘 애들을 만드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는 통설이 최근 힘을 얻고 있는데, 일단 요즘 애들이 부탄, 본드 불고 오락실에서 지보다 어린 애들 삥뜯고 오토바이 훔쳐서 폭주뛰던 옛날 애들보다 진짜 버릇없고 사악한지는 둘째치고, 애초에 오은영은 그런 식으로 애들을 훈육하라고 가르친 적이 없다. 과거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에 출연했을 적이나 <금쪽이 상담소>에 출연하는 지금이나 오은영의 육아론은 아이가 잘한 일, 못한 일에 대해서 일관된 상벌의 원칙을 정해놓고 부모가 그에 알맞은 피드백을 가하라는 것이지, 일체의 훈육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체벌이라는 과격한 형태를 취하지 않을 뿐, 오은영도 엄연히 훈육이라는 걸 한다. 아이가 원하는대로 부모가 다 들어주고 좋게 타이르기만 하는 건 오히려 오은영의 지론을 반대로 이해한 것이다. 오은영은 매 방영분에서 아이가 잘못된 요구를 하거나 과도하게 를 쓰면, 부모가 적절히 제지하면서 부모가 아이에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 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성장기 어린이에게 부모는 단순히 아이를 등따시고 배부르게 길러주는 양육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아이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규정하고 강권하면서 일련의 사회 규범 자체를 체현하는 존재인데, 이때 아이는 부모로부터 미리 적절한 좌절의 경험을 습득함으로써 사회에 나가 범해서는 안될 죄과, 일련의 행동 규범을 체화하게 되는 것이다. 오은영이 모든 물리적인 훈육 방식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필요하면 어른의 완력을 사용해서 (마치, 주짓수의 '가드'를 연상케하는) 인신을 구속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그리고 그게 아무런 실효가 없는 이상론에만 머무르지 않고 실제 방영 뒤 후일담을 보면 뚜렷한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은영이 체벌을 부정하는 건 굳이 체벌을 하지 않더라도 아이의 품행을 교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체벌은 어디까지나 당장 맞는 게 두려운 아이를 위축 시킬뿐, 진정으로 마음깊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개심과 반성을 이뤄내는 수단이 되기는 어렵다. 아이도 엄연히 사람인데,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합리적인 원칙을 주지받지 못한채로 맞기만 하면, 그걸 납득할 리가 없다. (비단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더욱 극적으로 힘의 불균형이 드러나는 국가(사회)와 개인 간의 관계에서도 사람들은 물리적인 강압에 그리 호락호락하게 순응하지 않는다.) 더욱이, 폭력이라는 것은 그 특성상 행위자의 감정이 실리기 십상인 것이라, 명확한 상벌의 원칙에 의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부모의 기분따라 '패는 것'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결국 체벌을 통해서는 아이가 당장의 폭력이 두려워서 순응하는 것처럼 보여도, 속으로는 부모에 대한 반발심을 키워갈 가능성이 높다. 물론 많은 이들이 각자의 성장 배경에 비추어 증언하고 있듯이, 맞아서 고쳐지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때리지 않고 고치는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런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차선을 택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또, 부모가 아이를 때려서 고쳐진다는 보장은 없는 반면, 맞아서 비뚤어진 사례는 무수히 많다. 대표적으로 유영철, 정남규 같은 중범죄자들을 프로파일링해보면, 어린 시절 부모의 학대에 시달리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은영식 교육의 귀결이라 욕먹는 최근의 진상 부모들도, 따지고 보면 학생 인권 조례 제정 전 체벌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학교를 다닌 세대이다. 체벌 예찬론자들 말대로, 체벌이 그토록 고효율의 인간 개조 수단이라면, 자기 애 하나 무지성으로 감싸면서 교사들을 닥달하고 괴롭히는 데에 여념이 없는 수준 미달 부모들의 출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들도 학교에서, 가정에서 부모나 교사에게 맞으면서 성장기를 보낸 사람들인데 말이다.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보면, 과거 체벌이 당연시 되었던 학교에서 교육 받았던 윗 세대들은 과연 체벌 덕분에, 맞고 자랐던 덕분에 모두 개념 찬 어른들로 자랐다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할 수 없다면 교육 현장에서 체벌을 부활 시키자는 말은 그저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에 과거를 향해 퇴행하자는 주장 밖에는 되지 않는다. 대안이 없기 때문에 이미 폐기된 병폐를 부활 시키자는 주장은 결국 상정된 문제를 현실의 일부로서 긍정하고 영속화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점에서 아무런 실질적인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책임지지 못할 이상론을 떠드는 것 만큼이나 무책임하다. 무엇보다 <금쪽같은 내 새끼>의 문제아들을 보면서 저런 애는 패야 말을 듣는다고 혀를 차는 익명의 훈육 전문가들이 과연 그 아이가 올바르게 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언하는 것일지, 아니면 그냥 새파랗게 어린 놈이 까부는 게 꼴보기 싫어서 그렇게 반응하는 것일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아동 심리 전문가로 족히 수십년의 업력을 쌓아온 전문가와 정신 의학 관련 대학원 수업 한번 안들어봤을 익명의 키보드 워리어들 사이에서,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는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면 답이 나온다.


요컨대 최근 사회의 전반적인 양육 실태에 관해서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아동 심리, 양육 전문가로서 학술적으로 여러 사례들을 통해 검증된 정론을 설하는 오은영보다는, 그걸 제 편한대로 왜곡해 받아들여서 자기 애를 망치는 수준 미달의 부모들에게 문제가 있다. 이 점에서 오은영에 대한 세간의 비판은 소위 '개빠'를 양산한다는 부당한 오해에 시달리는 강형욱에 대한 비판과 맥락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 강형욱이 개를 '오냐 오냐' 키우라 말한 적이 없듯이, 오은영 또한 아이를 '오냐 오냐' 키우라 가르친 적이 없다. 그걸 보는 주인, 양육자들이 제 편한대로 전문가의 견해를 왜곡해서 받아들일 뿐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오은영이 말한대로 부모로서 명확한 원칙을 세우고 제 아이에게 일관적으로 견지할 수 있을, 어른으로서의 의식 수준을 함양한 사람이 그만큼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냥 사람들 보는 앞에서 부끄럽고 무엇보다 귀찮으니까, 애가 쓰는대로 다 들어주면서 아이의 버릇을 망치는 만만한 부모가 되는 것이다.


강형욱의 <세상에서 나쁜 개는 없다>, <개는 훌륭하다>가 결국 개보다는 개 주인에 대한 인간 개조 프로젝트, <우리 주인이 달라졌어요>로 변질되는 것처럼, 오은영의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도 아이의 품행 문제가 근본적으로, 부모의 부적절한 훈육 방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밝혀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연히 솔루션도 아이의 문제에 앞서, 먼저 부모의 품행을 교정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사회적 의사소통 장애, 품행 장애 같은 몇몇 선천적인 결함을 타고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면, 부모가 잘못한 게 없는데도 아이의 싹수가 날때부터 '노란' 경우는 잘 없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결국 애들은 자기를 양육하는 어른의 행동과 의식을 보고 배우게 되어 있다. 애꿏은 전문가를 탓하고 어른들이 가르치는대로 보고 배웠을 따름인 아이를 욕하는 데에 열을 올릴 게 아니라, 먼저 그런 문제아를 만드는 데에 일조한, 어른이 되지 못한 어른들부터 반성해야 한다.


내 말대로 하지도 않아놓고, 왜 내 탓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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