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곡성>의 악명높은 난해함은 영화가 의도적으로 명료한 인과 관계의 구성을 취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곡성>은 서로 모순된 사실 관계를 배치하고 통상 앞선 사건이 잇따르는 사건을 직접 파생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인과 관계를 다만 시간상의 연접으로 처리함으로서, 서사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을 불가능하게 한다. <곡성>의 서사 구조는 나홍진 감독이 직접 공언하고 있듯이, 어느 쪽으로도 해석 가능한 모호함을 가진다. 때문에 <곡성>에 관해서 여러 해석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들은 불확실한 가설에 그친다. 왜냐하면 어떤 추론도 다른 추론의 가능성을 충분히 배제하는 폐쇄적인 완결성을 구축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구의 딸이 빙의 증상을 보이고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며 발작적인 광증에 마을 곳곳에서 일가족이 몰살 당하는 일련의 괴현상, 사태만이 분명한 것으로 나타날뿐, 무엇이 그러한 사태를 초래하였는지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는다. <곡성>에 영화가 관객을 기만한다는 악평이 따라붙는 것도 이 때문인데, 영화가 관객을 끊임없는 오인과 미혹으로 몰고 가기만 할뿐 그 너머 이면의 실상을 명쾌하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곡성>은 무명, 일광, 외지인을 비롯 극중의 사태에 깊게 관여하는 어떤 인물에게도 명확한 책임 소재를 밝히지 않는다. 특히 외지인은 작품의 종반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태의 배후에 있는 유력한 용의자인 것처럼 묘사되지만, 외지인을 귀신이라 지목했으며 그에게 살을 날리는 의식을 치르기도 했던 일광이 이후 그가 귀신이 아닌 자신과 같은 무당이라 밝히면서 유력한 추측은 좌절되고 만다. <곡성>의 흥미로운 부분은 그렇다고 외지인에 대한 작중의 모든 혐의를 무산 시키면서 서사의 모호함을 해소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의 최후반부 이삼 앞에서 보이는 외지인의 모습은 전형적인 악마의 형상이며, 이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가 모종의 악의를 품은 존재임을 짐작하게 한다. 여기서 문제는 이삼이 보는 외지인의 모습이 정말 그의 본 모습인지도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너는 내가 악마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이 곳에 왔다."는 외지인의 말은 그의 악마적 형상이 외지인을 악마라 확신하기 때문에 빚어진 이삼의 주관적인 환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며, 또한 그간 종구의 곁에서 무속적인 통찰을 제공하며 극의 해설자 역할을 담당해왔던 일광의 견해와도 배치되기 때문이다. 설령, 외지인이 정말 악마나 그에 준하는 존재임이 확실하다고 해도, 그가 모든 사태의 배후에 있음이 확실해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직접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적이 작중에서 직접 묘사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곡성>에서는 누가 '선역'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무명과 일광이 작중 종구에게 조언자 역할로 개입하기는 하지만, 무명의 경우, 그녀가 사람이기는 한 것인지조차 의심스럽고, 일광은 자신의 무속적 통찰력을 활용, 상황을 진단하고 일련의 의식을 집전하기도 하면서 사태의 개선에 힘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악화되기만 한다. 또 일장기, 욱일기 등의 상징물을 연상케하는 일광의 이름과 그의 훈도시 차림은 그가 작중에서 유력한 용의자로 간주되는 외지인과 같은 ‘일본인‘으로서 민족적 동질성, 소속감을 공유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물론 이 자체가 일광과 외지인이 한패임을 의미하는 단서는 아니다. 그렇지만, 작중 일광이 일본인이어야만 할 서사 내적인 당위나 이 밖에 그가 일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행사하는 일이 묘사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가 외지인과의 어떤 공통성을 가짐이 암시된다는 사실은 일광이라는 인물의 동기와 성격 또한 외지인과 그리 다르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작중 일광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라고는 그가 (종구의 딸이 빙의 증세를 보이자, 종구의 어머니가 곧장 그를 찾을만큼) 용하기로 유명한 무당이라는 것 이외에는 없다. 기실 그를 액면 그대로 종구의 ’조력자‘로서 신뢰하기에는 우리가 일광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극중의 언론 보도, 등장 인물들의 입을 빌어 꾸준히 언급되는 독버섯 중독의 가능성, 즉, 모든 사건이 주술적 저주의 작용이 아닌, 버섯 중독으로 인한 생리학적, 세속적 병증에 불과하다는 의심은 그것이 유력한 가능성 가운데에 하나로 부각되면서도 영화의 무속적 테마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지점에서 혼란을 가중한다. 우리는 살인귀에게 쫓기는 희생자들을 다룬 슬래셔 무비에서 (그러한 모티브와는 무관한) 우연적인 죽음이 연출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작품 속에 정말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그걸 영화의 테마와 무관한 불필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하거나 다만 관객을 오인케하는 서술 트릭의 일환으로 간주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작품 속에 가정된 모티브에 입각하여 작품을 일의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우리의 직관은 무속적 힘이 난무하는 (그렇게 생각되는) 세계 속에 가정된 '기술적' 문제의 가능성, 이중적 모티브 앞에서 곤란을 겪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에 홀린 게 아니라, 다만 버섯 독에 취해 있었을 뿐이라는 것일까? 영화는 이에 대해 아무런 확답을 내놓지 않는다. 영화의 도입부에 나온 살인자가 보인 착란 증세, (종구의 동료인 성복의 입을 통해 언급되는) 그리고 그의 혈액 속에 독버섯 성분이 다량으로 검출되었다는 혈액 검사 결과, 종구의 딸의 사타구니에 난 두드러기 등 <곡성>은 ‘버섯 중독 가설‘에 관한 여러 단서들을 제시하고 있기는 하지만, 작중 인물들이 버섯을 직접 섭취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또 만일 버섯이 작중에서 묘사되는 것과 같은 심각한 착란 증세를 일으키는 것이 사실이라면, 왜 마을의 주민들이 (환각 버섯의 위험성을 알리는 언론 보도와 버섯으로 인한 착란 증세 때문이라고 알려진 일련의 사건들을 목격하고도) 그런 버섯을 계속 섭취해왔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는 주술적, 무속적 테마, 즉, 일련의 의식을 통해 매개되는 주술적 저주가 사태의 배후에 위치한다는 믿음은 사실 관계의 규정 자체에 있어서 근본적인 모호함을 남긴다. 주술이란 그 본성상 서로 직접적, 물리적으로 상호작용하지 않는 의식ritual과 잇따르는 현상 사이의 추상적인 연관에 불과한 것이어서 (황금가지의 저자 프레이저는 모든 주술적인 사고의 근원에는 공감 원리, 즉, 사물들이 서로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도 어떤 비밀스러운 공감을 통해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이 위치한다고 설명한다.) 주술적 사태의 실체는 오로지 어떤 일이 있은 뒤에 다른 일이 발생했다는 개연적인 연관으로만 파악될 수 있다.
또한 주술적 믿음은 인간이 변화무쌍한 세계의 원리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갖는 불안과 무지를 극복하기 위해 모색된 '초자연적' 방편이라는 점에서 그 모든 의심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자인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에 의존한채 살아가야만 하는 인간 존재의 극복될 수 없는 무지와 나약함에 모든 주술적 관념의 핵심이 기초한다. 따라서 극에 전제되어 있는 일체의 주술적 관념, 직접 매개하는 힘의 흐름을 관찰할 수 없는 주술적 행위의 작용은 마치 우리가 실제 무속인의 예언과 접신 퍼포먼스를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과 같이 의심스러운 것으로 남는다. 왜 자신의 딸이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냐는 종구의 질문에, 고 놈은 미끼를 던졌을 뿐이고 자네의 딸은 그것을 물었을 뿐이라고 답하는 일광의 설명 역시, 명확하게 해명될 수 있는 이유와 논리를 가지지 않고, 그리하여 근본적으로 우연과 구분되지 않는 주술적 관념의 본질을 암시한다.
일광이 종구의 의뢰로 외지인에게 살을 날리는 의식을 거행하는 시퀀스는 이러한 주술적 사태의 근본적인 모호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일광이 요란하게 굿을 하며 인형을 향해 칼을 던지고, 칼이 날아가 꽃히면서 고통에 겨워 쓰러지는 외지인의 모습을 교차로 보여주는 일련의 시퀀스는 마치 일광이 정말 외지인에게 살을 날렸고 외지인이 그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여진다. 하지만 실제로 두 사건 사이의 인과적 연관은 작중에서 증명되지 않는다. 우리는 두 별개의 사건 사이를 매개하는 초자연적인 힘의 작용 자체를 직접 관찰하지 못한다. 단지 일광이 일련의 의식을 치르고 외지인이 고통을 겪는 각각의 장면이 시간적으로 연접하고 교대로, 계속적으로 보여지면서 서로 인접한 사건의 관계들을 인과 관계로 생각하게 되는 우리의 관습적 사고를 촉진하고 있을 따름이다.
일광의 의식은 결국 종구가 굿판에 개입해 훼방을 놓으면서 중단되고 만다. 종구는 그 의식이 자신의 딸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 있었음을 모르지 않았다. 다시 말해, 일광이 외지인에게 살을 날리는 것을 방해하면, 종구의 딸과 그의 가족은 미처 뿌리뽑지 못한 후환으로 말미암아, 더 큰 파국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종구가 일광의 의식을 중단시킬 수밖에 없었던 건 의식이 진행됨에 따라 괴로워하는 딸의 모습을 보면서 일광이 날리는 살이 과연 외지인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딸을 향한 것인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외지인에게 살을 날리는 그 과정이 자신의 딸에게 해를 입히지 않음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구의 행적은 다른 방편이 없어 무속적, 초자연적 힘에 의존하면서도 그것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확신하지 못하는채 선택을 하고 의심하면서도 자신의 선택에 의거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을 반영한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활용하여 세계를 이해하고 그렇게 얻어진 앎을 통해 앞날을 예측하고 주위의 환경을 변혁하며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 인간의 경험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감관의 한계에 의해 제약되어 있고, 이성의 기능은 바로 그 경험의 내용에 상당부분 기초하며, 이성에 의해 도출된 결론의 진리값은 결국 경험적으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일체의 선험적 판단, 즉, 이론적 예측 및 전제들 역시도 일련의 사실이 경험에 우선하게 되어 있다는 또 다른 ‘경험’을 전제로 성립하는 것이다. 삼각형이 세 개의 변을 가진다는 것, 두 점이 주어져 있을 때, 그 두 점을 잇는 직선을 그을 수 있다는 자명해 보이는 진실도 우리가 그러한 삼각형, 선분의 성질을 목도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인식 속에 자리잡을 수 없다. 또한 아무리 형식적인 아름다움과 간명함, 내적인 정합성을 갖춘 이론이라도 그것을 통해 유도되는 예측이 실현되는 것을 보임으로서 경험적으로 검증되지 않으면 탁상공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어느 시점에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되어있다. 문제는 우리의 지성과 감관이 무력해지는 지점에 다다라서도 우리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아는 게 힘'이라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제언은 이때 '모르면 무력하다'는 절망으로 전복되고 만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자신의 판단력조차 신뢰할 수 없는 인간은 도대체 무얼 해야만 하는가. 종구가 무명과 일광 사이에서 갈등하는 종반부 시퀀스는 이러한 문제 의식을 극단으로 몰고간다. 무명은 가족을 살리고 싶다면 닭이 세 번 울기 전까지는 집에 돌아가서는 안된다 말하고 일광은 그 반대편에서 종구가 무명에게 현혹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문제는 ‘절대 (무명에게) 현혹되어서는 안된다.’는 일광의 호소로부터(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 의식으로부터) 바로 일광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일체의 미혹에 앞서서 성립하는 진실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가? 무엇이 진실이고, 미혹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일광 자신도, 그리고 무명도, 종구에게 무엇이 진실임을 확인 시켜주지 못한다. 어쩌면 ‘현혹되어서는 안된다’는 말 자체가 현혹의 일환인지도 모른다. 양자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 당하는 종구는 어느 쪽에서도 확신을 구할 수 없다. 이유없이 닥친 재앙의 앞에서, 알지 못하면서도 선택을 해야하고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결국 종구는 무명의 조언을 무시하고 파멸을 맞이하게 되지만, 이것이 일광이 옳았고 무명이 틀렸음을, 종구의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재앙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닥치는 것이듯이, 종구의 파멸은 그가 어떤 선택을 취했는지와는 관계없이 이미 확정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종구의 선택이 결과의 차이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해도, 그가 일광 대신에 무명을 ‘믿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간은 결국 주어진 조건 하에서 선택하고 자신의 편향된 주관 안에서 사고하는 생물이다. 인간 의지의 자유로움은 무한하지 않다. 어디까지나 타고난 지성과 체질, 성장 환경과 같은 생득적인 조건과 일일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적 상황에 의해 제약된 선택지 안에서만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요컨대 인간은 자신의 무의식, 욕망, 선택이 이루어지는 층위 자체를 결정하지 못한다. 즉, 인간은 무언가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종구는 무명을 ‘믿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무명을 ‘믿을 수 없었다.’ 종구의 선택은 그의 사고와 선택을 제약하는 인식적 여건과 제반 사항에 의한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종구가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환상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곡성>의 서사 전략은 크게 두 가지 층위에서 작동한다. 우선 영화의 장르적 특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곡성>은 호러, 오컬트 장르의 영화이고 이는 관객에게 모종의 공포감을 조성하는 데에 방점이 찍혀 있는 장르이다. 그리고 인간이 가장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은, 자신이 명확히 알지 못하고 따라서 올바르게 대처할 수 없는 미지의 대상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이다. 예컨대 과묵한 사이코패스가 맹목적으로 살육을 자행하는 고전적인 슬래셔 무비의 연출은 이러한 미지에의 공포를 자극하기 위한 의도 아래 있다. (동기를 알 수 없고 대항할 수 없으며 교섭할 수조차 없는 살인귀의 존재는 자체로 살아있는 재앙에 가깝다.) <곡성>의 주술적인 테마 역시, 일체의 사태를 근본적으로 불가해한 것으로 남겨둠으로서 미지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자극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마지막으로, 영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하여 ‘보여주는’ 데에 특화된 매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곡성>의 주술적 테마는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부조리와 인간의 제한된 합리성에 대한 문제 의식과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성과 감관을 활용해서 세계를 해석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처하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하고 해소될 수 없는 불확실성에 의해 만성적인 불안에 시달린다. 때문에 인간은 경험 과학적 인식이 지배적인 현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미신과 종교를 믿는다. 과학, 우리의 경험이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에 관한 ‘대안적인‘ 설명을 추구하기 위해서다.
인간은 일련의 이유와 논리를 들어, 자신이 인식하는 세계에 대한 설명적인 도식을 구성하려 한다. 하지만 실제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뚜렷한 합리적 이유없이 단순한 우연에 의해 빚어지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현상들 뿐이다. 태풍,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이 죄악에 대한 신벌로써가 아닌, 그저 지각의 운동과 기류의 누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듯이, 유복한 가정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는 행운이 다만 잉태와 출산이라는 생물학적인 과정에서 비롯하는 것이듯이, 있는 그대로의 ‘팩트’에는 의도나 목적이 없다. 다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맹목적인 메커니즘의 작용만이 있을 뿐이다. 극중 일광은 왜 고통받는 이가 자신의 딸, 가족이어야만 하냐는 종구의 질문에 "그 놈은 그냥 미끼를 던진 것이고 자네의 딸은 그것을 물었을 뿐"이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일광이 통찰하고 있는 바는 종구라는 개인의 비극과 비극의 무대가 되는 삶의 불가피한 맹목성이다. 즉,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무언가가 어떠해야만 한다는 믿음, 당위에 근거해서가 아닌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며, 그럼에도 선택의 여지없이 이를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