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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Jun 28. 2023

아우라, 시뮬라크르

실체없는 사본, 이미지들

영국의 철학자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서구의 철학 전통을 다음과 같은 저명한 경구를 통해 정의했다. "유럽 철학 전통에 대한 가장 안전하고 일반적인 정의는 그것이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각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는 서구의 철학 전통이 열화된 사본과 형상, 그리고 그것들을 파생하는 보편적이고 완전한 실재를 전재하는 플라톤적 형이상학의 보론, 내지는 그에 대한 대립과 지양aufheben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실제로 서구의 철학적 전통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플라톤주의는 아퀴나스와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중세 서구 사회의 대전제였던 가톨릭 신학의 한 축을 담당했었고, 칸트가 언급한 물자체 역시, 우리가 직접 인식하는 사물과 현상 너머 진정한 실체가 있다는 플라톤적 전제에서 출발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은 플라톤주의의 가장 성공적인 변주였다. 헤겔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진전하는 보편 이성이 끊임없는 지양으로서 개선되는 절대 정신에 도달하게 되리라는 낭만적인 전망을 내놓았으며, 이는 냉전이 종식되면서 역사의 종말이라는 선언으로까지 이어졌다. 자신의 저작 <역사의 종말>에서 헤겔의 아이디어를 빌린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소련의 해체 직후,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아'에 도달함으로서 역사가 더이상의 변증법적 투쟁과 변혁이 없는 안정된 상태에 도달하리라고 보았다. 머지 않아 그 전망이 거짓된 것임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원본과 사본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을 전제하는 플라톤적 사고 방식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친숙하다. 진본이 복사품보다 더 비싸게 팔리고 공연, 연극과 같은 일시적인 체험의 현장감이 중시되는 우리의 보편 경험에 비추어 볼때 그러한 논리가 강력한 설득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벤야민이 말한 아우라 또한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 벤야민은 원본이 가진 진본성 자체, 그것을 그때, 그 장소에서 밖에 조우할 수 없다는 일시성, 그것을 누구도 보유하고 거듭 재생할 수는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하는 거리감으로 인해, 사물에 대체할 수 없고 모방될 수도 없는 아우라가 깃든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사물의 아우라는 그것이 누군가에게 보여지거나 어떤 효용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 아니라, 사물이 직접 현존하는 특정한 양식 자체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당초 벤야민은 이러한 아우라가 사진, 영상과 같은 복제 기술의 등장으로 원본과 사본 사이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누구나 쉽게 작품에 접근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몰락할 것이라 예견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아우라라는 용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또 그것을 체감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는 두텁고 비좁은 유리 진열장에 가로막힌 모나리자의 원본을, 물감 자국까지 보이는 고해상도 스캔본보다 높이 평가한다. 심지어 위작이 원작과 같은 기법, 화구, 물감 등을 사용해 만들어져, 원작과 정확히 동일한 물성을 가진 경우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러한 위작이 원작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가 사본이 어디까지나 원본으로 부터 파생되는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그것의 물성이나 보여지는 방식과는 관계없이 원본에 그것이 원본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원본 없는 사본, 원본을 초월하는 사본의 출현은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보드리야르가 '시뮬라크르'라 일컬은 이 실체없는 사본, 이미지들은 우리의 인지 자원을 잠식하면서 (그의 표현을 따르면) '현실의 종말'을 이끌어내고 있다. '현실 원리', 즉, 주관 외부의 거스를 수 없는 실재를 존중하고 그것과의 대자적인 관계를 지속하는 일은 미디어, 디지털 테크놀로지의 발달로 모든 것이 가상을 통해서 표현되고 그리하여 가상이 오히려 현실에 대해 지배적인 것으로 되면서 위태롭게 되었다. 이러한 시뮬라크르의 예시는 너무나도 방대하고 우리가 의식조차 할 수 없을만큼 뿌리깊다. 가령, 오늘날 우리는 실재하는 자연인 자체가 아닌, 매체 속 셀럽으로서의 기획된 이미지를 소비한다. 크리스 햄스워스가 '토르'로, 크리스 에반스가 '스티브 로저스'(또는 캡틴 아메리카)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이, 배우와 그가 맡은 배역은 은연중에 구분을 잃는다. 미키 마우스는 생쥐의 데포르메가 아닌 미키 마우스라는 캐릭터 자체이자 세계적인 저작권 공룡의 첨병으로 인식되고, 중세 판타지풍의 테마 파크와 한국의 민속촌은 그 내부에 역사적 사실들에서 빌려온 것이 아닌, 자체의 자생적인 풍속을 구축한다. 심지어는 전쟁이라는 극적인 사건조차 매체를 통한 윤색을 거치면서 그 자체와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된다. 전쟁은 정치 행위의 연장선에서 실현된다는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통찰은 FPS 게임의 한 장면과도 같은 헬멧캠 영상과 쾌락적인 폭발의 미학만을 표상하는, 정교하게 선별된 폭격의 이미지 앞에서 무력화된다. 미디어 속 전쟁은 정치적 사건, 대량 살상이라는 본연의 함의를 잃고 스펙터클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 된다.


시뮬라크르가 사실이 아니라고 지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사실이 의미를 가지려면 가상과의 대조가 이루어져야만 하는데, 시뮬라크르는 아예 자신을 파생하는 원본을 가지지 않거나, 원본을 전제하고 있는 경우에도 자체의 체계적 논리를 따라 자생하기 때문에 원본과는 이미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가짜 뉴스가 그 수요자들에게 그들이 기대하는 대안적 현실의 상을 제공하면서 정치적 결정과 구체적인 사회 현실에 직접 영향을 미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근절하지 못하는 이유도 이와 같다. 가짜 뉴스는 단순히 사실에 위배되는 거짓말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로 별개의 사회적 현실, 시뮬라크르이기 때문이다. 시뮬라크르의 증식은 상상적 실재imaginery reality를 능숙하게 만들어내는 우리의 심리적 메커니즘과 밀접한 관련을 갖기에 더더욱 근절하기 어렵다. 가령 우리는 국가, 그리고 그 내부에서 통용되는 화폐를 어떤 객관적인 실체인양 생각하지만, 실제로 국가는 개인들의 집합과 그로부터 창발되는 질서 체계에 지나지 않고, 화폐 역시 거기에 가치를 매개하는 사회적 약속이 없이는 한낱 종이뭉치, 표기되는 숫자에 불과하다. 모두 우리가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상상적 실재인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뇌는 애초에 실재와 가상의 구분에 관해서 유연한 접근을 취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뮬라크르가 본질적으로 가상임을 간파하더라도 그것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다.


대체 불가능 토큰, 이른바 NFT는 이처럼 가상과 실재, 원본과 사본간의 경계가 흐려져만 가고 있는 세태 속에서 모색된 '기술적' 방편의 하나이다. NFT의 요체는 블록체인 네트워크를 통해 원본 데이터의 식별 코드를 공유하고 필요시 그것을 대조함으로서 데이터가 원본임을 감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가 공유하는 데이터를 하나의 블록block으로 구성하여 언제든지 그 내역을 상호 대조 할 수 있게 하는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특성상, 데이터의 위변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은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가상 화폐의 유효성 검증에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NFT는 그것이 처음 시장에 소개되었을 당시의 호응을 계속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다. NFT의 발행량 자체가 줄어들고 있고, NFT가 시장에서 받는 평가 또한 지속적으로 낮아지는 중에 있다. 가령 소더비 등과 함께 세계 최대의 경매소 중 한 곳인 크리스티의 경우를 보면, 2021년에는 낙찰된 NFT 작품의 총액이 무려 1억 5천만 달러에 달했으나 바로 다음 해에는 460만 달러로 급락했다. 매드 도그 존스, 새러 메요하스 같은 유명 작가들의 작품조차 7만5천 달러, 9400달러 정도의 가격표를 받아드는데 그쳤다.


이와 같은 NFT의 몰락은 토큰화된 데이터, 컨텐츠 자체의 진본성을 보증해주지 못하는 NFT의 근본적인 한계에 기인한다. 즉, NFT의 기술적 전제인 블록체인 네트워크는 토큰화minting 과정에서 컨텐츠에 덧붙여지는 식별 코드만을 식별할뿐, 해당 컨텐츠 자체의 유일성을 보증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블록체인 네트워크의 원본성 검증은 네트워크 내부에서만 이루어지고 그 내부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컨텐츠가 NFT화된 이후에도 NFT의 보유자가 아닌 누구나 해당 컨텐츠를 가져다 쓸 수 있고, 또 그렇게 사용된 컨텐츠가 NFT에 비해 사본으로서 열화된 지위를 가지지도 않는다. 뿐만 아니라, 결국 컨텐츠의 가치는 그 물성과 기능에서 비롯하는 것인데, NFT는 컨텐츠에 부여된 식별 코드만을 보호할 뿐, 디지털 복제로부터 실질적인 컨텐츠의 내용을 보호하는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못한다. 일례로, Nyan Cat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밈meme 이미지가 원작자에 의해 NFT화 되어 6억원이라는 거액에 팔리기까지 했지만, 이후로도 그냥 해당 이미지를 ‘다운로드’하기만 하면 누구나 토큰의 보유자에게 어떤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해당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다. ‘대체 불가능 토큰‘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NFT는 여타의 디지털 컨텐츠와 다름없이 디지털 복제 기술에 의한 잠재적 사본으로서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 유튜브 슈퍼챗 매출 순위를 점거하면서 서브 컬쳐의 새로운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버추얼 유튜버'란 자신의 얼굴, 구체적인 신상 대신에 가상의 아바타와 그것이 표상하는 캐릭터적 정체성을 내세우는 일군의 인터넷 방송인들을 의미한다. 물론 인터넷 자체가 기본적으로 익명성의 공간인 만큼, '버추얼 유튜버'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부터 별도의 가명, 캐릭터 이미지 등을 활용하여 자신의 신상을 감추고 활동하는 방송인들은 계속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런 방송인들이 오로지 자신의 신원을 감추고 가장하기 위해 그러한 가상을 동원하는 한편, 버추얼 유튜버들은 스스로가 자신들이 내세우는 가상의 정체성, 캐릭터 자체임을 명확히 자처한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버추얼 유튜버들은 유원지의 인형탈 아르바이트생이나 연극 배우들과도 다르다. 인형탈을 뒤집어 쓴 사람,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은 각자 자신이 아닌 무언가를 가장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꾸며지는 가상 자체인 것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그들이 꾸며내는 가상에는 언제나 본연의 그들 자신, 이면의 실체가 전제되어 있다. 인형탈은 쓰는 사람의 몸과 움직임에 맞추어 가동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배우 역시 제 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라 해도 자연인으로서의 본성과 특유한 이미지를 무대 위에서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한다. 반면 버추얼 유튜버들의 경우, 대외적으로 내세워지는 가상이 곧 그들 자신인 것으로 간주된다. 현실과 가상의 구분은 주관 외부의 명백히 판별 가능한 실체가 존재한다는 전제 하에서 성립하는데, 오직 매체를 통해서만 활동하고 매체의 특성, 기술적 기반을 곧 자신의 존재 양식으로 삼는 버추얼 유튜버들에게는 화면 바깥의 대조 가능한 사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 시청자가 목도할 수 있는 매체 속의 가상만이 그들에 관해 유일하게 주어진 현실로 남아있을 뿐이다. 요컨대, 버추얼 유튜버들은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숨기고 덮어씌우기 위해 가상을 내세우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매개로 하나의 대안적 현실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버추얼virtual하다. 버추얼 유튜버는 시뮬라크르simulacre 인간이다.


버추얼 유튜버는 보여지기 위해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형태로) 외화된 자아, 인격 이미지만이 확인될 수 있는 것으로 존재하는 자체의 닫힌 현실을 구축하면서 연출된 가상과 그것을 매개하는 개인 사이의 실질적이고 필연적인 연관을 단절한다. (사실 유명 버추얼 유튜버들은 암암리에 신상이 알려져 있는 경우가 많으나, 그들 본연의 자연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방송에서 부각되지는 않는다.) 매체를 통해 보여지는 부분 이외에, 버추얼 유튜버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실재는 오로지 가상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적 기반, 매체를 통해서만 구현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표현되기에 적합한 가상, 근거없이 부유하는 이미지만이 일련의 환상을 체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주관 외부의 객관적인 실재가, 실재하지 않는 것,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가상 자체의 반-현실적인 정의에 의해 소거되고 가상을 구현하는 주관에 의거한 (주관-편향적인) 대안적 현실이 만들어진다. 그 결과, 있는 그대로의 인간은 사라지고 일정한 수요, 의도에 입각하여 편집되고 기호화한 인격의 이미지만이 자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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