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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Apr 10. 2023

존 윅 : 챕터 4

규율과 결과rules and consequences

존 윅 시리즈는 본래 말과 설명을 줄이고 상황 전개에 필요한 최소한의 동기만을 부여하여 군더더기 없는 액션 시퀀스를 연출함으로서 명성을 얻은 시리즈였다. 그러나 3에 이르러서는 극중 암살자들의 뒷세계를 하나의 세계관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상당부분 이러한 강점을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안타깝기는 하지만 이유있는 결정이기는 했다. 존 윅이 복수를 위해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규칙을 위반하고 심화된 갈등의 양상으로 접어드는 과정을 정당화하려면 기존에 비해 훨씬 구체적인 세계관이 필요하기는 했다. 이미 확장된 세계관을 다시금 축소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관건은 그걸 다음 작품에서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였는데, 4는 그렇게 판을 벌려놓은 와중에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매듭지었다고 보여진다.


2에서 존 윅이 속한 암살자들의 뒷세계와 그 내부에서의 규율이 본격적으로 묘사된 이후로, 공동체의 규칙과 그 소속원 사이의 투쟁이 시리즈의 핵심적인 문제 의식으로 자리잡았다. 요컨대, 소속원들에 부당한 강권을 가하는 규칙을 단지 그것이 규칙이라는 이유만으로 지킬 이유가 있냐는 것인데, 실제로 윅은 일체의 살인이 금지된 컨티넨탈 호텔 내부에서 암살자들이 절대적으로 순명해야 할 하이 테이블 멤버를 죽이는 등 명백한 규칙의 위반을 저지르긴 했다. 하지만 윅의 그러한 행적은 단순한 전횡이 아니라 아끼던 개가 죽임 당하고 살던 집이 유탄 폭격으로 파괴되어 직접적인 해를 입은 (그럼에도 암흑계의 일원으로서 법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개인의 입장에서 볼때, 사실상의 유일한 자구책이었다. 윅은 자신의 복수가 하이 테이블의 엄중한 처벌을 수반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복수를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윅은 자기의 의사에 반하여 해를 입음으로서 가해진 모멸과 무시를 극복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율에 억눌린 개인과 일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규율 사이의 모순이 드러난다. 그러니까 암살자 생활을 청산하고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었던 윅을 자극한 사람은 따로 있는데, 왜 윅에게만 책임을 묻냐는 것이다. 뒷세계의 규율과 그것이 전제하는 대의가 언제나 소속원들에 우선되어야만 한다면, 윅은 죽은 아내가 남긴 개(그녀가 세상에 남기고 간 유일한 것)을 잃고도 그냥 참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일까? 윅 자신은 물론이고, 영화를 보면서 윅의 처지에 이입하게 되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이는 납득할 수가 없는 결론이다. 물론 복수를 한다고 해서 이미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수는 없다. 그래서 다들 복수는 무용한 것이라고들 한다. 하지만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수는 없다는 사실이 진정 복수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적어도 복수자는 자신의 수복할 수 없는 상실을 되갚아주고 그러한 상실의 속성을 상대방에게 상기시켜줌으로서 자신에 대한 공동체의 인정을 복원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즉, 복수자가 자신의 복수를 실행에 옮김으로서, 사람들은 그가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4에서 이러한 규율의 모순은 규율 자신의 논리에 의해 걷잡을 수 없이 심화된다. 본래 규율은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함으로서 궁극적으로 구성원 전체를 보호하기 위해 제정되는 것이다.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며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 규율의 세부적인 규정들은 구성원들 사이의 불가침한 권리 사항들을 규정하고, 그럼으로서 내부의 소모적인 분규를 억제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규율에 전제된, 예외를 허락하지 않는 완고함은 다름 아닌 규율 자신에 의한 일련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한 조건이다. 즉, 구성원들을 규제하는 규율 자신도, 자체의 지배 아래에 놓임으로서 규율의 행사가 규율 스스로의 요체를 침해하지 않는 정합적인 체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규율은 윅을 죽이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존속케 하기 위한 목적하에서 폭주하기 시작한다. 윅을 죽이는 데에 써먹기 위해 은퇴한 암살자의 가족을 위협하고, 컨티넨탈 호텔 안에서 일체의 폭력을 불허하는 (다름 아닌 규율 자신에 의해 제정된) 성역의 규율을 위배하기도 한다. 윅을 보호하고 있던 오사카 컨티넨탈의 수장 코지는 후작의 명을 받아 호텔을 수색하러 온 인원들에게 호텔 내부에서 살인을 저질러서는 안된다는 성역의 규율에 따라 무기의 반납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은 규율에 의거한 요청에 응하지 않고 관련한 절차를 밟지 않은채 임의로 호텔의 비성역화를 선언한뒤, 호텔 내부에서 무력을 사용한 수색을 벌인다.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낳는 상황 속에서, 더 이상의 무의미한 대립을 피하기 위해 윅은 자신이 이길시 하이 테이블 체제에서의 모든 의무를 면제 받는다는 조건하에 하이 테이블에게서 전권을 위임받은 후작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그러나 후작은 1대1로 대결해야 한다는 결투의 대전제를 어기고 결투가 시작되기 전, 암살자들에게 암살 임무를 중개하고 현상금을 지급하는 에이전시 시스템을 통해 온 도시의 암살자들을 동원하여 윅을 방해한다. 이처럼 규율은 규율 자신의 규정을 위배하면서 자기의 본위를, 그리고 구성원들의 존중을 잃어버리게 된다. 불법적인 비성역화에 대항하여 하이 테이블의 병력들과 맞서 싸운 오사카 컨티넨탈의 인원들, 그리고 윅에게 걸린 수천만불의 현상금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윅을 돕기 위해 앞장서는 두 명의 암살자(케인, 노바디)가 규율의 실추된 권위를 단적으로 나타낸다. 규율이 규율 자신의 본위를 잃고 자기의 논리마저도 위배하는 순간, 그런 규율은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스스로 위배함으로서 자기의 정당성, 권위를 상실한 규율은 결국 자기의 간계에 의해 파국을 맞는다. 최후의 순간, 윅은 후작의 대리인으로 지명된 케인과 (총알이 한 발씩 밖에 들어가지 않는) 결투 권총을 사용한 결투를 벌인다. 30보 간격에서 시작한 결투는 10보 간격에 이르기까지 결판이 나지 않다가, 윅이 복부에 총격을 맞고 주져앉으면서 끝을 향해간다. 윅이 무력화된 것을 보고, 후작은 뒷세계에서 전설적인 악명을 떨친 윅을 자기의 손으로 죽였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 케인의 권총을 빼앗아 윅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한다. 그때 윅은 아직 발사하지 않은 자신의 권총으로 후작을 죽여 결투를 끝낸다. 당초에 후작은 전설적인 암살자인 존 윅과 직접 승산이 없는 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존 윅의 오랜 친구이기도 했던 케인을 그의 대리인으로 지명했다. 그리고 그가 대리인을 앞세우는 한, 후작은 결투에서 패배하더라도 죽지는 않을 수 있었다. 결투가 끝나면, 그는 암살자 세계의 정점에 선 하이 테이블의 일원으로서 규율의 보호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케인의 권총을 빼앗아 윅의 앞에 선 순간, 그는 규율이 규정하는 바에 따라, 대리인을 대신 앞세운 후원자가 아닌 결투의 직접적인 당사자가 되었다. 하이 테이블의 일원으로서 그가 수호하는 규율의 담지자이기도 한 후작은,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에 의거하여 규칙을 바꿈으로서 자기에 대한 살인을 승인한 것이다.


작중 후작은 하이 테이블로 부터 일련의 권한을 위임받은, 규칙의 주관자로서 얼마든지 자기에게 유리한 방식대로 규칙을 바꾸어 왔다. 그러한 후작의 존재는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 내부의 위험 요소(규율을 배반하여 규율의 보호를 구하지 못하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 존 윅)를 배제하고자 하는 체제(하이 테이블)의 면역 반응을 상징한다. "주권자란 예외 상태를 규정하는 자"라는 칼 슈미트의 말처럼, 그는 일반적인 규율이 통제할 수 없는 규율의 외부를 규정하고 법 바깥의, 초법적인 대책을 강구할 수 있는 자이다. 여기서의 '예외 상태'는 존 윅이라는 범죄자의 존재 자체이다. 죽음의 율법을 위반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윅의 존재는 그 자체가 규율이 미치지 않는 체제의 외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규율이 형성하는 실천적인 규범은 그 영향 아래에 있는 모두가 위반에 잇따를 처벌을 예견하고 불가피한 것으로 간주하면서 실효를 얻는다. 기실 형벌의 집행 자체는 규율의 강제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믿게 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도 '판옵티콘'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믿어지고 나서야 벌 받음으로서 고통받는 신체는 비로소 규율의 상징으로서 기능하기 시작한다. 그러지 않으면 고통받는 신체, 처벌의 양상은 무엇도 담지하지 못하는 공허한 스펙터클에 지나지 않는다. 윅의 존재는 이와 같은 규율의 강제성에 대한 신의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그는 죽어야만 한다. 죽어야만 할 윅이 살아있는 한 규율은 항시 조건적인 것에 불과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 스스로가 규칙을 위반한 자이므로, 그는 규율의 존중을 받을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그리하여 윅은 규율이 규정하는 일체의 권리 사항을 박탈 당한다. 그러나 이처럼 윅이 규율의 권외에 위치해 있다는 '예외 상태'의 규정은 규율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공인함으로서 역설적으로 체제의 규율을 전에 없이 위태로운 것으로 만든다. 성역의 규율은 다름 아닌 그러한 규율을 주관하는 체제의 대행자가 직접 성역을 침범하는 강력한 반례에 직면하여 손상되고, 규율에 의해 승인된 결투의 결과로 예정된 처벌을 면제받은 최초의 전례를 만든다. 따라서 행위에는 결과가 잇따르기 마련actions have consequences이라는 규율의 대원칙은 스스로 손상되고 만다. 왜냐하면 규율 자신이 그 위반에 잇따라야 할 처벌의 정당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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