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에 대한 편견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세상에 근거 희박한 편견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편견이란 일정한 경향성, 상관 관계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겪은 공통 경험에 기반하여 형성되는 것이며, 또한 편견의 대상이 되는 일련의 외적, 범주적인 특징들은 많은 경우에 있어서 편견이 함의하는 특정한 성질의 표현형으로서 편견이 포착하는 전형stereotype과 인과적인 연관을 맺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령, 문신한 사람을 (잠재적인) '양아치'로 간주하는 세간의 인식은 실제로 문신한 사람들 가운데 '양아치'의 비율이 유의미하게 높을 뿐만 아니라, 문신이라는 외형적 특징 자체가 세간의 부정적 인식을 무릅쓰면서 자신의 선호를 관철하고 평생 몸에 남을 그림을 순전한 기호에 입각해서 새기는 개인의 탈-사회적, 충동적인 성향을 반영하는 데서 비롯한다.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사람들 사이에서 문신이 선호되지 않는 이유는 경험적으로 문신과 문신을 새긴 사람의 반-사회성이 자주 상관적으로 결부되는 한편, 문신을 한 개인의 특징적 외형이 그 개인의 문제적인 본질에 대해서 말해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인 것이다.
편견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항변은 본래 편견이란 타자에 대한 총체적 인식이 불가능하거나 적어도 매우 어렵다는 한계에 의해 부득이하게 형성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무력하다. 애당초 편견에 대한 신용은 그것이 100퍼센트의 정확성을 담보하는 엄밀한 판단의 기제라는 이유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오히려 편견에 대한 신용은 그것이 일정한 인지적 편향에 의해 재조직, 과잉-최적화된 '편리한' 사태 인식을 제공한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왜냐하면 대체로 사람들은 무언가를 실제로 아는 것보다, 안다는 느낌을 얻는 것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실제의 (편견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일컬어지는) 앎은 대상의 구체적인 일면들을 종합하고 관찰로 얻어진 바를 끊임없이 비판함으로써 사실에 대한 하나의 개념적 총체를 구축하는 과정으로 기능한다. 그리고 이러한 앎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밀하게 본뜬 관념적 사본으로 단순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앎은 그것이 사실의 요소들을 일정한 관계망의 형태로 취합한 인지적 구성물에 불과하다는 자각 속에 이루어지면서 언제나 자기에 대한 비판의 여지를 열어놓는다. 그리하여 앎은 가장 견고한 경우에도 여전히 수정 가능한 인식의 한 양상으로 남기 때문이다.
반면, 편견은 일반화된 관찰의 내용을 사실의 구체적인 양상인 것으로 확정지음으로써 흔들릴 수 없는 확신을 구축한다. 앎이 어떤 반례에 직면할때, 새롭게 알려진 사실에 맞추어 자기를 수정해야 할 당위의 도전을 함께 받는다면, 편견은 자기에 대한 반례를 단지 소수적 예외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할 뿐만 아니라, 일체의 알려진 반례들을 포괄하거나 체계의 밖으로 배제할 수 있는 새로운 규정을 만들어내어 자체의 체계적 정합성을 지켜낸다. 다시 말해, 편견은 사실의 의미를 필요한 만큼 수정함으로써 언제나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남을 수 있다. 편견에 있어서 모든 반례는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로 작용할 뿐이다.
그리고 이처럼 변동될 수 없다고 가정되는 확신, 안정된 인식의 구조에 대해서 사람들은 본능적인 안락함을 느낀다. 이견의 여지없이 확고한 진실이 존재하며 그것이 이미 알려져 있다는 가정 하에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사물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도 항구적인 차원에서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한정된 양의 정보와 요소 투입에도 불구하고 대상에 대한 유효한 결론과 행위 원칙을 도출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편견은 유용하며, 다소간 불가피한 것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언가를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언제나 충분히, 다각적인 차원에서 취할 수 없고, 기실 일체의 주관적 규정과는 무관한 객관적인 실재 자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의 사물 자체에는 우리가 그것을 일련의 설명 가능한 요소, 특징으로 파악하는 것과 같은 일정한 형식, 정의definition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의 사물은 그 모든 개념적인 범주를 넘어선 무언가일 따름이다.
우리의 주관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객관적인 물성, 물자체thing-in-itself는 결코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알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물 자체는 언제나 생물학적 외연에 제약받으며 기능하는 감관과 대상을 상호 연접하는 요소들의 패턴으로 파악하는 주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로 우리에게 알려지는 건 감관을 통해 얻어진 정보를 특정한 형식 틀에 맞추어 배열하는 우리의 인지적 여건에 의해 편집된 사물의 한 주관적인 양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한다는 건 지각된 사실에 대한 선험적인 분류를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즉, 사물, 현상을 (그것의 고정된 특성을 반영한다고 가정되는) 일반화된 전형으로 분류하여 파악한다는 점에서 편견은 인간 인식의 전반적인 메커니즘과 궤를 같이 한다. 요컨대,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할때, 실제로 우리가 갖게 되는 건 사물이 우리의 주관과 상호 작용하여 형성된 어떤 경향성에 대한 믿음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