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ritingonthewall Sep 02. 2023

인정 욕구의 문제


인간은 경제적인 풍요와 안정을 추구하는 만큼이나, 종종 그 이상으로, 타인으로부터의 승인, 인정을 추구한다. 노동의 결과로 주어지는 경제적 보상과 각 개인에게 내재된 승인 욕구는 노동에 따른 경제적 보상이 개인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인정의 추상화된 표현형의 하나라는 점에서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즉, 어떤 개인이 많은 돈을 번다는 것은 그 금액만큼이나 그 사람이 많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가치있는 인간이라는 공인과 다름없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최저선에 가까운 적은 액수의 봉급만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가 그처럼 불리한 급여 조건을 받아들여야 할 만큼 수없이 많은 대체 인력 가운데에 하나일 뿐이라는 점을 반영한다. 따라서, 빈부 격차에 대한 문제 의식은 각자가 파악하는 경제적 위계 속에서 하위에 놓인 개인이 스스로 충분히 존중받고 있지 못하다고 느끼는 데서 비롯하는 인정 욕구상의 불만과 연결되어 있다.


빈자가 자신의 적은 수입, 자산에 대해 느끼는 불만은 그가 그로 인해 물질적으로 열악한 생활 여건에 놓여있다는 사실에만 기초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그가 느끼는 불만은 빈곤함 자체, 적은 수입만을 보장하는 직업의 특성과 낮은 가치 위계가 표상하는 타인의 멸시에서도 기인한다. 빈자들이 기본적인 의식주도 충족하지 못하는 빈국에서는 물론, 최빈곤층도 과거의 부유층들이 누렸던 그것에 비견할만한 상당한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대부분의 선진국 사회에서조차 부의 불평등이 문제시되는 건 이 때문이다. 인간은 단지 부족함없이 삶을 영위할 수 있음에 만족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단순한 생존, '인간다운 삶'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일련의 최소적 요건을 충족하는 이상으로, 타인에 대한 일정한 비교 우위를 확보하며 그를 통해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현대에 들어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상향 평준화됨에 따라, 당장의 생존을 걱정해야 할 만큼의 극단적인 빈곤은 줄어들었고, 이전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수준의 물질적 풍요가 일반화되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일정한 사회적 존중을 얻을만큼의) 남들보다 나은 인간이 되기는 평균적으로 더 어려워졌다. 개개인의 잠재적인 개발 가능성은 큰 틀에서 달라지지 않은 반면, 이미 고도화된 생활 수준은 어지간한 벌이로는 뚜렷한 개선을 체감하기 어려워졌고, 자동화, 전문 분업화의 진행으로 전반적인 산업 현실과 생산 여건이 고도화되면서 고도로 전문화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고급 인력과 그렇지 않은 저급 인력 사이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중에 있기 때문이다. 숙련 편향적 기술 변화skill-biased technological change라 일컬어지는 이와 같은 추세는 경제적 비효율을 빌미로 전통적인 중산층을 부양했던 중간 숙련 일자리를 없애면서 다수의 노동자들을 '모욕적인' 근로 조건의 일자리로 내모는 한편, 많은 보수를 지급하는 가치 있는 일자리에 대한 진입을 소수의 전문 인력들에게만 허락하면서 소수의 승리자들과 다수의 낙오자들을 양산한다.


노동은 단순히 노동자 개개인의 물질적 생활을 부양하는 수입의 원천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개개인이 생산 과정의 대체할 수 없는 일부로 참여하여 기능적인 존재로서의 자긍심을 얻는 경로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생산 과정상의 주요한 결정과 직능을 독점하는 엘리트 직군의 반대편에서, 최소한의 단위로 규격화, 단순화되어 본질적으로 '누구나 수행 가능한' 단순 반복적 업무만을 처리하는 다수 노동자들은 이러한 자기 효용감을 얻기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 그대로 그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구라도 수행할 수 있는 업무이며, 그러한 과정 안에서 노동자 개개인은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부품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고도화된 산업의 트렌드에 합류하지 못한 단순 반복 노동의 종사자들은 그들의 적은 수입만큼이나 그들이 수행하는 몰개성한 노동의 특성으로 인해, 현저히 적은 자긍심의 토대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날드 트럼프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대안 우파 열풍, 유럽의 반-이민, 토착주의nativism 정서가 생산 과정의 전자동화, 인건비가 저렴한 국외로의 자본 이전으로 일자리를 잃고 도태된 노동자 계층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은 경제적 낙오가 사회적 인정 투쟁의 문제로 비화된 최근의 두드러지는 실례라 할 수 있다. 트럼프가 내세우는 고립주의, 미국 우선주의의 전망을 신봉하는 대안우파 운동가들과 외부의 문화적 침입자에 맞서 백인 문명의 정체성을 수호해야만 한다고 강변하는 유럽 문화 전쟁cultural warfare론자들이 공통적으로 표방하는 외부에 대한 격렬한 적대 의식은 그들 자신이 세계화의 긴밀한 사슬로 연결된 타자들에 의해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나 '자기 땅의 이방인'으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사회적 경멸과 무시의 감각에 기인한다.


만성화된 청년 취업난이 좋은 직장에 취직할 능력도 안되면서 스스로 주제 파악을 못하는 청년들 자신에 의해 자초된 것이라는 주장은 그러한 주장 자체의 경멸적인 뉘앙스에 의해서 상황을 악화 시키기만 할 뿐이다.  현실적으로 양질의 일자리는 항상 한정되어 있고 모두가 그런 직장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맞다. 이 점에서 청년들의 비대한 자의식이 문제라는 주장은 일부의 진실을 통찰한다. 비록 적은 보수에 열악한 근로 환경을 가진 일자리라도, 아무런 일도 안하면서 밥만 축내는 것보다는 그런 일이라도 하면서 돈이라도 버는 게 낫다. 하지만 그들을 설득하는 방식이, "너는 어차피 좋은 직장에 다닐 능력이 안되니, 막노동이라도 해라."거나 "X소 기업이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다니"라는 식이 되서는 효과를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들이 더 좋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기약없는 취준 생활을 지속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모욕적인 평가를 피하기 위함에 있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일할 의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자신을 받아줄 일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자리들이 대체로 스스로 생각하는(어쩌면 자신의 객관적인 능력치에 비해 비현실적일 수도 있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취직을 '기피'한다는 지적 자체는 타당하다. 그러나 애초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들 사이에서 널리 합의되는 (즉, 실제 통계상의 평균치가 아닌) '평균' 미만의 급여, 근로 조건 하에서 일하는 것을 일종의 낙오로 간주하는 사회적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고 이때 당면한 현실에 순응하고 스스로의 조건에 맞추어 타협하라는 권유는 그들이 기피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끊임없이 유예하고자 하는 낙오를 이미 기정된 것으로 확정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이는 좌절과 (만성적인) 결핍을 자신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라는 요구로 이해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권유는 이미 개인이 어떤 가치있는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능력을 함양하지 못했다는 부정적 평가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신림역 칼부림 사건을 시작으로 잇달아 일어나고 있는 묻지마 범죄, 테러 행위의 공통점은 범인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된 20~30대의 젊은 남성들이며, 정상적인 커리어, 대인 관계, 이성 관계를 구축하지 못했다는 데서 비롯한 열패감, 좌절감을 범행 동기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인정 욕구상의 불만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한 형태다. 그들의 목적은 자신의 범행을 통해 어떤 동물적 욕구를 채우는 것에 있지 않다. 그들은 공권력에 맞서 자신의 범행을 교묘하게 은폐하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무자비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을 백주대낮에 전시하면서 자신의 악명을 널리 떨치는 자체에 목적이 있다. 즉, 고립되어 잊혀진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한 수단으로써 그들은 범행을 택한 것이다. 이론의 여지가 없는 공개적인 형태의 범행에 대해 쉽게 예견할 수 있는 처벌과 실제 범행에 대해서는 물론, 인터넷 상의 (진짜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범행 예고에 대해서도 선제적으로 엄정한 대처를 공표한 경찰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사한 사례들이 잇따르고 있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그들은 이미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법에 의해 처벌받고 공공의 비난을 받으면서 단절되어 있었던 타자의 시선을 매개로 잃어버렸던 자기에 대한 대자적 인식, 어루만져지는 자기 존재의 실감을 얻는다.


무관심보다는 악플이 낫다는 인터넷상의 오랜 격언이 말해주듯이, 또 스스로도 믿지 않는 노골적인 넌센스를 연출하면서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유도하고 그것을 즐기는 인터넷 트롤troll들의 행태에서 실제로 보여지듯이, 인간은 자주 고독 속에 남기보다는 차라리 타인의 증오에 노출되기를 선택한다. 최근 빈발하는 묻지마 테러 행위는 이처럼 그것이 불특정 다수의 관심을 끌고 한편으로 타인의 심리를 조종하고 있다는 의식에서 잇따르는 얄팍한 자기 효능감을 얻기 위해, 자기의 맹목적인 악의를 선전하는 인터넷 트롤링 문화의 현실적인 연장선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한 일련의 범행들은 범죄자 자신이 자의적으로 구성한 정당성이나 절박한 물질적, 생리적인 필요에 기초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명백한 범죄에 해당한다는 범죄자 자신의 명확한 자기 인식 속에서 치러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터넷 트롤들이 무관심이 두려워 이용자 모두가 증오하는 게시판 상의 악당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처럼, 현실의 고립된 인간들 또한 종종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불특정 다수의 망각과 무시에 대항하여 다수가 무의식적으로 영위하는 일상에 균열을 내고자 의도적인 불협화음을 자아내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정당화된 르상티망, 샤덴프로이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