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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Oct 31. 2023

'나'일 뿐인 '나'라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가.


근대 공동 사회의 개인들이 그들의 생득적인 본질로서 전제되었던 일정한 계급성과 공동체 내부에서 할당받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완성된 개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데 비해, 현대의 이상적인 자아상은 그러한 일체의 외부적 규정을 초월하여 어떤 구획이나 당위에도 얽매이지 않는 유일하고 자가 충족적인 '나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는 '나 자신'과 각자를 고유한 것으로 만드는 '나다움'이 그러한 규정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표현될 수 없는 이상, 공허한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다. 누구나 이미 별도의 조치 없이도 각자의 독립적인 인격과 의식을 가지는 '나 자신'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자가 규정은 실제로는 아무런 고유성을 표상하지 못한다. 즉, 자아의 고유함, 독립성이라는 형식 자체는 이미 개개인에게 동등하게 주어져 있는 (그렇기 때문에) 몰개성한 보편성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현대적 자아상은 도달할 수 없는 실체없는 지향에 대한 강박을 조장하면서 오늘날 두드러지는 존재론적 위기existence crisis를 초래한다. 이는 곧 각자가 '진정한 나'의 모습으로 살고 있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마땅히 이행되어야 할 독립적인 자아상에 기반한 삶의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근거 희박한 상실감에 기초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결여된 주체로 표상되는 외부의 지향에 왜곡되지 않은 철저히 독립적인 실존 - '진정한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라는 것은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일 뿐이다. 여기에는 별도의 관념으로 왜곡할 것이 없다.


과거 개개인의 삶을 직접적으로 규율했던 일련의 공동체적 규범이 해체되면서 현대인들은 각자가 지닌 운명의 주인으로 공인되었다. 결혼, 출산, 가업을 물려받는 일과 같이, 과거에 공동체적 의무의 일환으로 당연시 되었던 많은 것들이, 이제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타인, 사회의 기준에 구애받지 않고 진정한 '나다움'을 추구할 수 있음에 만족하기 보다, 오히려 무엇을 해야만 좋을지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낀다. 왜냐하면 개인이 기성의 전통, 관습이 규정하는 의무 사항에 예속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전통과 관습이 규정하는 보편적인 '좋은 삶'의 기준이 함께 실조 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개인이 외부의 어떤 규율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하며 살 수 있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 이외에, 삶의 이정표로 삼고 따를 것이 없다는 실존적 고립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인간은 결코 자신에 대한 자가적인 승인에 만족하지 않으며, 언제나 타인으로 부터의 인정과 승인을 추구하는 사회적 생물이라는 데에 있다. 인간 개개인의 자존은 단순히 그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에서 비롯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인정, 각 개인의 존재 자체에 특별하고 자족적인 가치가 깃든다는 가정은 바로 그것이 아무런 조건을 설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즉, 자기의 어떤 특정한 일면을 자랑스럽고 가치있게 여긴다고 스스로도 표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공허한 것으로 남는다. 타인이 우러러보고 존중을 표할만한 특질, 비교 우위를 가지지 못한 인간은 스스로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타인을 판단할 때와 마찬가지로, 잘난 것 하나없는 스스로를 판단하는 각자는 그 자신에 대한 존중의 근거를 찾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의 자부심은 그가 남들에게 가치 있다고 공인받는다는 사실, 널리 인정받는 자질, 지위, 명예 따위를 가졌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타인의 인정이라는 기반이 없으면 개인의 자부심은 자기 자신조차도 납득시키지 못하는 공허한 정신 승리, 자기 기만에 불과하게 된다. 일체의 자기 인식은 가장 순수한 경우에도, 인식하는 주체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객관화하면서, 즉, 외부의 시선을 경유한다고 가정하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일찍이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라캉이 옳게 지적했듯이, 개인의 욕망은 단순히 그 개인의 고립된 내면으로 부터 창발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공통적 인식을 기반으로 사회적으로 구성된 가치 위계 속에서 형성된다. 예컨대 개인이 고급 차, 명품 시계, 가방, 좋은 입지에 위치한 넓고 안락한 집, 고소득 전문 직장, 뛰어난 기예, 아름다운 이성과의 관계를 원하고 그것들을 가치있게 여기는 까닭은 그것들이 자신에게만이 아닌, 남들에게도 가치있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차는 네 바퀴가 굴러가기만 하면 교통 수단으로서의 제 기능을 할 수 있고, 집은 들어가서 잠만 잘 수 있으면 주거 공간으로서의 본질에 어긋나지 않는다. 명품 시계, 명품 가방은 아예 브랜드 값만큼의 효용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 각종 앱과 연동되어 작동하는 애플 워치가 수천만원에서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스워치보다 기능 면에서 우월하고 명품 백은 시장에서 파는 5만원짜리 가죽 백과 물성 면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고급'을 추구하는 건 다른 사람들이 그것들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선망하기 때문에, 자신도 그러한 것들을 선망하게 되는 탓이다. 모든 구체적인 실천, 참여가 소비로 표현되는 현대 소비 사회에서 상품은 사물 자체의 객관적인 물성, 사용 가치에 입각해서가 아닌, 사물에 대해 각자가 기대하는 주관적인 체감 효용, 기호 가치에 의해 소비된다. 그리고 이는 개인의 취향 이전에 그것을 (여러 의미에서) '유익한' 것으로 승인하는, 사물을 소비하는 불특정 다수의 공통 경험과 가치 위계 속에서 규정된다. 요컨대, 우리 자신이 무언가를 '내면의 소리'를 따라서 자발적으로 원한다고 생각할 때에도, 실제로 그것은 외부의 선호가 우리 내부에 유입되어 반향을 일으킨 결과인 것이다.


외부의 어떤 명령에도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하고 독립적인 본질을 관철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현대의 이상적인 자아상은 이런 의미에서 허상에 불과하다. 각 개인의 불가침하고 독립적인 자아의 가치를 상정하는 사회적 신앙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실제 우리 각자가 추구하는 좋은 삶의 기준은 결코 사회의 보편 다수가 공유하는 공동의 삶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현대의 개인들은 외부의 어떤 유적 규정에도 구획되지 않는 그 자신 자체가 되기를 기대하지만, 사실 우리 각자가 의식하는 자신은 이미 서로에 대한 기대와 역할 규정에 따라 빚어진 하나의 유적 존재gattungswesen, 사회적 구성물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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