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ritingonthewall Dec 30. 2023

사실이면서 거짓, 또는 아무것도 아닌 것.

가십, 시뮬라크르로서의 뉴스


“우리는 메인 주에서 텍사스 주까지 자기磁氣 전신기를 가설하기 위해 엄청나게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메인 주와 텍사스 주 간에는 전신으로 주고받아야 할 만큼 중요한 게 없을 것이다. ··· 우리는 대서양 바다 밑을 뚫어 구세계(유럽)의 소식을 몇 주 빨리 신세계로 가져오려고 안달이 나 있다. 하지만 거기서 흘러나와 토끼처럼 쫑긋 세운 미국인의 귀로 들어갈 첫 번째 뉴스는 애덜레이드 공주가 백일해百日咳에 걸렸다는 소식에 불과할 것이다."


- 헨리 데이비드 소로 <월든> 중에서.


오늘날 뉴스는 그 각각이 가장 중대한 함의를 표명하고 있는 경우에도, 본질적으로 단순한 화젯 거리, 가십에 불과하다. 오늘날 뉴스는 오로지 빠른 송수신을 위해 본연의 맥락에서 탈락하여 파편화된 정보로서, 즉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한정된 분량의 자극 의미만을 내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는 단지 수용자의 주의를 때마다 환기 시킬뿐 진지한 담론의 매개체로 기능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담론이 일정한 공통적 인식의 기반 위에서 느리지만 치밀한 숙고를 통해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인 반면, 현대의 뉴스는 어떤 의미망의 일부로 파악될 수 없는 그 자체의 표상만을 가지며 빠르고 지배적인 확산을 위해 유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뉴스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전달하기는 하지만, 전해지는 것은 특정한 사실에 관한 일련의 인상들일 뿐이고 거기에 어떤 존중할 만한 관점, 현상을 읽는 통찰을 담고 있지는 않다.


오늘날 각각의 뉴스 보도는 한정된 분량, 간결한 언어, 지향적 대상 규정으로 특징지어지는 뉴스적 형식에 입각하여 사실을 가공함으로써 특정한 사실의 의미 범주를 자기 내부에 제약한다. 다시 말해, 뉴스는 그 자체의 형식에 맞추어 사실을 형해화, 도식화한다. 뉴스화된 사실은 본연의 총체성을 잃고 보도를 통해 직접 표명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나아가, 현대에는 사실 자체의 유일한 의미가 다름 아닌 뉴스를 통해 규정되는데, 이는 본래 개인의 인식, 개별적 관점을 넘어선 총체인 그대로 존재하는 일련의 사실들이 뉴스를 통해 비로소 기호화되어 공공에 발표되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뉴스를 통해서가 아니면 아무것도 알 수 없기에, 사람들은 뉴스에서 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믿는다. 의심하면서도 그것이 팩트를 취하는 실질적으로 유일한 창구인 한 믿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뉴스에 대한 불신조차, 그것을 반증하는 다른 보도를 계기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뉴스는 단일한 관점에 입각하여 편집, 배열된 단방향성, 단극성의 정보이다. 뉴스는 그 내부에 사실의 어떤 단일한 측면으로 이루어진 자폐적인 인식의 지평을 만들어낸다. 또한 사실을 보도한다는 뉴스의 규범적, 형식적 규정은 그 내용을 형식적인 차원에서 '사실화'함으로써 외부의 진정한 현실을 소거한다. 즉, 뉴스 외부의 현실은 '보도된 사실'들의 외부에 위치한 미완의 것으로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뉴스를 보면서는 그것이 말하는 바 이외에 다른 것을 떠올리기가 어렵다. 뉴스는 사실의 의미를 자기 내부에 제약하면서, 그것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와 관점도 함께 제약한다. 사람들은 뉴스를 보면서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대개 보도의 내용 자체에서 유도되는 관점을 되풀이하는 것에 그친다. 즉, '주어진 사실'의 모습이 그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 무엇인지를 결정 짓는 것이다. 가령, 흉악 범죄자의 범행 소식에 분노를, 비극적인 사고 소식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건 자연스러운 판단의 귀결이지만, 한편으로 그러한 정보가 제시되는 양상과 외부 자극에 대응하는 우리의 인지적 기제에서 필연적으로 예증되는 바, 단순한 감응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러한 감응이 정보의 직관적인 표상에서 기인하는 조건 반사적인 것에 그치는 한 우리는 우리가 그것을 느끼고 생각한다는 자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로부터 사실 인식 자체가 아닌, 사실에 대한 어떤 모호한 느낌만을 얻게 될 뿐이다.


뉴스의 빠른 확산을 가능하게 하는 현대의 통신 기술 여건은 이처럼 사실을 파편화, 단순화하는 뉴스의 경향을 더욱 가중시킨다. 일찍이 텔레비전이 그 직관적인 매체 형식에 걸맞는 영상, 이미지 문화를 배양하고 고도의 추상성에 바탕을 둔 문자 문화를 쇠퇴시켰던 바와 같이, 현대의 고속 통신 기술 인프라는 빠른 송수신에 적합한 짧고 단순한 컨텐츠의 생산과 소비를 장려하는 한편, 빠르게 소비할 수 없는 풍부한 맥락과 복잡성을 가진 컨텐츠를 도태 시킨다. 잠깐이라도 멈춰 서 있으면 지루함을 느끼는, 끊임없는 주의 전환을 추구하는 소비자들에게 10초 이상의 영상, 세 줄 이내로 요약될 수 없는 글은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다.


한 시대의 지배적인 매체 형식은 그에 걸맞는 형태의 인간 군상을 만들어낸다. 인간의 다른 모든 기능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주의 집중력도 계속 사용을 해야 퇴보하지 않고 발달하는 기능인데, 더 이상 사람들은 무언가 스스로의 유희를 위해 향유하는 데에도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 결과 이제 장문의 글, 두세시간 분량의 장편 영화를 정해진 분량 내내 집중해서 보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주의깊은 청중은 과거에 비해 소수에 불과하다. 뉴스의 '찌라시화', 단순화 역시 이러한 경향과 궤를 같이 한다. 짧고 산만한 쇼츠 영상, 간결하고 직관적인 밈 이미지가 각광받고 활발히 소비되는 사회에서는 뉴스도 그와 같이 무의미하고 산만하고 맥락없는, 극소화된 자극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도 뉴스를 보지 않을 테니까.


인류사의 다른 어느 때보다, 정보의 유통이 활발한 이 때에 도리어 뉴스가 표방하는 진실성의 권위가 쇠락하고 있는 건 어째서일까? 이는 현대의 통신 기술적 여건 위에서 정보가 유통되는 빠른 속도 자체가 사실을 검증하는 여러 메커니즘을 자연스럽게 무력화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정보의 생산자일 수 있고 모든 정보가 발표되는 즉시 수요자들에게 도달하여 열람될 수 있는 세태에 힘입어 오늘날 뉴스는 정보의 신뢰성을 검증하는 일체의 심의에 앞서 퍼져나가 사실에 대한 지배적인 인식을 형성한다. 즉, 뉴스는 단지 누구나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공공의 현상 인식의 보편적인 측면을 이룸으로써 진실이 된다.


더 이상 뉴스는 실제 현실 세계에 대한 명확하고 구체적인 인식을 제공하지 못한다. 오히려 뉴스는 각각의 단편적인 정보에 입각한 가상적인 현실의 상을 만들어낸다. 근본적으로 뉴스는 '사건'이라 일컬을 만한 무언가, 흔히 있지 않거나 중대한 사회적 함의를 담은 일을 보도하는 매체이다. 그러나 뉴스가 포착하는 그러한 '이상성'은 보도를 통해 미디어 상품으로서 재생산됨에 따라 본연의 함의를 초월하여 도처에 편재하는, 한 사회의 지배적인 상징 기호로 자리매김한다. 즉, 하나의 이상 현상, 국소적 특이점에 지나지 않았던 일이 뉴스로 가공되어 확산 되면서 그것이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는 과장된 현실 인식을 만들어낸다. 사실 자체가 아닌, 사실로 부터 파생된 기호가 도리어 현실을 뒤덮고 장악한다. 그리하여 뉴스를 통해 구현된 가상이 우리가 인식하고 사유하는(또는 그래야만 할) 현실의 진정한 모습으로 간주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일 뿐인 '나'라는 것은 얼마나 공허한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