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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Dec 07. 2023

<서울의 봄> 단평


개봉 전 캐스팅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실제로 전두환, 장태완이라는 핵심 모티브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 약점이 뚜렷했지만, 그럼에도 꽤 괜찮은 캐릭터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황정민의 전두광은 황정민 특유의 쿠세가 역력한 나머지, 그가 <수리남>에서 맡았던 (또 다른 독재자 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전요환이 오버랩되고 정우성의 이태신은 배우의 빈약한 발성이 캐릭터의 카리스마를 깎아먹은 감이 있지만, 둘다 실존 인물인 전두환, 장태완 자체가 아닌, 그 둘을 모티브로 해서 재창조한 인물이라 생각하면 못봐줄 정도는 아니다. '연기 못하는데 얼굴 뜯어먹고 사는' 배우의 대표격으로 꼽히는 정우성은 오히려 그간의 악명에 비하면 꽤 괜찮은 연기를 보여줬다고도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만듦새가 괜찮은 영화다. 12.12 사태의 구체적인 진행 과정을 충실하게 짚어나가면서도 늘어지는 부분이 없고 알만한 과정을 거쳐 예정된 결말을 향해가는 시대극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매 주요한 국면마다의 서스펜스가 있다. 양 진영의 관점을 동시다발적으로 교차해서 보여주는 편집의 '과도한' 현장감이 암시하고 있듯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의 재연이라는 필연성의 관념에 구애받기 보다, 일체의 사태를 극 안에서 각개의 분기점을 거쳐 현행하는 드라마적 과정에 가까운 것으로 제시한다. 결말에 이르기까지 전두광 일파의 음모는 계속해서 전복될 위기에 직면하게 되고, 무능한 아군들 사이에서 분투하는 이태신은 언뜻 불가능한 승리를 거머쥘 것처럼 보인다. 광신적인 환희가 섞인 우격다짐으로 자기 파벌을 휘어잡는 전두광을 보고 있노라면 비호의 여지가 없는 악역임에도 불구하고 꽤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이 정도의 카리스마가 있었으니 이런 무모한 계획을 성사시킬 수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소위 '역사 의식'이라는 게 없이도 재밌게 볼 수 있는 영화다.


다만, 국내의 시대극이 대개 그렇듯이 역사에 대한 관점이 근본적으로 나이브하다는 한계에서 이 영화도 자유롭지 못하다. 말하자면 <서울의 봄>은 역사를 인물의 야성passionarity에 기반한 개인적 결단의 연속으로만 볼뿐, 일체의 역사적 사건과 행위를 배후에서 조성하는 구조적 맥락에 대한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서울의 봄>은 극중에 재현되는 역사적 사건의 단계를 철저히 인물을 매개로 추동해 나가며, 일체의 변곡이 개인의 카리스마와 결단을 통해 초래되는 것처럼 묘사한다. 마치 그들이 없었다면 결코 그와 같은 사태가 일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군사 반란이라는 거대한 사건의 얼개가 오로지 특정한 악인들의 야욕과 방관자들의 무능함을 통하여 완성된다. 그리하여 영화가 겨냥하는 역사의 불의에 대한 문제 의식은 철저히 그것에 관여한 개인들에게 국한된다. 당초, 어떻게 전두광과 같은 인간이 군부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결국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체계적인 반성은 영화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다시 말해, 전두환과 하나회의 존재가 본래라면 있을 수 없는 '역사적 특이점'에 불과하지 않고 당대 체제의 모순과 한계를 양분삼아 자라난 괴물임을 영화는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런 전사前史없이 문득 나타나 단지 분노를 자아내기 위한 용도로 소모되는 인물들의 죽음은 그 의도가 지나치게 투명한 탓에 시쳇말로 '짜치다'는 인상이 앞선다.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은 우리가 전두환에 대해 갖는 인식과 같이 오만하고 야욕에 찬 악인이고, 그 반대편에 선 이태신은 (실존 인물 장태완에 대한 세간에 인식과 같이) 전략적인 열세에 놓인 상황에서도 반란군에 맞서 국가에 대한 충절을 지키려하는 모범적인 군인이다. 그러나 두 인물의 선함과 악함은 각자의 타고난 본성인 것처럼, 또는 영화를 보는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미리 전제하고 있을뿐, 그러한 각각의 기질이 어떤 경위에서 형성되었는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영화는 전두광과 이태신이라는 별도의 인물을 내세우고 있음에도 그 모티브가 된 실존 인물들에 대해 우리가 이미 공유하고 있는 확신에 의존하기만 할뿐, 극중 캐릭터의 바탕이 되는 자체의 맥락을 형성하지 않는다. 요컨대, <서울의 봄>은 기정된 역사적 인식에 기인하면서 그것을 재확인하는 데에 그친다. 영화를 보고 우리는 전두환과 하나회 일당의 악랄함과 비열함에 대해 이미 수없이 공인된 분노를 토로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을 느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의 봄>은 그 오락적 재미와 시대극으로서의 특성을 감안하더라도 진부하기 짝이 없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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