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Writingonthewall
Feb 16. 2024
진정한 냉소의 의미
쿨찐, 인터넷의 냉소주의에 대한 소고
인터넷 상에서 대개 논쟁의 승패는 누가 옳은 주장을, 설득력 있는 논증을 펼쳤는지로 결정나는 게 아니라, 누가 먼저 '긁히는지'에 따라서, 즉, 어느 한쪽이 감정적 동요를 드러내는 시점에서 결정된다. 인터넷이 본질적으로 '현생'과는 구분되는 가상 공간에 지나지 않는 이상, 그 안에서 각자의 '진심'을 드러내고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 자체가 부질없는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현실의 도덕칙을 기준삼아 무언가를 비판하는 이른바 '선비질'이 다수의 인터넷 유저들 사이에서 부정적인 뉘앙스로 인식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의 이야기다. 본디 인터넷은 순수한 흥미 본위의 공간이고 언제까지나 그런 공간으로 남기 위해서라도 '과몰입'은 지양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어떤 것을 진지한 대상으로서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것이 곧 각자가 지켜야 할 중심으로 자리잡기 십상이고, 그러면 그로부터, 그것에 대항하는 것으로 부터도 적절한 거리를 두고 즐길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어떤 가치도 진지하게 신봉하지 않는 듯 하면서 온갖 것들에 조롱과 냉소를 일삼는 현대의 유독성 인터넷 문화, 특히 '쿨찐'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의 번성은 이처럼 진정성의 표현 일체를 '부질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관점에서 연유한다. 모든 것이 하나의 놀이에 불과한 인터넷에서는 진지한 사람이 바보다. 왜냐하면 실제로 거기에 진지하게 대할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사실은 그 안에 직접 현전presence하는 사실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터넷에서는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솔직할 수 있고 사회적인 금기를 넘나드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터넷에서는 무엇을 해도 괜찮다. 인터넷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언행은 떠다니는 말과 이미지에 지나지 않을 따름으로 결국 거기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야만 한다'고도 할 수 있는데, 탈권위는 오로지 권위로부터의 일탈에서 표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상을 파괴하는 데에 앞장서야지만, 그것을 공허한 우상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는 자기의 생각을 관철할 수 있고, 견유주의자는 고작 나무통 하나를 제 집 삼아 살았다는 디오게네스의 일화처럼, 만물을 개의 눈높이에서 덧없는 것으로 보는 견유cynic의 태도를 체화하고 실천해 보임으로써 비로소 견유주의자일 수 있는 법이다.
다수의 인터넷 유저들, '쿨찐'들은 무례함과 구분되지 않는 자기의 '가식없음'을 사랑한다. 이들이 서두마다 단정적으로 붙이는 정보), 팩트)와 같은 접두어는 실로 그 자신이 어떤 사회적 허식에도 얽매이지 않은채, 사실만을 전한다는 자부심을 의미하고, 이들이 만들어낸 '알빠노'(남의 입장이 어떻든 내 알 바가 아니다), '누칼협'(누가 그거 하라고 칼들고 협박함?)과 같은 신조어는 타인에 대한 동정, 전인적인 이해를 단지 합리적인 판단을 저해하는 감상적 접근으로만 여기는 나름의 신조를 표현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가식없음' 자체가 이미 하나의 가장에 지나지 않는다. '쿨찐'들의 습관적 냉소, 일체의 감정적 동요의 증상을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표상되는, 언뜻 '쿨'해보이는 외연은 진정 그들이 모든 것에 초연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는 자아의 연약함에서 비롯한다.
진정 모든 것에 초연한 인간은 스스로의 '초연함'을 선전할 이유가 없다. 불교에서 가장 권위있는 경전 가운데의 하나로 인정받는 <금강경>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면 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한 것이다." 스스로의 '깨달음'을 자부하는 자는 바로 그 때문에 자기애를 포함한 일체의 집착과 번뇌를 초월함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와는 멀어지게 된다는 것인데, 그러한 '자기 표현'은 자기가 남들에게 보여지는 방식에 대한 기대와 그 양상을 통제하고자 하는 욕망, 내지는 노골적인 자의식에 바탕을 두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차가운' 무정동의 상태, 완고한 합리성을 표방하는 오늘날 인터넷상에서 지배적인 냉소주의 역시도 결국 그것이 일체의 정서적 표현을 인간적인 취약함의 일환으로서 수치로 간주하는 내면의 불안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내생적인 한계에 직면한다. 즉, 정서의 억압이라는 목적 의식은 실상 그 표출을 두려워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기는 또 다른 정서적, 무의식적 정신 작용을 통한 모순된 동기에 기반한다. 모든 이상을 비웃는 냉소주의는 그러한 냉소 자체를 당위 규정화하면서 실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이상인 것으로 전락한다. 다시 말해, 냉소조차도 냉소적이지 못한 현실에 대항해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이 된다.
표층 의식 상에서의 정제된, 신중한 사유의 표현을 상징하는 '차가움'이라는 미덕은 그 반대편의 리비도적 무의식의 역동, '뜨거움'을 경멸하는 대립의 도식 안에서 성립한다. 그러나 이러한 도식 자체가 자기의 개인적인 격정, 스스로도 통제할 수 없는 무의식적 충동의 존재와 그 표출을 보편적인 당위의 차원에서 부정하는, 그러면서도 자기 내면의 혼돈을 외면할 수 없어 번민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불완전성을 표상한다. '쿨찐'들은 타인의 '뜨거움'을 어리석음의 소산인 것과 같이 비난하고 조롱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반응이 곧 그들이 지닌 격정의 증상이다. 이는 완전한 합리성, 항구적인 감정 평형 상태를 골자로 하는 그 자신들의 이상화된 자아상을 척도로 하는 비판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아의 내적 완결성이라는 이상은 그 반대편의 무분별하고 통제 불가능한 불안의 상태를, 그 가능성을 자기의 내외에서 의식한다는 전제에서만 수립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스스로를 우매한 군중들과는 대조되는 지극히 합리적인 지성의 모범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실상 그들이 표방하는 격정에 대한 경멸이야말로, 거세할 수 없는 인간성의 한 측면에 대한 비현실적인 가정에 근간을 두고 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진정 '쿨'할 수는 없다. '쿨'할 수 없기에 ''쿨'해져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될 뿐이다. 인간의 감정은 개개인이 어떤 것을 얼마만큼 선호하고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지를 직관적으로 표현하고 가치 판단을 매개하는 일종의 사회적 신호 체계로서, 타인과의 교류와 연대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동물로서의 근본적인 특성에 기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은 단순히 개인의 내면에서 창발하는 주관적인 느낌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희노애락의 대상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생각과 느낌을 가지고 공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사회적 가치 판단의 지표이기도 한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슬픈 일, 기쁜 일, 즐거운 일, 분노해야 마땅할 일 각각을 분류함에 있어서 일일이 이치에 비추어 판단하기 보다 각각의 사건이 스스로에게 직관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기반해서 판단한다. 나아가, 감정이 없이는 우리는 외부의 다른 어떤 것과도 스스로를 연관지을 수 없다.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의 속성은 그것들의 작용과 침투에 대응하는 우리의 감정적인 반응을 통해서 우리 자신에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어떤 것도 좋거나 나쁘게 느껴지지 않으면,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떤 것에도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따라서 '쿨'하다는 건 공허하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로 의미란 사태의 객관적인 양상 자체가 아닌, 그 주관적인 구성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