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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onthewall Mar 15. 2024

<조커>의 '조잡한' 주제 의식에 관하여

영화의 주인공 아서 플렉은 그냥 이상한 사람이다. 코미디언을 자처하지만 남을 웃길만한 재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불쾌한 유머 감각을 지녔고, 상습적으로 망상에 시달리며, 남들이 웃을 때는 웃지 못하다가 남들이 웃지 않을 때는 혼자 발작적으로 웃음을 터뜨린다. 그의 통제할 수 없는 웃음은 코미디언이라는 이유모를 지망과 더불어, 그가 가지는 웃음 자체에 대한 강박과 남들과 같은 감정선,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를 가지지 못하는 그의 이질적인 본성을 암시한다. 그가 실패한 코미디언, 광대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다. 남들이 왜 웃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웃길 수도 없는 것이다. 그는 모두가 자신을 경멸하고 무시한다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으나, 실상 그가 느끼고 겪는 소외는 근본적으로 아서 플렉이라는 인간이 누가 보기에도 불쾌한 인간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영화는 자연인 아서 플렉이 우리가 익히 아는 '조커'로 변모하는 타락의 서사를 의도하고 있지만, 기실 아서 플렉은 처음부터 우리가 아는 '조커'의 본질, '광기'를 이미 함양하고 있다. 아서가 첫 번째 살인부터 자신의 살인 행각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다는 사실에 쾌락을 느끼는 묘사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심리 상담과 약물 치료도 그에게는 아무런 효험이 없고, 아서 본인도 치료 과정에 순응하지 않는다. 조커는 스스로가 '병적임'을 대외적으로 긍정한다는 점에서만 아서와 다르다. 따라서 아서의 '웃음 강박' 증세는 그가 조커가 되면서 사라진 게 아니라, 단지 특유의 입 찢어진 광대 분장을 통해 조커의 기본적인 정서 상태로 이행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아서의 타락은 영화에서 묘사되는 일련의 사건, 계기의 누적으로 완성되는 것이라기 보다, 그의 타고난 본성 자체에서 운명적으로 예시된 것에 가까워 보인다. 그가 사는 곳이 고담이 아닌 다른 곳이었다거나 머레이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조커'는 언젠가 '조커'가 되었을 것이다. 아서에 대한 타인의 냉대는 다름 아닌, 그의 문제적인 기질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는 타인의 친절과 인정을 갈구하지만, 타인의 환대를 받을 만한 자격이 못되는 인물이다. 그런 아서 플렉을 자신들의 리더로 추대하며 폭동을 일으키는 군중의 입장도 별반 다르지 않다. 고담 시의 빈민들과 아서 플렉, 양자 사이의 정서적 공명은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낙오되었다는 공통된 감각에 기반하지만, 어느 쪽도 그런 소외를 자아내는 낙후된 삶의 조건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도취적인 흥분 속에서 그것을 더욱 파탄에 몰아넣으려 몰두할 따름이다.


언젠가부터 당연시되고 있는 <조커>의 비평적 명성은 상당부분 사회적 고립과 소외가 개인의 본성을 뒤틀고 악을 잉태시키는 일종의 사회 구성적 조건을 고찰했다는 평판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에서 문제가 되는 건 평범한 인간을 악인으로 만드는 사회적 조건이 아닌, 루저들의 처참한 자기 객관화 실패, 메타 인지 능력의 결핍이다. 웃기지 못하는 코미디언을 좋아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회에서 1인분만큼의 기여조차 못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없는 성인을 무조건적으로 동정해주는 사회는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사랑받을 수 없는 자태로 사랑받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러고는 아무도 자신에게 호응해주지 않음에 배신감을 느끼며 세상에 대한 증오를 키워간다. 즉, 영화는 의도된 문제 의식과는 정반대의 인과 관계를 표현한다. <조커>에서 악인은 소외와 무관심을 통해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처음부터 악인이기 때문에, 소외와 무관심을 겪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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