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어떤 오리지날리티도 근본적으로는 기존에 있던 것을 변주, 재배열한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적어도 각 분야에서 '클래식'이라 일컬어지는 몇몇 작품들을 제외하면 그렇다. 현생 인류종이 지상에 등장한지가 4만년이 넘었고, 예술, 창작의 역사도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그쯤 된다. 목탄으로 그린 동굴 벽화부터 시작해서 수십억 달러 들여 세우는 마천루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이 마찬가지로 수많은 유, 무명의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소위 '먹히는' 작품의 공식, 예술적 향유를 가능하게 하는 장르적 패턴 역시도 이미 누군가가 종류별로 다 만들어놨다. 실로 우리가 '장르'라는 범주에 기대어 작품들을 분류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이목을 끄는 작품의 매혹성이 그 자체의 진정한 유일성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닌, 각각의 일정한, 널리 공유되는 양식에 기인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의 철두철미한 오리지날리티를 비평의 척도로 삼는 것은 비평적으로 무의미하고 예술에 대한 자기의 무지함만 드러낼 뿐이다. '클리셰'cliche는 실제로 빈번하게 동원되고, 그럴 만한 효용이 입증된 것이기에 '클리셰'인 것이다. 존 포드, 세르조 리오네 이후의 어떤 서부극도 이 두 거장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포스트-포드, 리오네 시대의 서부극이 모두 리오네, 포드 영화의 아류인 것만은 아니다. <스타워즈 : 새로운 희망>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 <매그니피센트 7>(황야의 7인)은 7인의 사무라이의 플롯, 구성을 그대로 빼다박은 영화이지만, 이들 영화의 위상은 단순한 아류의 것에 불과하지 않다. 록 음악은 록큰롤이라는 말이 있기도 전의 블루스, 로커빌리 선배 뮤지션들에게 빚을 지고 있고 헤비메탈 장르의 본령은 블랙 사바스, 레드 제플린, 딥 퍼플, 이 세 그룹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퍼포먼스, 비주얼을 전면적으로 내세우는 요즈음의 아이돌 음악은 스파이스걸스, 데스티니 차일드, 백스트리트 보이스 같은 그룹들이 앞서서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줬기에 오늘날 주류가 될 수 있었다. K-POP은 서태지와 아이들, 현진영, 클론, 듀스와 같은 당대 댄스 가수들의 성공과 일본 아이돌의 비즈니스 모델에 착안해서 만들어졌고 요즘의 K-POP은 K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하우스, 이지 리스닝, 힙합 등 서구 전자 음악의 조류를 충실히 따른다. 앨범 크레딧을 보면 한국인이 쓴 곡보다 외국에서 사온 곡이 더 많을 정도이다. 바로크, 로코코, 르네상스, 모더니즘이라는 구분이 당대 예술적 조류를 일컬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세대 구분으로까지 통용되는 까닭은 그때 실제로 거의 모든 예술가들이 자기 시대의 지배적인 양식을 따랐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이 선행하는 조류, 공식을 따르는 건 오늘날 모두가 피쳐폰을 내다버리고 스마트폰을 쓰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지배적인 트렌드에 영합한다는 이유만으로 예술가에게 표절이라는 낙인을 찍는 사람은 없다시피 하다. (줏대없고 대중 영합적이고 자가 복제적이라는 말은 들을 수 있겠지만) 상위 티어의 기술이 그 유용함에 의해 다수의 선택을 받게 되듯이, 유행이란 것 역시 그 주관적인 체감 효용의 총량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면 왜 어떤 작품은 대세를 따름에도 불구하고 나름의 독창성을 인정받고 어떤 작품은 단순한 복제품으로 폄하되는가. 장르적 경향성을 넘어, 개별 작품의 구체적인 인상을 이루는 요소들, 예컨대 각각의 멜로디, 문장, 구도를 모방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이야기는 간단해지지만, 실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인간의 뇌 구조, 인지 도식은 큰 틀에서 뚜렷한 개체 차이를 가지지 않고, 그래서 보편 다수에게 고르게 미학적 쾌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자극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지 않다. 따라서 어떤 예술 분야에서도 소위 '정석'이라는 것은 존재한다. 무엇이 바른 문장이고 무엇이 바른 인체 비례의 묘사인지, 듣기에 유쾌한 음조의 조합, 배열인지, 자연스러운 화상의 연결인지, 관련하여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도 어렴풋이 직관적인 호오를 느낄 수는 있다. 정규 음악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버디 리치의 드러밍과 어린 아이의 젓가락질 장단 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느끼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리고 대개 예술 작품의 구성은 이렇듯 어렴풋한 직관을 통해 구획되는 정석 안에서 결정된다. 막장 드라마, 웹툰, 웹소설, 트랩 음악, 핀업걸 이미지가 널리 소비되고 많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각각의 개성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각각이 판에 박힌 전형의 한 사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도식, 전형을 깨부수면서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아웃라이어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변칙은 결국 기성의 규칙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규칙을 증명하는 예외에 불과하게 된다. 충분한 설득력을 지닌 변칙은 머지 않아 또 다른 규칙으로 자리하게 된다. 근대성(당시에는 '현대성'이었던)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 포스트-모더니티가 결국 현대성의 당연한 일부가 되어버린 것처럼, 누벨바그, 누보로망이 더는 새롭지Nouve- 않게 된 것처럼.
그러므로 오리지날리티는 오직 자기만을 모범으로서 따르는 철저한 자기 동일성에서 기인하는 것이기보다 기존의 것들을 재발견함으로써 형성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최초의 것으로서의 개성이라는 관념은 허상에 불과하다. 예술에서 오리지날리티를 구축하는 일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신적인 창조의 일환이라기보다 저평가된 우량주를 매수하는 일과 같다. 예컨대 뉴진스가 위대한 이유는 Y2K, 밀레니엄, 레트로, 블록코어, 이지 리스닝이라는 컨셉을 처음으로 선보여서가 아니라, 아무도 그것들을 주목하지 않았을때, 그것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복고', 즉, 돌고 도는 유행 속에서 끊임없이 과거가 재구되는 것은 과거의 유산이 그야말로 지금은 현전하지 않는 과거에 바탕을 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지금, 이곳에 없기에, 과거의 향수는 지금, 이곳에 소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홍콩 느와르, 무협 영화, 펄프픽션pulp-fiction 문학에 대한 레퍼런스, 오마주로 점철된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가 오늘날 힙하게 받아들여 지는 건 <무간도> 시리즈를 끝으로 홍콩 영화가 유행의 첨단에서 동떨어진 요즘에 이르러서까지 홍콩 영화적인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박찬욱이 말했듯, <존 윅>을 베끼는 건 범죄지만, 히치콕의 <현기증>을 베끼는 건 영화사적인 사건이다. 왜냐하면 이제와서는 극소수의 시네필말고는 아무도 히치콕 영화를 안보기 때문이다. (double image, dolly zoom이 뭔 말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정재, 황정민 주연의 <신세계>는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대부>, <무간도>, <도니 브레스코>, <흑사회> 등 온갖 마피아 느와르 영화에서 플롯과 설정을 차용한 영화이지만, 그 장르 영화적 완성도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좋은 '옛 것'들을 발굴해서 적소에 써먹는 것도 엄연한 능력인 것이다.
반면, 사람들이 아일릿을 오리지날하다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그들이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이제는 모두가 익숙하고 그 가치를 알아보는 '뉴진스스러움'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전에 없이 새로운 걸 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지 않다. 진정한 문제는 아일릿이 표방하는 나름의 '새로움'이 이미 현대의 소비자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나머지, 새롭다는 인상을 주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유사한 컨셉과 안무 동작을 차용할 수는 있다. 어차피 뉴진스도 '멕진스' 논란에서 보여지듯, 레퍼런스, 유사성 문제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엄밀하게 말하면, 아일릿과 뉴진스가 말 그대로 모든 면에서 닮아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리 아일릿을 저평가하더라도 Magnetic과 Hype Boy, Attention을 똑같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뉴진스가 밀레니엄, 버블 시대의 아련한 풍요의 향수를, 일련의 비동시성을 지금, 이 시점에 소환해 현대적 키치의 어떤 전범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 아일릿은 그러한 이미 기성의, 현대적인 것이 되어버린 코드를 단순히 모방한다는 점에서 '짭진스'라는 오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짭진스' 논란에 대한 빌리프랩의 장황한 해명은 변호의 여지가 없는 악수였다. 빌리프랩은 자사의 아이돌 아일릿과 뉴진스 사이에 지적되는 유사성의 요소들이 뉴진스만의 것이 아닌, 업계 전반에서 쓰이는 일종의 '공공재'임을 타 그룹들의 사례를 들어가며 옹호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적하는 뉴진스와 아일릿 사이의 유사성은 안무의 한 동작, 사진 하나의 구도에 개별적으로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룹 활동 전반에 걸쳐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해명은 제기되는 의혹의 정당한 논점을 벗어나 있다. 유사한 안무를 차용할 수 있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의상을 입고 촬영을 할 수도 있다. 유사한 컨셉을 표방하고 유사한 구도와 색감, 감성으로 그룹의 이미지를 구축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유사성들이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일치에 불과하지 않고 일련의 양식으로서 상호 연관을 이루고 있다면, 원본에 대한 노골적인 모방임을 의심하지 않기는 어렵다.
무엇보다 자기네들이 만든 그룹의 독창성을 구태여 해명하고 규명하겠다는 그 발상부터가 유행을 선도해야 할 아이돌 기획사의 방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저질이고 힙하지 않다. '프레젠테이션'은 양복쟁이, 넥타이 부대의 방식이지, 창작가의 방식이 아니다. 정말 아일릿이 뉴진스와는 전혀 별개의 독창성을 가진 그룹임을 믿게 하고 싶은가? 그럼 여러 말할 것도 없이 그저 앞으로의 활동을 통해 보여주면 된다. 소녀다운 순수함 운운하며 그룹의 기획 의도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아이돌 그룹은 보고 듣고 느끼는 대상이지, 설명되고 입증되어야 할 논제가 아니다. 빌리프랩은 왜 창작자들이 작품의 의미를 해설해달라는 요구에 "독자, 관객의 상상에 맡기겠다."는 상투적인 어구를 쓰며 설명을 거부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설명되는 순간, 작품은 더 이상 작품인 자체로 남지 못하고 해석의 대상, 납작한 텍스트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재미가 없어지고 고유의 신비가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