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사람 그림 보여줄 사람 없어요?
아들의 학교 온라인 수업 중, 열린 방문을 통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 그린 거 보여주세요.’
‘전 안 그렸어요. 안 할래요’
‘아무도 사람 그림 보여줄 사람 없어요?’
그 날 줌 수업에선 아무도 사람을 그리지 않았고, 아무도 화면에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깜짝 놀랐다. 사람 그리기 어려워 하는 아이가 바로 내 아들? 미술학원 원장 아들?
(난 미술선생이지만 사실적 형상만을 그릴 뿐, 창의적 그림을 그리지 못하여 늘 아이들 그림에 주눅이 든 선생임을 이 참에 고백한다.)
도대체 사람그리기에 왜 이렇게 안절부절할까.
“주호야, 왜 사람그리기를 안했어?”
“사람을 그리는 건 최고 난이도 그림이야. 난 똑같이 못 그려. 애들이 놀릴거야”
그토록 사실적인 그림만이 ‘미술’이 아니라고 말해 왔는데, 사람은 사진처럼 똑같이 그려야 잘 그린 것이라고 진리처럼 받아들여진 이 현상이 답답했다. 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동안 난 뭘 한건가.
다음 날 아들에게 다시 물었다. (사람을 그려보자고 했다)
여러 말을 건내봤다. 그러니까 수업으로 치면 ‘동기부여. 난 지금 이 꽉 막힌 답답한 아들의 마음을 해방 시켜줘야 겠다 싶었다. 사람그리기 공포증에 걸리기 전에.
“주호야 사진처럼 똑같이는 엄마도 못 그려. 그리고 넌 충분히 너의 방식대로 그렸을 때 그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 너의 그림은 개성있어. 엄마는 너의 창의적인 그림에 늘 감동받았어. 한 번 그려보까?”
“..싫어.. 싫어.”
“너의 그림은 마치 미술가 같았어." (진심이었다)
”마티스 같았고, 피카소 같았어.” 주호는 마티스와 피카소 전시회를 다녀왔고 그들의 그림스타일을 조금 느끼고 있었다.
“마티스와 피카소가 사진처럼 똑같이 그렸니?
“.. 아니지.”
아들은 내키지 않은 듯 하다가 이내 그림을 그렸다.
조금 멈칫 하다가 단숨에 3~4장을 그렸다. 나의 모습, 임신한 여자, 우리집 강아지 랑이, 안경 쓴 자신의 얼굴을 순식간에. 중간부터는 콧노래도 부르기 시작했다. 붓펜으로 슥 슥 부드럽고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그림을 못 그렸던 이유는 단 하나. 사실적으로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부담’이었다.
똑같이 그려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지자, 긴장이 풀리고, 힘을 빼자 선은 자유로웠다. 연필 대신 붓펜을 들었다.
지우개도 필요없었다. 내 식으로 그릴거니까.
그 날 느꼈다.
사람그리기 이거 보통 아니구나. 아이들의 심리적 부담감
. 미술 좀 해온 아이도 이런데. 엄마들이 사람그리기 수업을 요청하는 것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난 사람을 그릴 줄 알아야 한다는 엄마들의 요구와 목적에 늘 생각이 많았다. 내가 아들과 나눈 대화를 통해 사람그리기 공포증 없애기에 조금이나마 실마리를 열어주었길 바란다.
물론 이정도 말로는 안 먹히는 아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미술교육원에서 배우는 것도 방법이다. 나의 교육원에서는 다양한 주제로 사람그리기를 접근한다. 꼭 사람을 그리는 시간이 아니어도 사람은 주연이든, 조연이든 등장한다.
어쩌면 늘 ‘사람그리기’는 미술의 큰 테마다. 사람을 그리는 것이 많은 미술가들에게도 인생테마였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미술가들의 다양한 형식과 표현의 사람 그림을 만나지만, 사실 미술가들도 사실적으로 사람을 그려왔었다.
사실적인 사람그리기에서 크게 변곡점을 맞이한 건 사진기의 발명 이후다. 사진기가 현실의 재현의 역할을 해버리자, 미술가들은 일자리를 잃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미술가들은 형태의 재현에서 벗어나 내면을 탐구하고 그리기 시작했다.
사진보다 더 많은 것을 정확히 담으려 했던 고전 미술가들의 그림은 점점 사라졌고, 형태와 색의 자유를 맞았다. 미술가들은 인간의 내면을 적극 바라봤고. 개성 넘치는 미술을 꺼냈다. 오히려 사실적이지 않아서 그들의 그림은 우리들의 가슴을 울리지 않는가.
인물그리기에 대한 접근이 난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적인 그리기에 집착하기 보단, 자신만이 느낀 인상을 편히 담아보는 것. 비율과 형태에 집착하다가는 그 인물의 진심을 하나도 담아내지 못할 지도 모른다. 허울만 있는 그림에 아무도 감동하지 않는다.
자신만이 그릴 수 있는 사람그리기로, 사람그리기의 이해를 바꿔보면 어떨까.
그런데 혹시 아이들은 미술가가 아니니까, 지금은 연습하는 그림을 그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어린이때만 그릴 수 있는 그 감정 그 생각은 과감히 버려도 되는지 묻고 싶다. 어린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데 말이다.
교육원에서 아이들과 엄마들이 사실적으로 그렸을 때, 실제랑 똑같은 것 같다며 만족해하고 좋아하는 것을 많이 봐았다. 그런데 이것을 사람그리기의 완성형으로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오히려 어린 아이들의 순수한 그림은 보는 사람을 끌어당긴다. 직관적인 인물 표현은 마치 그 사람의 진면목까지 알아보는 눈을 가진 듯 하다.
어린이가 보고 느낀대로 표현하는 그림은 미술가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그림을 그리는 ‘눈’이었으니까.
“난 어린아이의 눈을 갖고 싶다.”(바실리 칸딘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