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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나 Nov 24. 2023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밤

"엄마도 어릴 때 무서움 많았는데.."


8살 딸은 매일 밤 잠들기 전 깜깜해진 방 안에서 언제나 놀란 큰 눈으로 매일같이 내게 말한다.

"엄마, 무슨 소리 들리는 거 같아."

"윗집 소리일 거야. 우리 집 문, 창문 다 잠겄잖아. 괴물도 뚫고 못 들어와. 엄청 단단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자자."

잠들기 전 한참을 생각하다 자는 건 나랑 너무나 닮았다.

"엄마, 자꾸 소리가 들리니까 잠이 안 와."

소리 때문에 무서워 잠을 못 자는 딸아이의 마음을 달래주고자 나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해줬다.

"엄마도 어릴 때 잠자기 전에 다정이처럼 엄청 무서워했어.."


8살쯤 집이 좁아 나와 내 동생은 안 채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할머니와 같이 잤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 홀로 방이 3개 딸린 집에서 홀로 자는 게 아버지는 신경이 쓰이셨던 것 같다. 이제 초등학생이 되었다는 이유로, 몸이 커져서 다 같이 한 방에서 자기 힘들다는 이유로 유치원 생인 막내 동생만 남기고 매일 밤이 되면 우리를 할머니 집으로 보내셨다. 할머니 집은 짙은 색의 나무로 마룻바닥과 기둥이 되어 있어서 낮에도 어둡게 느껴졌다. 마루를 걸을 때면 매번 드드득, 드드득 나무 바닥이 서로 뒤틀려서 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새벽에 밭으로 나가셔서 저녁에야 돌아오시는 할머니는 피곤하셔서 밤 8시가 되면 불을 끄고 주무셨다. 나와 동생은 밤 8시가 되면 할머니 집으로 가서 할머니와 함께 셋이 나란히 누워서 한 이불을 덮고 잤다. 일찍 시작한 할머니 집 밤은 다른 곳보다 더욱 깜깜하고 고요했다. 그곳에서 매일같이 들리는 소리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돌아가다가 갑자기 멈추는 소리, 특히 마룻바닥이 쩍쩍 뒤틀리는 소리는 유독 심했다.

'누군가 마루를 지나가는 게 아닐까.'

'냉장고 가까이 누가 있나, 왜 멈췄지.'

깜깜한 천장을 보며 늘 무서운 상상을 하다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고 나서야 잠이 든다.

할머니와 함께 잤던 첫 일주일은 매일 밤 주무시는 할머니를 깨워야만 했다.

"할머니, 할머니. 무서워. 무서워서 못 자겠어."

"어이구, 뭐가 무서워. 아기처럼 매일 그러면 어떡하냐.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얼른 자!"

원래 성격이 투박하신 할머니는 단호하고 큰 소리로 조용히 하고 자라며 나무라셨다.

그렇게 할머니께 혼나며 훌쩍이며 잤었는데 그 후로 일주일쯤 뒤 할머니 집에 갔는데 늘 꺼져있던 TV가 환하게 켜져 있고 할머니는 늘 주무시던 방 안쪽 벽 근처가 아닌 문 쪽 가까이에서 나와 동생이 안으로 들어가 잘 수 있는 공간을 남겨 두고 주무셨다. 그날 이후 우린 할머니란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할머니를 깨우지 않고 잘 수 있었다.


그때는 나와 동생이 할머니를 자꾸 깨워서 불편하셔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는데 지금 생각하면 표현이 투박하고 거칠지라도 이게 할머니의 사랑이고 배려였다. 할머니는 말투가 거칠고 무뚝뚝하신 데다 목소리도 크셔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화가 나 있거나 싸우는 줄 안다. 어머니, 아버지도 할머니가 정이 없다고 하시지만 내게는 아니었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연이어 떠올랐다. 두 번째는 당연 흙 묻은 알사탕이다.

할머니는 새벽녘 일찍 밭에 가셔서 저녁쯤 돌아오시는데 마당에서 놀고 있는 나와 동생을 불러 흙이 묻은 손으로 주머니 안에서 알사탕을 대여섯 개를 꺼내 주셨다. 봉지에 흙이 잔뜩 묻은 알사탕이지만 핑크색, 노란색, 초록색. 알록달록 커다란 알사탕을 한 움큼 받은 우리는 너무나 행복했다. 사탕을 먹고는 할머니가 무얼 하시나 부엌에 가서 보면 까맣게 탄 딱딱하지만 설탕을 잔뜩 넣어 요리한 달달한 멸치볶음, 기름에 거의 튀겨진 갈색 계란 프라이가 할머니의 고정 반찬이었다. 나와 동생은 할머니가 요리한 멸치볶음과 계란 프라이를 좋아했다. 저녁을 먹었는데도 할머니가 저녁을 먹고 있으면 옆에 앉아서 멸치볶음과 계란 프라이를 먹었다. 잘 먹는 우리를 보니 기분이 좋으셨는지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서 프리마를 넣더니 맛있다며 먹어보라고 주셨다. 그때부터 난 제일 맛있는 음료는 핫초코도 아닌 핫 프리마 우유였다.


세 번째는 평상이라 할 수 있겠다. 표현이 거의 없으셨던 할머니지만 아버지께 평상을 만들어서 옥상에 놓아 달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여름밤이면 늘 옥상에 올라가셔서 모기향을 피우시고 평상에 누워계셨다. 나랑 동생은 할머니를 따라 옥상에 자주 올라갔다. 평상에 누워 있는 할머니는 아무 말이 없으셨지만 주무시는 것도 아니었다. 늘 눈은 떠 있으셨고 무언가를 생각하시는 듯했다. 힘든 밭일을 마치고 돌아와 고단한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어릴 때의 할머니와의 소중한 추억들이 커가면서 할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잊혀갔다. 

'할머니는 왜 저렇게 말씀하실까.'

'할머니 집에서 안 좋은 냄새나는데 뭐지.'

'할머니랑 대화는 왜 이렇게 재미가 없지.'

'그냥 집에 있자.'


오늘 밤, 잠이 안 오는 딸에게 나의 어릴 적 할머니 이야기를 해주면서 너무나도 할머니가 그립다.

"엄마, 혹시 엄마 할머니 사진 있어?"

"응? 아니.. 그러게 사진 한 장 없네."

"찍어두지 그랬어."

할머니 사진, 함께 찍은 사진조차 없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내 기억 속에 잊혔었다.

할머니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게 TV가 켜진 방 문 근처에서 주무시는 할머니 뒷모습, 알사탕, 멸치볶음, 계란프라이, 평상, 옥상. 어린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이었다. 예쁘고 소중한 기억들이었는데 난 왜 이제야 소중하단 생각이 들었지, 할머니가 따뜻하게 표현해 주기만을 바랬고 난 왜 할머니에게 먼저 따뜻하게 다가가지 못했지. 홀로 지내며 외로우셨을 할머니께 왜 말동무가 되어 드리지 못했던 거지.


"엄마, 엄마 할머니도 엄청 무서우셨겠다. 혼자 집에 있었으면."


후회와 그리움이 사무치는 밤이다. 그날 밤처럼 깜깜한 오늘 밤. 딸아이의 손을 꼭 잡아주고는 눈물을 닦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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