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리단길을 다녀오다)
집에 혼자 머무는 시간이 길어져 우울해진 요즘, 지난 목요일 동생과 함께 '송리단길'에 다녀왔다. 취업하고 부모님으로부터 '공간적 독립'을 원했던 나는 회사에서 가까운 원룸으로 이사했고, 송파는 왕복거리가 다소 버거워진 동네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 언제가 다시 돌아와 살고 싶은 동네이다. 처음 대학생이 된 시기부터 취준생을 거쳐 사회 초년 시절까지 송파에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인생에서 가장 치열했던, 하지만 나름 감성도 충만했던 시기에 송파에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시절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송파 구석구석 공간들을 다시 찾아가 보면 왠지 반갑기도 하고 서울 다른 도시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편안함이 있다. 도심 속 골목이 주목받고 있는 요즘, 송리단길에는 골목골목 숨은 매력적이고 개성 있는 가게들을 찾아다니는 이들의 발걸음이 부쩍 많아졌다. 부모님 댁에 오면 항상 잠실과 석촌호수 반경을 벗어나지 못해 아쉬움이 큰 채로 돌아갔는데, 이번 송리단길 투어를 시작으로 골목골목 개성 있는 콘텐츠들이 담긴 공간들을 기록하고 그런 공간을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보고자 한다.
송리단길과 가장 가까운 역은 송파나루 역 1번 출구다. 하지만 동생과 나는 석촌고분 역과 가까운 석촌동에서 송리단길을 향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송리단길에 오는 최선의 방법이 꼭 최단거리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매번 다른 길로부터 송리단길을 만나는 방법도 매력적일 것 같다. 그래서 앞으로는 종종 다른 루트의 길로 송리단길을 가볼까 생각한다.
보통 건물은 일반적으로 입구가 있고 출구가 있고, 주출입구와 부출입구가 있는 식이에요. 결과적으로 자기 방까지 가는 길이 그리 다양하지 않아요. 도시는 달라요. 우리가 만난 이 장소까지 찾아올 수 있는 방법이 엄청나게 많죠. 그건 길이 여러 개 있기 때문이에요. 숭실대 학생회관도 마찬가지예요. 그곳을 드나드는 구멍이 스물다섯 개라는 말은 어디서든 들어가서 도시처럼 지나다닐 수 있는 집이라는 뜻이에요. (중략) 숭실대 학생회관은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자기 층으로 가는 방법이 다 다른 거죠. 그런 데서 더 많은 만남이 가능하도록 했어요.
매거진 B의 세 번째 단행복 잡스-건축가, 건축가 최문규 씨와의 인터뷰 중
송리단길의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인근 동네 사람들이 사는 골목골목 사잇길부터 걸어보고 싶었다. 석촌동은 고대국가 백제의 왕릉 터, 석촌동 고분 문화재가 있어 전체적으로 건물의 고도가 낮고 고즈넉한 분위기이다. 고구려 계통의 초기 백제의 문화와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무덤(5호)이 발견된 곳으로 무덤을 중심으로 공원이 조성되어 동네 주민들이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고 있는 곳이었다.
2000년이 넘는 영겁의 시간을 견뎌온 고분 뒤로 높게 솟아 오른 롯데타워를 가장 찰나의 순간으로 포착하니 뭔가 경이로운 느낌이 든다. 석촌호수는 사람이 너무 많은데 이곳은 한적해서 강아지 산책하기도 좋은 곳이었다.
석촌동 주민센터에 붙어있는 송파 둘레길 관광안내 포스터- 이렇듯 우리가 사는 동네를 즐기는 '길'은 다양하다.
여자들이라면 깊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 빵집. 동생과 난 흔히 말하는 빵순이는 아니다. 그런데 초입에 있었던 도넛 가게로 홀리듯 들어가 버렸다. 2층에 위치한 이 도넛 가게는 사람들이 줄지어 먹는 맛집이었다. 평일 한가로운 오후 시간에 도넛 먹으려고 줄을 서야 하다니... 오늘은 골목의 정경만 느끼려고 왔기 때문에 아쉽지만 기다리지 않고 내려왔다. 이렇듯 지역의 상권을 대표하는 먹거리 중 대표적인 것이 정제된 밀가루로 만든 디저트 전문집이 아닐까 싶다. 프랜차이즈 점포 스타일의 균질한 맛 이상의 것을 기대하게 만드는 상점의 외관과 아기자기한 소품들, 나 같은 방순이가 아니어도 먹어보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해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지만 여전히 오프라인만이 줄 수 있는 경험과 감성에 대한 사람들의 욕망은 더 커져 가고 있다.내 집 밖의 로컬 자원이 풍부한 동네가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천정부지로 올라가는 부동산 가격 때문에 내 능력으로 소비할 수 있는 집의 전용면적은 점점 작아지고 있다. 슬픈 현실이다. 그래서 더 집 밖에서 누릴 수 있는 '동네 전용면적'만이 도 넓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은 향수 공방에 가서 나만의 향을 조합해 볼까? 아님, 나만의 와인잔을 꾸밀 수 있는 곳으로 가서 저녁을 먹을까?, 아님 동네 서점을 가서 책을 읽을까?'
주인장의 개성 있는 철학이 담긴 공간에서 사람들은 소비 이상의 교감을 원한다. 사람들을 머물게 하는 힘은 '공간' 그 자체가 아닌 그 공간에서 경험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이다. 라이프스타일이 담긴 콘텐츠를 발굴하고 기획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이 진정 매력적인 공간이다.
롯데타워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번화가 상권인 잠실동과 특색 있는 가게들이 밀접한 송리단길을 끼고 있는 송파, 방이, 삼전, 석촌동의 골목상권이 어우러져 다른 강남권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합'이 있는 곳이다.
동생과 나름 익숙한 동네를 다니며 예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재미를 느끼고 돌아온 후 든 생각들.
예전에는 멀리 해외로 나가는 여행만이 특별한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내가 사는 생활권역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움직임 또한 활발해졌다는 것이다. 머물고 싶은 동네라는 것은 결국 그러한 사람들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로컬자원이 풍족한 곳이라고 생각됐다. 나에게 그런 의미로 살기 좋은 동네란 어디일까?
다시 송파로 이사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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