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수업을 하다 보면 때때로 삶의 의미나 목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무언가 그럴싸한 답변을 기대하지만 대개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행복'이라 간단히 답하고 만다.
(또 행복이구나. 지금껏 수없이 들어온 대답이지만, 나도 몰래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행복을 목적으로 살아간다는 게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우물쭈물거린다.)
어쩔 수 없이 다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친구는 행복을 어떻게 정의하나요?', '무엇이 그대를 행복하게 하나요?' 따위의 질문 말이다.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거나 얻었을 때 행복을 느낀다고 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찜찜한 기분이 든다. 욕망의 충족이 행복의 조건이라면 우리는 행복과 불행 중 어느 쪽에 더 가까운 것일까. 과연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가 오가다 보면 결국 나의 생각을 말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난들 알겠니?' 하고 속으로 생각하지만, 그래도 답은 해야 한다. 그것도 뭔가 그럴싸한 답변이 필요하다. 생각을 쥐어짠다.
(학생들의 생각을 존중하면서도, 그와는 다른 나의 생각을 말하되, 결코 가르치려 들지 않아야 한다. 매번 다짐하지만 참 어렵다.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난들 어찌 알겠는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여러분의 생각은 그대로 다 옳습니다. 행복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마음먹은 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나쁜 일만 아니라면 막살아도 괜찮아요. 나는 더 막살지 못한 게 후회가 돼요.(^^) 무엇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기성세대의 낡은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는 행복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행복을 '당위'라고 생각했어요. '당위'라는 말은 '마땅히 있어야 하는 것',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을 뜻하잖아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학생들의 표정에서 지루함을 읽는다. 김이 빠진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해야 할 일을 해야 한다. 한 명이 고개를 들어 나와 눈을 맞춘다. 고맙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면 실제로 그렇지는 않잖아요. 얼마나 어렵나요. 행복해진다는 게. 얼마 전에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잖아요. 사실은 참 슬픈 말이죠. 제대로 된 큰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자조적인 말이잖아요. 진짜 행복할까요? 소소한 행복에 만족해야 하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지는 않았을까요."
"어느 날 그런 생각을 들었어요. '굳이 행복해야 하는 걸까. 행복을 위해 살아갈수록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게 될 뿐이지 않는가.'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게 되면 행복의 조건을 따지게 되고, 그 조건을 충족할 수 없는 자신을 보게 되고, 결국 그런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끼게 되지 않을까요? 행복에서 더 멀어지게 되지 않을까요?"
(눈을 맞추던 학생이 질문을 했다. '교수님의 말씀은 불행해지지 않기 위한 회피가 아닐까요? 그래도 행복해져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행복은 소중합니다. 정말로 소중한 경험입니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행복이 목표가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우리는 대개 행복을 스스로 정의하지도 못하잖아요. 그래서 타인의 행복을 거울삼아 자신의 불행을 비추곤 하잖아요. 굳이 타인의 행복을 내 삶의 목표로 삼을 필요가 있을까요."
(다시 질문을 한다. '그러면 교수님의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막살아가는 편이라서 별다른 목표는 없습니다. 그저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행복할 수도, 불행할 수도 있겠지만 상관없겠죠. 행복은 가끔 찾아오는 손님이면 충분하니까요."
(이쯤이면 될까? 학생들은 이미 한계다. 나름 재미있는 이야기이지 않나 싶지만, 결국 각자의 삶이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입니다. 늦지 않게 과제 제출하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