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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비 Feb 24. 2024

바람의 온도

어제의 단상_#35

#35_바람의 온도


아이와 함께 동네를 산책한다. 바람이 차다.

며칠만 지나면 3월인데, 겨울 끝자락의 바람에 손끝이 시리다니 내가 알지 못하는 지구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르막을 오른다. 함께 숨도 차오른다. 이 정도에 숨이 차서야.

요즘 들어 몸이 말이 아니다. 벌써 한 달째 겨울 독감에 시달리고 있다. 밤새 기침에 시달리다 아침에 눈을 뜨면 어지러움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다. 오른쪽 무릎이 시큰거린다. 계단을 내려가는 게 겁이 난다. 건강검진을 하니 간수치가 정상의 3배다. 유의미한 수준으로 체중을 감량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내내 불편하다. 이제 겨우 마흔여섯,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몸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걷다 보니 문이 닫힌 점포들이 많다. 여기도 저기도 '임대문의'가 붙어 있다.

'저 치킨집은 벌써 문을 닫았네.' '저 김밥집은 잘 되는 것 같았는데. 아깝다. 맛있었는데.' 괜스레 마음이 좋지 않다. 통장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몰라야 부자라 했던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의 두께를 가늠해 본다. 얇아진 지갑 너머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언덕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른다. 내내 차갑던 바람이 상쾌하게 느껴진다.

마음을 괴롭히던 이런저런 고민이 잠시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내 다시 들어온다. 고민은 후회를, 후회는 망상을, 망상은 절망의 문을 연다. 그래도 바람은 여전히 시원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바람을 기다리며 쉼 없이 걷는 것뿐이다. 바람을 시원하게 느끼기 위해서는 몸을 뜨겁게 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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