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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럭 Feb 14. 2022

일관성의 함정

영미 아동도서에 대한 이야기 10

그랜트 스나이더(Grant Snider)의 'I Will Judge You by Your Bookshelf'에서 저자는 타인을 판단하기 위해 남의 책선반을 몰래 훔쳐본다고 합니다. 그래서 책의 주인공은 남의 책선반 앞에서 "I will judge you by your bookshelf."라고 외칩니다. 이때 그가 보고 싶은 것은 타인의 책선반에 꽂어있는 '책등'들이었습니다. '책등'에 적어져 있는 제목, 출판사 등은 그가 가장 원하는 정보일 것입니다. 이제는 책 커버 썸네일 이미지가 가장 먼저 눈에 띄지만 온라인 서점이 대중화되기 전까지 우리가 책을 만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은 '책등'이었습니다. 대형서점이든 동내 서점이든 하나둘씩 주위에서 사라지고 도서관들은 코로나에 빈번하게 휴관하는 요즘, 많은 책들이 서가에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일렬로 가지런히 꽂아져 있는 '책등'의 모습을 본 지 오래라서 아쉽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그랜트 스나이더 작가님의 해당 작품은 국내에 '책 좀 빌려줄래?'란 제목으로 번역서가 있습니다. 번역서의 제목은 아마도 "I confess:"으로 시작하는 첫 장의 마지막 부분인 "can  I borrow a few books?"에서 온 듯합니다만...저 역시 책은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책들도 책선반에 장르별, 출판사별, 작가별 등으로 책들이 꽂아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책들이 책 선반에 있지는 않습니다. 저와 함께 책들이 살고 있는 공간이 워낙 작다 보니 부피가 큰 팝업북 등 일부의 책들은 박스에 모셔져 있기도 합니다. 이제 막 도착한 책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그냥 마구 쌓아져 있기도 합니다.  이런 와중에 영국의 'Arcturus Publishing' 출판사의 책들이 가진 일관성은 저에게 묘한 이질감을 줍니다. 아래의 사진처럼 이 출판사의 책들은 모두 슬립 케이스(slipcase)를 가지고 있으며 가로, 세로, 두께 모두 같은 크기입니다.


출판사에서 같은 시리즈로 출판된 책들은 책의 두께만은 다릅니다. 그런데 이 출판사의 책들만은 두께가 똑같습니다. 이 책들이 정리되지 않고 여기저기 흩어져 쌓여 있을 때는 몰랐습니다. 책들을 한 곳으로 모아보니 두께가 똑같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두께가 같은가 싶어서 케이스를 포함한 책들의 두께를 재보기도 하고 온라인서점의 서지정보를 확인도 했습니다. 이 책의 두께는 서지정보와 동일한 31mm입니다. 

출처: BESTLACLUB

사진 속의 책들은 왼쪽부터 순서대로 'Anne of Green Gables', 'The Wizard of Oz', 'The Wind in the Willows',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입니다. 국내에서는 '빨강머리 앤', '오즈의 마법사',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책들은 ATOS 관심 레벨(IL)이 Middle Grade(4~8)로 동일합니다. 북 레벨(BL)은 모두 7~8 사이에 해당합니다. 모두 축약본이 아닌 원작의 내용 그대로입니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간단한 산수를 시작하겠습니다. 

97,364 나누기 256은?

40,608 나누기 256은?

58,286 나누기 256은?

55,889 나누기 256은?


혹시 암산으로 바로 값이 나왔습니까? 정답은 반올림해서 380, 159, 228, 218입니다. 계산한 값이 다 맞으셨나요? 그런데 혹시 이 숫자들의 비밀을 알고 계신 분이 있을까요? '97,364'와 같은 앞의 숫자는 책 안에 사용된 단어의 수이고 '256'은 페이지 수입니다. (단, 단어수는 ATOS 지수의 RENAISSANCE 사가 제공하는 수치입니다.) 사진 속의 'Arcturus Publishing' 출판사의 책들을 똑같은 두께와 페이지 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이 출판사가 의도적으로 책 사이즈를 통일시킨 듯합니다. 책들이 가진 가장 똑같은 숫자는 '책등'의 두께이자 페이지 수입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이 책들에 대해 언급한 숫자에서 가장 서로 다른 숫자로 이루어진 것이 책의 단어수입니다. 그럼 우리가 계산한 결괏값은 무엇일까요?


이 두 개의 숫자가 만나면 우리가 계산한 값이 나옵니다. 계산한 값은 책의 한 페이지 당 평균적으로 몇 개의 단어가 있을까를 나타냅니다. 이런 수치를 책끼리 비교한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단, 'Arcturus Publishing'의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에는 'Through the Looking-Glass'도 같이 포함되어 있음.)

출처: BESTLACLUB  DB

차트에서 소개되는 책들은 사진 속의 책들과 동일하게 왼쪽부터 'Anne of Green Gables', 'The Wizard of Oz', 'The Wind in the Willows',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순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빨강머리의 앤'이 '오즈의 마법사',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보다 한 페이지에 단어수가 상당히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결과가 바로 영향을 미친 부분이 책들 마다 사용된 폰트 사이즈와 행간의 간격 크기입니다. 소개된 모든 책들의 글자 사이즈와 행간의 간격이 다 달랐습니다. 특히 결과 속의 '빨강머리의 앤'은 글자의 크기와 행간의 간격이 작아서 아직 노안이 아니라고 믿는 저에게 다소 부담스러웠습니다. '백문 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고 하지만 저작권 때문에 해당 글씨들의 크기를 비교하는 사진을 실을 수 없어서 아쉽습니다. 


제가 각각의 책들을 시간을 두고 볼 때는 같은 출판사의 같은 시리즈이지만 책들이 무언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느낌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책장에 한 곳으로 모아서 '책등'을 보고 다시 안을 살펴보니까 그 느낌과 그의 원인까지 알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가 의도한 '책등'의 일관성이 책 내부의 일관성을 무너뜨린 결과를 낳았습니다.


바로 앞 글에서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며 북 커버가 화려한 컬렉터 에디션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화려함에는 가격 이외에도 또 다른 양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북커버나 모양만 보고 구입한 옴니버스나 컬렉터 에디션들의 책들 중 일부는 실제 독서에 무리가 있습니다. 상당히 무거운 책의 무게, 읽기 불편한 크기의 작은 글자와 행간 간격, 커버에 비해 상당히 떨어지는 내부 종이와 인쇄 품질 등이 그 원인일 수 있습니다. 물론 외적 아름다움을 위해 무언가의 내적 희생을 당연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무거운 무게는 책을 들고 보거나 가지고 다니지만 않으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질이 떨어지는 내부의 종이와 인쇄 품질을 만나면 매스 마켓 페이퍼북보다 나쁘지 않다고 자신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글자 크기와 행간 간격이 작아서 오는 답답함은 금세 불편함이 됩니다. 보기 좋은 떡이 항상 먹기 좋은 것만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도서 수집이 목적이 아니라면 커버가 아름다울수록 우리 자녀의 슬기로운 독서생활을 위해 선택에 더 많은 주의가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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