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별이 아닌 배려를 위한 구분
‘선량’과 ‘차별주의자’라는 모순된 단어를 함께 사용한 이 책은 제목만으로도 대략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당당하게 서 있는 흰 오리들 사이에 상처투성이가 된 한 마리 고개 숙인 검은 오리의 그림이 차별받는 존재의 아픔을 잘 드러낸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본 영화 두 편이 떠올랐다. ‘그린북’과 ‘히든피겨스’인데 둘 다 흑인에 대한 차별을 주제로 한 영화이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인 흑인이 백인과 함께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해 한참 떨어진 먼 곳까지 다녀야 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흑인이 연주하는 음악은 들으면서도 화장실은 함께 사용하지 못하겠다는 백인 사회의 관습이 터무니없게 느껴지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다. 책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 사례로 호칭과 명절 선물가격을 다르게 책정하거나 사원증의 색을 달리하는 것을 예로 들었다. 호칭이나 사원증 색을 달리하는 것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닌 그저 ‘구분이 목적인 구분’이라고 했다. 영화에서처럼 흑인과 백인을 같은 공간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닌 그저 상대방과 나를 구분지음으로써 우월함을 느끼고자 하는 다수의 권력을 가진 이들의 욕심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란 동성애자가 아닌 이성애자, 흑인이 아닌 백인, 여성이 아닌 남성인 다수의 평범한 사람이 소수의 차별받는 이들에 대해 행하는 ‘가진 자의 여유’라고 한다. 이미 차별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차별주의자가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버스의 계단은 애초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고 비장애인의 활동에 알맞게 설계되었으므로 처음부터 결함이 존재한다. 이렇게 설계된 사회구조에서 당연한 평등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가 평등에 대한 노력을 하는 자체가 ‘선량한 차별’이라는 내용에 공감한다. 장애인이 휠체어를 타고 출근시간에 지하철역에서 타고 내리는 시위를 하는 것을 불평하는 이들이 바로 선량한 차별을 하고 있는 다수라고 한다. 하지만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출근시간에 늦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시위대에 대해 불평하는 것을 비난할 수도 없을 것 같다. 똘레랑스의 나라라는 프랑스처럼 파업으로 출근시간이 늦으면 늦는대로 온 국민이 발이 묶이면 또 그런대로 살아갈만큼의 여유가 대한민국의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럴지라도 이제 우리도 경제적으로 잘 살기 위한 노력보다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잘 살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불평등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장애인이거나 여성, 흑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더라도 개인의 노력으로 불리함을 극복하여 성공에 도달하도록 하는 문화가 형성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 누구도 언제 어디서 차별받는 소수가 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평등에 대한 노력은 반대 의견과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가지고 제도화하도록 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 이미 다수에게 유리하도록 구조화된 사회에서 대다수의 합의를 끌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블라인드 채용을 하더라도 ‘실력’을 갖추기 어려운 구조적 결함 때문에 지방대생이 합격할 가능성이 낮아지므로 동등한 실력을 갖추도록 하는 ‘실질적 평등’이 필요하다고 한 내용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의 서열화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학간 실력의 차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수가 가진 권력을 침범받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수의 권리를 옹호해주자는 선량한 차별이 형식적 평등이라면 소수가 겪는 불평등을 다수가 누리는 평등과 같게 개선해주는 것이 실질적 평등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과 필요가 우리 구성원들의 마음속에 싹트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