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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빛 레오 Oct 13. 2024

갑자기 서럽습니다

ET 책가방의 기억이 소환되다.

 대학생인 딸을 차로 두 시간 넘게 운전해 데려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눈물이 났다. 남편과 함께 딸아이를 자취방에 데려다주고 돌아올 때와 달리 나 혼자 돌아올 때는 자꾸 목구멍 위로 뭐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 유튜브 '컬투쇼 레전드'를 들으며 혼자 깔깔거리다 나머지 시간은 '김창옥 명강연 모음'을 들으면서 왔는데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다시 슬픈 감정이 올라왔다. 딸을 혼자 두고 오는 애처로움이 서러움으로 변한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질 않아서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이런 날도 있구나 싶었다. 

 서러움이 한 번 시작되면 그날 하루는 그냥 서럽게 지내야 하는 것 같다. 집에 돌아와 습관처럼 넷플릭스 드라마를 틀었는데 가난한 엄마가 아들의 책가방을 새로 사주고 싶은데 돈이 없어 고민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장면을 보고 왜 나는 40년은 지난 나의 초등학생, 아니 국민학생 시절이 기억났을까? 

ET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국민학교 1학년부터 최소한 3년 정도 나는 ET그림이 한가운데 그려진 빨간색 책가방을 메고 다녔다. 기억력이 좋아서 그걸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방이 나는 너무나 싫었다. 그 어린 시절엔 그냥 그 못생긴 ET 그림이 싫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가 너무 하셨다는 생각이 든다. 요술공주 밍키도 있는데 하필 여자아이에게 못생긴 외계인 가방을 사주셨을까? 내가 커서 우주인이나 과학자가 되길 바라셔서 그러셨을까? 그 못생긴 가방은 너무 튼튼한 나머지 찢어지지도 않아서 몇 년을 내 등에 매달린 채 학교를 다녔다. 모르긴 몰라도 어린 나는 가방이 찢어지기를 얼마나 빌었을지 모른다. 

요술공주 밍키


 딸아이를 키우며 터득한 사실인데 아이들은 나이에 맞는 단계에 따라 고유의 취향을 가지면서 성장해 가는 것 같다. 딸이 나약한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는 어릴 때부터 좀 다르게 키웠던 것 같다.  옷을 살 때는 리본과 레이스가 달린 옷을 사지 않고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함께 입을 수 있는 중성적인 디자인을 골라서 입혔다. 그런데 유치원을 갈 때쯤 되자 딸은 공주치마를 입고 싶다 했고 난 하는 수 없이 마음에는 안 들지만 딸의 취향에 맞는 레이스와 리본이  많이 달린 옷을 사 주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거쳐가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중학생이 되면서 딸은 짧은 머리에 검은색 트레이닝바지와 셔츠를 고집했고 학생들이 겨울에 많이들 입는 긴 패딩점퍼를 입고 있으면 남학생인지 여학생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내가 좋은 엄마라서가 아니고 그 시기에 필요로 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뜬금없이 나이 50이 가까워서 ET 가방이 떠올라 서러운 것은 아마 내가 공주가방을 필요로 했던 시기에 그걸 갖지 못한 데 대한 서러움이 아닌가 싶다. 뭐 갖지 못한 것이 가방뿐이었을까마는......

 작은 유통회사를 다니며 외벌이로 자식 셋을 기르신 부모님의 고생을 모르는 나이도 아니지만 한편으론  그 못난이 ET를 등에 메고 매일 슬프게 등교했을 어린 시절의 내가 가엾어서 오늘까지만 한껏 서러워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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