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댓명의 외국인 크루 이름 외우기 미션
공항에 나가 해외 아티스트를 맞이할 때 가장 긴장하는 일 중 하나는 이름 외우기이다. 얼굴이 잘 알려진 메인 멤버의 경우야 식은 죽 먹기이지만, 나머지는 서둘러 머릿속에 집어넣어 열심히 되내어야 한다. 3, 4인 정도는 무난하지만, 잭, 톰, 트레버, 매간, 아이린, 스테이시 등 어딘가에서 들어본 이름을 10명 정도를 한 번에 입력하기는 여간해서 쉬운 일이 아니다. 인원이 많은 큰 팀에서 동명이인이 2팀이나 껴있던 적도 있다. 고백하건대 20명에 가깝던 The Chemical Brothers 때는 아예 포기했었다.
해외 공연에 참여하는 아티스트 그룹은 크게 2개로 나눌 수 있다. 아티스트 본인과 밴드 멤버 등이 포함된 뮤지션 그룹과 엔지니어(음향/조명/모니터 등), 아티스트 매니저, 투어 매니저 등으로 구성된 크루(Crew) 그룹이다. 그 외에 경호나 개인 어시스턴트 명목으로 위장(?)한 가족이나 연인이 함께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크루 중 하나가 멤버이면서 동시에 뮤지션의 연인인 경우가 더 많다.
공항에서 처음 크루를 만났을 때 이름을 모두 기억하면 좋겠지만 그렇기가 어려울 때 취하는 전략은 우선 투어 매니저가 누군지를 확인하는 일이다. 에이전시/에이전트와의 계약 단계를 넘어가면 그다음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와 직접 소통할 수 있게 연결되는데, 이때 일반적으로 투어 매니저와 대화하며 모든 것을 점검하게 된다. 따라서 직접 만나기 전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상대이며 이 투어에 가장 많은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투어 매니저이다. 아직 모두의 이름이 헷갈릴 때 그와 소통하면 일이 잘 흘러간다.
이 팀 투어 매니저 이름이 뭐였지?!
따라서 크루가 입국장 게이트에 모습이 드러내기 전 우리끼리 “이 팀 투어 매니저 이름이 뭐였지?”라는 대화를 나누곤 한다. 그리고 입국소속을 마치고 있는 뮤지션들에게 우리를 알아볼 수 있도록 마중자들의 셀피를 찍어 보내곤 하는데, 이렇게 사진 답장이 오기도 한다. 마치 '안녕. 이건 우리야. 곧 만나.' 같은 귀여운 사인이다.
공연이 다가와 아티스트를 직접 만나기 전에 비자 취득 업무가 있어 사전에 모두의 여권 사진을 취합한다. 특히 작년 늦여름까지 입출국 코로나 검사 신청 업무까지 했을 때는 더 자주 보았다. 그렇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여권 사진과 실제 모습의 일치율은 그다지 높지 않아 이름을 외우는데는 쓸모가 없다. 하지만 직접 만나고 나서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개인적으로는 몰래 여권 사진을 열어보면서 이름과 얼굴을 비교해가며 빠르게 외우곤 한다.
하지만 세상사 모든 일이란 결코 한 방향이 아닌 법. 그들에게 어려움을 되돌려 주는 건 바로 나의 이름이다. 우리 회사의 나머지 멤버들 이름은 외우기 쉬운 편이지만, 외국인에게 ‘도연’이란 이름은 발음부터 진입 문턱이 높다.
이름을 몇 번 말해주다가 “그냥 아무렇게나 불러줘. 난 상관없으니까”라고 말하면 대부분 “아니야. 꼭 해낼 거야. 내게 기회를 더 줘.”라고 한다. 밴을 두 대로 나눠 호텔로 출발할 때 내가 타지 않은 다른 한 차에서 우리 멤버에게 내 이름을 묻고 가는 내내 열심히 연습하는 아티스트도 여럿 있었다. 그럴 때 참 고마운 마음이 든다.
물리적으로 따지면 단지 일 년에 3~5일 정도 잠깐 만났다 헤어지는 인연일 수도 있지만 보통은 그보다 진한 유대관계가 형성된다. 해외 공연이라는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준 자(호스트 프로모터)와 초대받은 자(아티스트) 사이에는 조금 더 특별함이 있다. 김춘수 시인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했는데, 서로의 이름을 외우고 부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일 년에도 수십 명씩 만나는 일이 바로 내 직업인 것이다. 이렇게 매력을 하나 더 발견하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