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예술가를 낳고
나오는 대사들은 고흐가 생전에 사람들과 주고 받은 편지들, 그리고 주변인들의 증언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어떤 전기나, 자서전, 그리고 일생을 회고하는 것이든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약 100년 전에 살았던 인물을 많은 이들이 말하고 컨텐츠로 만듬으로서 우리가 알아갈 수 있는 건 그 후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본 다큐는 고흐의 일생을 살짝 스케치 한 것 이라는 느낌을 주면서 충분히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배우 컴버배치의 연기는 훌륭했고 고흐의 삶에 몰입하게 해줬다. 한가지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와 쉽게 대조해서 보였던 것은 [고흐, 영원의 문에서]에서는 고흐의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는 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 볼 정도로 잘 나타났는데, 여기서는 가난한 것을 언급했지만 영화에서 만큼 고흐가 가난해 보이지는 않았다. 뭔가 가난해도 고급스런 느낌이랄까?
어제는 고흐에 대한 영화를 보고 오늘은 이 다큐를 보았는데 예술가란 고독의 산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느낀다. 고독의 시간은 예술가를 탄생시키고 그렇게 태어난 예술가로 하여금 세상은 먹고 산다. 예술을 전공해도 모든 이가 고독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건 아니며, 그런 과정의 시간은 예술가를 빚어낸다. 그 고독은 예술가가 원한 것이 아니었을지라도 그 고독으로 내몰린 사람은 고독 가운데 꽃 피운다.
모든 이가 고독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건 아니다
마루야마 겐지는 [소설가의 각오]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 가장 위태로운 입장에 서서 불안정한 발밑을 끊임없이 자각하면서 아슬아슬한 선상에서 몸으로 부딪치는 그 반복이 순수문학을 하는 사람의 자세인 것이다." 207.
고흐는 자신의 삶에 지독할 정도로 물들어 있던 고독을 그림으로 환원시켰다.
가난은 예술가를 더욱 자신의 임무에 천착하게 한다. 평론가 신형철은 한 가지를 위해 모든 것을 몰락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 바 있다. 고흐는 그림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사람이었고, 그 외에 다른 것들을 몰락한 사람이었다. 다른 주변의 것들이 그를 그림의 심연으로 더 깊이 들어가게 해주는 도구가 되었다. 종교학자 배철현은 누구나 자신의 심연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의했다. 그렇게 심연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인지를 발견할 수 있기도 하다.
그 고독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 심연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자기만의 것을 창조하는 것이리라. 그렇게 창조의 과정에서 나는 나를 발견하고 나만의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집스럽게도 자신의 그림 스타일을 고집했던 고흐, 자신의 그림이 이상하다는 평가에도 쓰러지지 않고 자신의 것을 찾았던 그의 힘은 고독 가운데 자신이 좋아하는 것,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은 데서 나온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