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업이란 인물을 전혀 몰랐다. 취화선을 본 후, 그의 삶을 닮고 싶었다.
매이지 않아야 그림이 나오고, 취하고 흥이 나야 그림이 나온다.
천한 출신으로 재능을 꽃피우지 못한 이들이 참 많은 텐데 그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리고 맞고 있는 그를 본 김병문(안성기)에 의해 구원되고 그림에 대한 열심과 재능을 발견, 그 후에도 나름대로 갈고닦는다. 천재도 스승이 있어야 하는 법인지 그에게도 스승이 소개되고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들이 열린다. 붓을 잡는 법부터 시작하여 스승의 여러 제자들과 그림을 배우는 과정들, 그리고 치열하게 씨름하고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을 때, 여러 유명 기술을 베껴와 그림을 그리던 그가 자신의 독자적인 기술을 가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천재에서 예술가로의 탄생 과정을 볼 수 있다.
마치 고흐가 안톤 모베에게 수채화와 유화의 원리를 배웠던 것처럼 장승업도 누군가에게 배워야 했던 것이다. 천재는 혼자만의 결과, 또는 예술가는 혼자만의 것이 아닌 역사에 축적된 것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걸 본다. 시간 속 퇴적의 결과.
장승업은 좋아하는 여성이 있었다. 이응헌의 여동생 소은(손예진)이 있었는데 그녀의 혼인으로 승업의 요동치는 마음은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밤에 몸을 뒤척이게 한다. 그렇지만 그는 이것을 그림으로 환원시킨다. 그가 베낀 원본에는 없는 외로운 새 한 마리가 그것을 말해준다. 본래 예술가란 자신의 고통과 고독, 외로움을 작품으로 환원시키는 데서 탄생한다.
시인 이성복은 <무한화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간절함과 안쓰러움, 부질없음과 속절없음이 시의 포인트이고 기술이에요."
이런 이성복의 통찰은 모든 예술과 작품에 영감을 불어넣는다. 그런 영감은 쥐어 짜낼 수도 없는 것이고 우연이 이르러 오는 연인처럼 내게 온다.
영화 취화선 중에 그림에 대한 요청은 계속 들어오는데 그림을 그리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는 것처럼 보이는 승업에게 일꾼은 그림 좀 그리라고 독촉한다. 그때 승업의 대사는 영감에 대해 우리에게 말한다.
"야 이놈아, 꼴려야 그리지 꼴리지도 않는데 그리냐 이놈아"
꼴려야 그릴 수 있다. 영감이 이르러와야 그릴 수 있다. 승업은 궁에 들어가는 상당한 출세를 했는데도 그곳에서의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고통스럽기만 했다. 술은 세 잔만 마실 수 있고, 갇혀 있는 그에게 그곳은 그림을 그리기에는 어려운 곳이었다. 술과 여자, 흥이 없는 그곳은 그에게 그림을 그리기 적합한 곳이 아니었다.
우리는 고흐의 인생에서도 비슷한 부분을 본다. 고흐도 외로움의 사람이었다. 다른 점은 승업은 그림이 살아있는 동안 잘 팔렸지만 고흐는 그렇지 못했다. 승업은 살아있는 동안 유명세를 누렸지만 고흐는 그렇지 못했다. 반면 그들은 여자와의 관계로 영감을 받고 여자와의 관계가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승업과 소은과의 관계, 같이 살던 기생 출신의 여인, 기생 매향, 그리고 자신의 씨를 주려 했던 기생. 이런 여자와의 관계들이 승업에게는 늘 필요했다. 반면 고흐는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에서 일하는 한 여성에게 "50프랑 주면 나와 있어 줄래요?"라고 묻는다. 그마저도 돈이 없어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그도 여성을 갈망하고 필요로 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고흐의 편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무언가 변화를 주기 위해서라도 여자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사랑 없이는, 사랑하는 여자 없이는 살 수가 없는 사람이다"
"나는 여자가 필요하다. 나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고, 살지 않을 것이고, 살아서도 안된다"
또한 고흐는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매춘녀인 '시엔'이라는 여자를 집으로 데려와서 같이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알코올 중독자에 매독 환자였다고 한다.
고흐가 사랑했으나 철저히 거절당했던 '케이'라는 여성에 대한 일화도 그의 외로움과 고독에 한 부분이었다.
개인적으로 너무 아름다웠던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는 동시에 사무치는 고독과 외로움을 경험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많은 이들에게 추천하는 영화다.
장승업은 베끼는 그림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그림 스타일로 탈바꿈했고 고흐는 원래부터 자신의 스타일을 가던 사람이었다. 결국 스스로 자신의 길을 찾는 자들이 진정한 고수로서 설 수 있는 것을 보여준다.
<장자>의 '한단지보'라는 고사에는 한 초나라 사람이 조나라 사람의 걸음걸이가 세련되어 보여서 따라 하다가 초나라 사람의 걸음도 아니고 조나라 사람의 걸음도 아닌 걸음걸이로 걷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제3의 길을 가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이 고사의 의미는 남을 따라만 하는 자는 결국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고 그 길을 가는 것은 예술가의 사명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