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의 힘을 믿으면 생기는 일
어딜 가든 항상 소지하고 다니는 것이 있다. 검은색의 작은 노트와 검은색 볼펜. 정확한 제품명은 '몰스킨 클래식 노트북 소프트커버 블랙 도트' 포켓사이즈와 '파이롯트 쥬스업 0.4 블랙'이다. 이 노트의 목적은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나의 일상을 차곡차곡 담기 위한 목적이지만, 무엇을 담고자 하는지는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 손 만한 작은 노트에 적을 수 있는 건 다 적는다. 나의 하루 동안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불쑥 찾아오는 생각들, 사소하지만 나를 놀라게 했던 사건들까지 모조리 적는다. 이동 중이거나 노트를 꺼낼 수 없을 때는 아이폰 메모 앱에 적어두기도 한다. 어떤 생각이 갑자기 번뜩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는,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재빨리 노트북을 열어 누구보다 빠르게 타이핑을 해 붙잡아 둔다.
이렇게 크고 작은 일들을 조금씩이나마 담아두려는 이유는,
나의 하루와 일상들을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 기록을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비록 일기를 쓰거나 스케줄러를 빼곡하게 쓰는 등의 기록은 이전부터 해왔지만, 별 의미 없이 내 눈앞을 쌩 지나가는 일이나 감정은 기록해 본 적 없다. 그랬던 내가 일상 기록을 시작하게 된 것은 학부 수료 후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하고부터였다. 매일 비슷하게, 아니, 거의 같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매일매일이 지루하게만 다가왔다. 나는 안정적인 생활에서 동력을 얻는 사람이지만, 매일 같은 것만 하는 삶을 바라지는 않는, 꽤나 모순적인 사람인 듯하다. 아무쪼록 매일 비슷하게 흘러가는 하루를 보내며 어떻게 하면 이런 일상을 조금 더 아낄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물음에 대해 내가 찾은 답은 '일상 기록'이다.
도서관에서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을 예상치 못하게 발견한 것, 집에 오는 길에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가을을 온전히 느꼈던 것, 내가 탄 버스에서 무례한 사람을 만나 기분이 언짢았던 것 등등, '이렇게 사소한 것도?'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마저 낱낱이 기록해 보기 시작했다. 이 일상 기록은 나의 기록 생활마저 넓혀주었다. 평소에 가끔 쓰던 일기장 하나만 가지고 있던 나는, 일상을 기록한 이후로 여러 개의 기록 공간을 갖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읽고 싶었던 책을 발견한 것은 '행운 기록'이라는 카테고리로,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은 것은 일기장으로, 무례한 사람을 만났던 것은 생각 노트로 각자의 자리를 찾아갔다. 검은색 몰스킨 노트를 꺼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하루의 기록들을 각자의 자리로 옮겨 적는 밤 열한 시쯤은 하루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되었다.
쳇바퀴 같은 하루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하루들이 마냥 같지만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기록에의 열의는 또 다른 기록, '독서 기록'으로 이어졌고, 이는 나로 하여금 독서 습관을 다시금 찾게 해 주었다. 소소한 기록의 효과는 나의 기록생활이 어디까지 넓어질지 궁금하게 만들어 준, 소소하지 않은 경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