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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 Jul 11. 2024

자기소개

동명의 영화를 보고 나서

2022년 1월 5일에 적었던 글을, 이제서야 용기가 나서 발행해 본다.

p.s 변예진 감독님 영화 잘 봤어요!

https://indieground.kr/indie/movieLibraryView.do?seq=2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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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거는 일을 잘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이 껄끄럽고 두렵다. 스스로가 자신이 없고 늘 미덥지 못하다 느껴서 그런 것 같다고 대충 짐작한다.


한때 펀딩 사이트를 늘 들락거리던 때가 있었다. 월급이란 걸 받을 때,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걸로, 나만을 위한 주문 제작은 아니지만 모두를 위한 기성품은 아닌, 그 사이의 어떤 것을 구입하기 위해서. 물론 월급이 끊기고 한국을 떠나면서 자연스럽게 방문이 뜸해졌다. 오랜만에 들어가서 펀딩을 했다. 그냥, 아는 사람이 펀딩을 받는다는 이유로,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솔직히. 수중에 굴릴 수 있는 한화가 거의 없다. 내가 직접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니까, 있는 돈은 모조리 끌어다 환전해 버린 지 오래다. 현금이 없으니 블로그 광고로 얻은 포인트로 펀딩에 참여했다. 과거의 내가 끄적여둔 글들이 돈이 되긴 하는구나, 싶어서 신기했다. 내가 써두었던 어떤 것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쓴 어떤 것을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왠지 기분이 좋았다. 중간에 낀 자본은 애써 무시하고 싶었다.


이렇게 구구절절 쓰는 이유는 아까 저녁 먹으면서 와인도 마셨고, 유통기한이 다 되어가는 한국 음식을 해치운다는 핑계로 맥주도 마셨기 때문이다. 체코에서 온 부드바이저 병맥주는 한국에서 마셨던 버드와이저 캔맥주보다 맛있었다.  한동안 글을 안 쓰기도 했고, 그냥 내 처지를 어딘가에 털어 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 되게 열심히 살고 있다고.


링크에 접속해서 재생 버튼을 누르고 얼마 되지 않아 한국이 너무 그리워졌다. 내 과거가 너무 그리웠다. 나도 읽었던, 공부했던 그 책, 내가 뽑았던 엽서, 나도 거닐었던 그 길, 그 장소, 모든 것들이 있었다. 영화를 볼 때 영화 속 인물에 이입하지 않는 편이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영화를 본다, 그 인물의 행동을 관찰한다, 대사를 듣고 이해하려 애쓴다. 그게 어느 순간부터 잘 안 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이런 모습이 나 같고,  저 사람은 저런 모습이 나 같더라.


다시, 솔직히. 내 주변의 모든 것이 아직도 낯선 이 상황이 이제는 조금 두렵다. 실패해도 괜찮으니 조금이라도 익숙한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자꾸만 커진다. 진전이 더딜 때마다 괜히 내 탓을 한다. 내가 뭔가 빠뜨린 게 아닐까, 내가 부족한 게 아닐까. 사실은 내가, 내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 인적이 드문 길에서 드문드문 남아 있는 흔적을 따라 걷는 기분이다. 이쪽으로 가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 그저 그런 작은 희망을 안고서.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곤 한다. 개인은 사회 앞에서 무력해지곤 하지만 결국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개인이다. 문제는, 모든 개인이 동일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개인과 사회 사이에 집단이 존재할 수 있더라. 현재로썬 권력의 불평등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연대인 것 같다. 여기까지, 사회학의 사자도 알지 못하는 비전공자의 사담이었다.


오늘은 서울 시장 선거가 있었던 날이다. 서울 시민이 아닌, 게다가 한국에 살고 있지도 않는 나에게 이 선거가 중요한 것은, 결국 나는 한국인이란 이유 때문이다. 지금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하고 있지만, 그래도 한국은 내 친구들과 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니까.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을 떠나니까 한국의 상황을 좀 더 잘 볼 수 있었다. 당장 내 눈 앞에 있는, 내가 겪어야 할 현실이 아니니까. 어쩌면 그저 젠체하며 내가 있는 곳과 비교하듯 깎아내리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깎아내릴 부분은 없었다. 단편적인 시각으로나마 보이는 한국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냥 그렇게 희망을 걸어두고 싶었다.


얼마 전에,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영상 통화를 하면서 이곳의 언어로 자기소개를 할 일이 있었다. 내가 한국어로 설명해 주지 않으면 그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들이었지만, 평소에 하던대로 소개를 했다. 제 이름은 뭐고요, 한국에서 왔어요. 한국에서 뭘 공부했고, 그걸 더 공부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어요. 어떤 날은 나만큼 나를 잘 아는 사람도 없지 싶다가도, 또 어떤 날은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겠는 상태가 된다. 그렇게 어영부영 살다가 어느 날 자기소개를 하고 나면, 내가 이런 사람이었지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나 공부하고 싶어서 여기 왔지.


제 1세계에 산다는 것은 현재로써 가장 발전된, 앞선 것이라고 평가되는 생활 양식을 부분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필연적으로, 사회 간 권력의 불평등을 목격하는 것이다. 채식주의자로 사는 것은 지구에 도움이 된다. 그리고 유기농 채소를 구입하는 것은 일반 채소를 구입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값싼 외국인 노동자들의 노동력이 아닌, 비싼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작은 개인은,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물장구를 열심히 치며 가까스로 물 위에 떠 있는 중이다. 또한 나의 존재는 태생이 슬프게도, 어디서든 일등 시민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너의 서사를 써 주고 싶지는 않다. 나는, 굳이 써야 한다면 나의 서사를 쓸 것이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기가 두렵다. 쌍커풀 없는 작은 눈과 낮은 콧대가, 염색하지 않아도 새까만 머리카락이, 스스로 자른 짧은 머리카락이, 그대로 드러나는 내 주근깨가. 꾸미지 않아도, 혹은 열심히 꾸며도, 나를 재단하려 드는 그 시선들이 나는 아직도 두렵다. 전형적이면서도 비전형적인, 스스로 모순적인 내 모습에 나는 아직도 자신이 없다. 난 늘 누군가에게 빚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나보다 좀 더 용기 있는 사람, 나보다 한 발 앞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만 나는 존재만으로도 힘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믿는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될 수 있다고. 아침에 운동을 할 때면 등교하는 아이들을 마주친다. 모두가 나를 신기하게 쳐다 보고, 나 또한 그들을 신기하게 쳐다 본다. 어느 날 나와 같은 피부색과 머리 색을 가진 아이를 봤을 때, 그 아이의 눈이 내가 웃을 때처럼 웃고 있었다고 느꼈다. 잠깐이었지만 그건 낯섦이 아니라 익숙함이었다. 걘 뭐랄까, 베이비 시터 클럽의 클로디아 같았다. 그저 흘러가는 하루를 보내면서도 그 눈빛을 떠올리곤 한다.


내 인생의 바다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잠겨 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답을 정해 둔 질문을 자주 했다. 내가 할 수 있을까요? 내가 이걸 끝낼 수 있을까요? 당연히 내가 원하는 답은, 그럼, 할 수 있지. 끝낼 수 있지. 그리고 감사하게도 내 주변 사람들은, 지겹게도 반복되는 내 질문에도 늘 한결같이 대답해 주었다. 응, 너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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