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생각을 정리하고픈 책을 읽었다. '독일'이라는 키워드로 경기 사이버 도서관을 검색했고, 그 결과로 알게 된 책이다. 독일인 친구에게 '나 최근에 독일에 관한 책을 하나 읽었어.'라고 했더니, '뭐, 2차 세계 대전 관련된 거?'라고 묻더라. 그 질문을 받자마자 나는 내가 혹시 실수를 했나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왜냐면 정말 2차 세계 대전에 관한 이야기가 맞았기 때문이다.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의 이야기니까. '독일을 너무 자연스럽게 2차 세계 대전을 연관 짓는 것이 혹시나 너에게 개인적으로는 지겹게 느껴질까?'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비록 히틀러는 독일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지만, 어쨌든 2차 세계 대전과 독일이 한 일에 대해서는 두고두고 얘기해 볼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 신기하다. 알지? 다른 나라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했더니, 크게 웃으면서 '한국인인 네가 그런 말을 할 줄 알았다'고 했다. 참으로 전형적인 한국인과 독일인의 대화였다.
그렇다. 이 책은 2차 세계 대전 전후로 괴벨스의 속기사로 일했던 전적이 있는 브룬힐데 폼젤이라는 사람의 인터뷰를 엮은 책이다.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었고, 내가 읽은 것은 책이라는 매체로 출판된 것이다. 옮긴이의 말,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인터뷰, 엮은이의 말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엮은이의 말이 가장 읽기 어려웠고 시간도 제법 오래 걸렸던 것 같다. 인터뷰는 오히려 그냥 친구와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듯이 편하게 읽었다. 말을 거는 듯한 문체로 쓰였다는 것도 글을 쉽게 읽을 수 있었던 데 한몫했을 것이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이 사람의 이야기는 그저 한 개인의 이야기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가 하는 그의 과거 이야기는 어떤 거대한 악의 축이나 정치적인 함의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들을 찾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엮은이의 말이 더 어렵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엮은이는 이 이야기에서 마치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과 매우 비슷해 보이는 개념을 매우 정치적인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전쟁을 직접 겪어 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실제로 겪은 사람들로부터 그것에 대해 듣고, 매체를 통해 보고 한 것들은 전쟁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폼젤이 얘기하는 당시의 독 일상은 나에게 소설과 같은 결로 느껴졌다. 내가 겪지 못한, 어떤 시점의 이야기. 나는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당시의 베를린을 묘사하는 폼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곳이 과거에는 그랬구나 하며 신기해하기도 했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의 자전적 이야기만큼, 그 당시의 생활상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수단도 없을 것이다. 나는 폼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1930-40년대의 독일 베를린을 상상했다. 그러니까, 폼젤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폼젤의 이야기 안에서는 '끔찍한 전쟁'을 외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와 현재 사이의 공통점을 찾다 보면 우리는 불가피하게 다음 몇 가지 물음에 부딪힌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아직은 새로운 선동가들의 말에 넘어가 극단적인 경향을 보이는 사람이 다수가 아니지만, 대중의 상당수가 현재의 사회적 상황에 수동적이고, 무지하고, 무관심하게 대응하고 있지 않은가? 브룬힐데 폼젤이 22~34세까지의 시대에 자신과 주변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의 젊은이들도 마찬가지로 비정치적이지 않은가? 현세대의 정치 혐오야 말로 민주주의의 근간을 위협하는 요소가 아닐까?
그러고 나서 엮은이의 말을 읽어보면, 과장해서 한 대 얻어맞는 듯한 기분이 든다. 폼젤이 설령 거짓으로 인터뷰에 응했든, 아니면 진심으로 본인은 정치 상황을 모르고 있었든 모든 발언은 그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아무리 개인은 개별적인 존재고 구조 앞에서 나약하다고 한들, 그가 속한 사회와는 좋든 싫든 계속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폼젤의 그 무관심은 현대에 와서 정치의 큰 문제점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아는 게 힘이고, 모르는 건 죄가 아니지만. 내가 뭔가 잘 알지 못함을 알면서도 모르는 건 죄가 될 수 있다. 과거의 나에게 정치는 늘 그들만의 리그였고, 내가 정치와 관련해 행동하는 것은 -코로나 때문에 재외선거가 취소된 경우 빼고는- 선거 기간에 투표를 하러 가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정치는 대의민주주의라는 특성으로 인해 그들만의 리그처럼 보이기도 하고, 나는 여전히 투표만 할 뿐이지만 마음가짐은 좀 달라진 것 같다. 특히나 독일에서 지내면서 한국과 거리를 두고 그곳의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게 되면서 말이다.
나는 인간들이 똑같은 것에 다시 한번 속을 정도로 그렇게 어리석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일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아요. 하지만 대중은 여전히 대중이라고 생각해요. 숙고하고 비판하는 일에는 좀 게으르고 나태하다는 말이죠. 사람들은 배만 부르면 그만이에요. 그래서 정치판에 누군가 나타나 자신들의 걱정을 일부라도 해결해 주면 만족해해요. 그러지 못하면요? 그다음은 아무도 모르죠!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고민해 보지 않았을까. 내가 만약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시절에 살고 있었더라면, 독립운동에 가담할 수 있었을까? 독립운동이라는 적극적인 저항이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일이라도 식민통치에 반하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대답은 각기 다를 수 있겠지만, 분명 앞서 언급한 일들을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 분들을 기리고 기억하려는 것 같다. 사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생각이 많다. 지금은 식민통치도 독재도 (적어도 명시적으로는) 불가능한 시대지만 서도, 늘 다수인 대중의 선택이 항상 옳을 수는 없다. 특히나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를 가진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는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나 고민하게 된다. 그때는 옳고 지금은 틀리다, 아니 그때는 틀렸지만 지금은 옳다. 어떤 의견을 갖고 있든 누구나 한 표를 행사함으로써 주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 평등하다는 점에서 다행인 것 같기도 하다.
지금까지 서구에서 우익 포퓰리스트들의 진군은 성공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싸울 능력이 있고 사회적 취약 계층을 쉽게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반면에 일반 시민들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처럼 수면 상태에 빠져서 다양성이 사라지고 연대가 해체된 사회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서구적 민주주의가 급속도로 붕괴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가 무슨 의미인가 검색해 봤다가, 이번 대선 후보 중 누구 하나 포퓰리스트라고 불리지 않는 사람이 없는 듯한 결과창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사실 난 '누가 포퓰리스트'인가는 궁금하지 않다. 누구의 시선에는 A일 수도, 또 다른 이의 시선으로는 B일 수도 있겠지. 그런 상대적인 개념을 따지기보다는, '다양성이 사라지고 연대가 해체된 사회'라는 말에 더 눈길을 주고 싶다. 현대 사회에 있어서 세계화는 하나의 큰 흐름이고, 그로 인한 다양성의 도래는 필연적인 결과처럼 보인다. 그렇담 개인은 이 세계화와 함께 융화되거나, 이 흐름에 거스르며 원래의 자리를 지킬 수도 있겠다. 다양성도 그 주체가 참 '다양'할 것도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은 과연 이 다양성이 현대에 들어서야 주목받게 된 개념일까?라는 것이다. 지금은 어떤 개인이 주류에 힘입어 누군가를 탓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생각의 방식을 끊어내지 않는다면 다음에 사라질 것이 누가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다음은 정말 모르는 일이다.